#39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수치심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각도 그에게는 사전 속의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 아멜이 자신의 시커먼 생각들을 읽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가까운 강물에 얼굴을 싸매고 뛰어들고 싶었다. 낯이 뜨거워 견디기 어려웠다.
아멜은 그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읽으며 픽 웃었다.
“카일. 아무리 그래도 공작 전하 쯤 되는 분이 강에 뛰어들 생각을 하면 어떡해요.”
“정말…… 정말 다 보신 겁니까? 제 속마음을? 모든 순간?”
카일이 말하는 ‘모든 순간’은 실제로 모든 순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애매한 단어로 칭하는 순간은 딱 하나였다. 아멜도 그 사실을 눈치채곤 큼큼 헛기침을 했다.
“음…… 네. 미안해요. 보려고 본 건 아닌데. 그래도 기분은 좋았어요! 카일이 저를 진짜 원하고 있다는 게 들리니까 더 흥분된다고나 할까?”
“…….”
“에이. 원래 그거 할 때는 솔직한 마음을 공유하는 게 좋다잖아요? 덕분에 저도 뭘 어떻게 해야 카일이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고. 이런 게 윈-윈 아니겠어요?”
뻔뻔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그녀도 민망했다. 아레테를 부여받고 처음 그에게 안겼을 때, 속마음이 이런 상황에서도 들려온다는 것을 알곤 얼마나 당황했던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종아리를 쓸어올리며 드러난 배에 입 맞출 때, 혈기왕성한 연하 남주는 그야말로 오만 가지 생각을 했다. 오만 가지 나쁜 생각을.
‘대한민국에서 별로 쓰지도 않던 절륜하다는 말이 절로 떠오를 정도였지.’
아멜이 야릇한 미소를 지을수록 카일의 얼굴은 빨갛게 익었다. 본의 아니게 그의 혼을 쏙 빼놓은 아멜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카일. 말한 대로 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목걸이를 하고 있던 그레첼 영애의 주변인들부터 당일 연회에 참석했던 사람들과 접촉해 누가 진범인지 가려낼 거예요.”
넥타이를 끌러 내리고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 열을 식히던 카일이 또 한 번 멈칫했다. ‘접촉’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상대와 닿아야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 접촉을 해야 하긴 할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에는 영 켕겼다. 접촉이라니.
“그레첼 영애와 가까운 사람들 중에는 남자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들과도 접촉할 겁니까?”
“손끝이 잠깐 스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
예상치 못한 곳에서 카일이 반감을 드러내자 아멜은 당황했다. 손을 잡아 쓰다듬겠다는 것도 아니고 살짝 스치기만 하겠다는데!
“그럼 카일이 생각하기에는 어떤 접촉이 괜찮은 건데요?”
“일단 손끝은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일의 속마음이 또다시 아멜에게 들려왔다.
「누나는 손길이 너무 야해.」
「……이것도 읽고 계시는 건가.」
아멜은 ‘내 손길이 야한 게 아니라 네가 음란마귀가 끼었다’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다리는 절대 안 됩니다. 발끝도 너무 은밀하고…….”
“그럼 대체 어디가 괜찮은 거예요?”
“……발뒤꿈치 정도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대체 발뒤꿈치를 어떻게 스치란 말인가. 아멜은 카일의 집착 어린 시선에 혀를 내두르며 다시 본론을 꺼냈다. 바네사를 경호원으로 확정 짓는 것만큼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바네사라는 여자는 믿을 만한 사람입니까?”
“네. 바네사가 싹퉁바가지가 없긴 해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붙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만 성공적으로 훔쳤다면 아레티스트의 보스가 되었을 사람이니.
게다가 바네사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곧장 눈치챌 수 있는 아레테를 가졌으니 아멜은 걱정이 없었다.
“부탁이에요, 카일. 응?”
카일은 양손을 꼭 맞잡는 아멜의 진득한 요청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약속할게요. 카일, 고마워요.”
아멜이 생긋 웃었다. 그녀의 입술에 자연스레 카일의 시선이 말려 들어갔다. 아멜은 손을 뻗어 그의 뒷머리를 감싸고 짧게 키스했다. 코끝이 스치고 날숨이 섞이는 감각이 짜릿했다.
“카일이 속으로 제 키스를 너무 원하시는 것 같길래.”
“…….”
카일은 아멜이 시커먼 속마음을 읽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아니, 오히려 더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걱정하는 마음까지도.
물론 아멜이 위험에 빠질 상황이 생기도록 가만히 기다릴 그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황제 폐하께서 이런 결정을 내리실 줄은 몰랐습니다.”
차이엘드라는 대부호 가문이 그간 갱생의 여지가 없는 황제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주며 기대한 것은 하나였다.
차이엘드가 황실의 일까지 신경 쓰지 않도록, 그리고 외부의 세력들이 하일 제국이라는 선을 멋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자리를 지키는 것.
허나 현 황제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긴커녕 하늘 위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무능을 손으로 가리기에 급급해하고 있다.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허수아비라.’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호시탐탐 차이엘드의 밭을 노리는 새들을 쫓아내지 못하는 허수아비는 갈아치울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그놈이 어떻게 생각하냐는 건데.’
카일은 잠시 눈을 굴리다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버지보다 못한 아들이라면 깔끔하게 황실을 없애고 하나 다시 세우면 될 일이니까.
***
카일은 떨떠름한 입장을 고수했지만 어쨌든 바네사는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숙식하게 되었다. 숙식이라는 표현이 딱 맞았다. 바네사에게는 이곳이 직장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카일이 바네사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했을 줄이야.’
그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바네사는 정말 목걸이 절도범으로 몰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카일이 힘쓴 덕에 차이엘드의 고용인으로 쓰고 싶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구금실에서 풀려난 바네사는 내 방 바로 옆의 작은 방에 머무르며 나를 전담 경호했다.
하일드 집사님께 경호원 교육이라도 받은 것인지 바네사는 기합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정말 차이엘드에 뼈를 묻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바네사. 오늘 오후에 황궁에 다녀와야 하는 거, 알죠?”
“그럼요, 마님. 알다마다요.”
“제발 그 호칭 좀…….”
“하지만 하일드 집사장님이 이렇게 부르라고 했는걸요? 뭐, 단둘이 있을 땐 다이앤 영애라고 부를게요.”
여주인공의 적응력은 남달랐다. 장담컨대 바네사는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도 잘 먹고 잘 살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레티스트라는 용병 집단에서 몇 년을 구른 덕에 사회생활에도 도가 터 능구렁이가 따로 없었다.
“그나저나 다이앤 영애, 몸은 괜찮으세요? 어젯밤은 와…… 역대급이던데요? 깜짝 놀랐잖아요. 지진이라도 난 줄 알고. 얼마나 허리 힘이 좋아야 침대가 다 흔들리지? 공작 전하는 얼굴만 반반한 게 아닌가 봐요.”
바네사는 나와 친밀감을 쌓기 위해 음담패설 및 약혼자 칭찬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듯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매번 전날 밤 들었던 소리에 대해 입 아프게 떠들어댔다.
“바네사.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얘기를 자꾸 해요? 여긴 차이엘드 공작저인데.”
“누가 들으면 영애가 부러워서 떼굴떼굴 구르겠죠. 어떻게 며칠 내내 그렇게 격해요? 두 분이 엄청 잘 맞나? 전 잠을 못 자겠어요, 잠을.”
“…….”
“아, 욕실은 수도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거 아시죠? 어제 화장실 갔다가 잠 다 깼잖아요. 공작 전하가 그렇게 달콤한 목소리로 꼬드기는데 어떻게 그만하자는 말이 나와요? 영애도 참…… 대단하시다.”
“바네사. 그만 해요.”
나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로 식히며 책상을 두드렸다.
젠장. 청순하고 따스한 여주가 왜 이렇게 음담패설에 능하담.
오늘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더 이상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바네사는 내 책상 위에 오늘 자 신문을 내려놓았다. 내가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하일 타임스였다.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나는 일이 내 뜻대로 굴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종!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도난! 도대체 왜?]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이 커다랗게 박혀 있고, 그 아래로는 황제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어떤 식으로 써먹다가 도난당하게 되었는지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영애가 원하던 대로 오직 하일 타임스에서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다루고 있었어요. 길가의 가판대를 보니 다른 신문들은 팔리지도 않던걸요?”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익명으로 목걸이에 대한 자료를 넘긴 건 하일 타임스뿐이었으니까.
3일 전, 나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황제의 문란한 사생활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타자기로 친 다음 바네사를 시켜 하일 타임스에 익명으로 제보했다.
프링글스 사장님은 약속한 대로 거액의 사례금을 지급해주었고, 추가로 폭로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다른 정보가 있다면 제발 하일 타임스에서 다루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편지까지 보내왔다.
그 결과. 오늘 자 하일 타임스에는 황제가 벌벌 떨 만한 기사가 빼곡했다.
지금 살아 있는 하일 제국민들 중 대부분은 인자했던 선대 황제가 켈트만의 족장과 우호의 표시로 교환했다던 진귀한 목걸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스크랩할 만한 신문의 한 페이지였다. 유리관에 담겨 황실의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야 마땅한 보물이자 추억을 회상하며 술을 마실 때 곱씹을 안줏거리이기도 했다.
그런 목걸이를 황제가 그날 밤 안으려는 여인의 미모를 뻥튀기하는 데 사용했다는 소식은 모두의 머릿속에 찬물을 퍼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레첼 영애는 황제에게 저항할 힘이 없는 힘없는 남작가의 갓 성인이 된 여식. 황제의 딸뻘인 그녀에게 이는 동정 여론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민심이 들끓고 있어요. 내일 아침, 황궁의 발코니에 사람들이 쳐들어갈 기세던데요.”
바네사가 신문을 보며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민심을 잃은 황제는 작은 스캔들에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데 이런 큰일이 터져버렸으니.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사람들은 화가 났을 테니. 황실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죠. 분명 익명의 제보가 쓸데없는 소리라며 반박 여론을 형성할 거예요.”
“그럼 영애는 어쩔 생각이세요?”
“바네사. 타자기 좀 가져다줄래요?”
나는 타이핑을 하기 위해 손을 풀며 창밖을 바라봤다. 공작저는 평화로웠다. 황궁에서는 사라질 평화라고 생각하니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편지를 한 통 더 쓸 테니 오늘 중으로 하일 타임스에 전해줘요. 이러면 황실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겠지.”
“무슨 내용으로 쓰시게요?”
“같잖은 해명으로 익명의 제보를 거짓말 취급한다면 추가 폭로를 하겠다고요.”
아직 하일 제국의 황실에 대해 폭로할 건 많으니,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