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40화 (40/134)

#40

하일 제국의 황제는 쓰린 속을 쓸어내리며 방안을 빙빙 배회했다. 그 앞에 예를 갖추고 있는 가고일 백작도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둘은 한배에 탄 셈이었다. 침몰하는 한배에.

“가고일 백작. 아직도 못 찾았나? 하일 타임스에 익명으로 제보한 계집년 말이야!”

“최선을 다해 찾고 있지만 워낙 민심이 흉흉해 황실 소속 기사들이 신문사를 직접 뒤지는 건 위험합니다.”

“뒤지든 뒤집든 일단 그 여자부터 찾아내야 할 것이 아닌가! 연회에서 벌어졌던 일과 황실의 일을 바깥으로 떠벌려 나를 이 꼴로 만든 계집인데!”

황제는 지끈거리는 뒷목을 손으로 꾹꾹 마사지하며 물을 찾았다.

요즘 조금만 화가 뻗쳐도 목이 마르는 것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생 주치의의 의견을 무시하고 기름진 음식만 가까이한 벌을 이렇게 받는가 싶었다.

‘이게 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졌기 때문이야.’

동방의 비술에 따르면 갓 성인이 된 여인과 동침하는 것이 상당한 심신 안정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음과 양이라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조화를 이루면 젊음을 되찾을 수 있다던가.

정말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잠자리를 통해 몇백 살을 살다 죽은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황제는 뜬금없는 동양의 낭설을 근거로 딸뻘인 그레첼 영애에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선사했다. 한 떨기 백합 같은 그녀와 동침하면 모든 묵은 병이 씻은 듯 나을 것 같아서.

하지만 사사로운 욕심에서 시작된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야 말았다.

“가고일 백작! 일단 하일 타임스에 실린 제보는 모두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반박 보도부터 내게!”

“폐하, 그것이…….”

“이 사람아, 또 뭔가! 답답하게 굴지 말고 얼른 말하게!”

“방금 제 수하가 물어다 준 정보인데 말입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오늘 자 하일 타임스를 근거 없이 반박하면 추가 폭로를 하겠다고 했답니다.”

“뭐야?”

황제는 진노하며 탁상 위에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애꿎은 화병이 산산 조각났다.

‘대체 어느 계집년이 폭로를 한 거야!’

추가 폭로라니. 정말 폭로할 거리가 있어 배짱을 부리는 것인지, 아무것도 없는데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아는 듯 꾀를 부리는 것인지 알 길이 없어 위험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가고일 백작. 추가 폭로고 뭐고 일단 급한 불부터 꺼. 황궁 정문에 백성들이 몰려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하일 제국의 황제는 결국 어리석은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가고일 백작 또한 그의 명령에 머리를 조아렸다.

구석에 앉아 두 사람의 동작을 한 편의 연극 보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황태자, 베르들레반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야기는 끝난 듯하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깍듯이 예를 차린 베르드는 곧장 제 방으로 가는 대신 누이들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언제부터인가 방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누이들은 몇 개의 방에서 함께 모여 살았다.

‘방이 부족하긴 무슨. 방을 유지할 돈이 없는 거겠지.’

무작정 찾아 들어간 방에만 누이동생들이 열 명이었다. 모두 현명한 황후를 잃은 황제, 아버지가 아랫도리를 방탕하게 놀려 얻은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고귀한 신분임에도 기숙사처럼 한 방에 몰려 생활하는 데에 불만이 없었다.

사실은 대접해주는 이가 없어 자신들이 공주인지, 황가의 핏줄인지, 영애인지 자각이 없다는 표현이 다 맞았다. 그래서 베르드는 누이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나 왔다.”

“오라버니! 이리 오세요. 오늘은 새로운 가발이 준비되었답니다!”

누이들은 황실의 대를 이을 황태자이자 남자인 베르드를 자신들처럼 치장시키는 데에 재미를 붙였다. 자그마치 십 년도 넘게.

베르드는 오늘도 실험용 쥐가 되어 제 얼굴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생각에 잠겼다.

‘……하일 제국은 어떻게 되는 거지.’

풍전등화. 바람 앞의 등불. 딱 지금 황실에 어울리는 말이었다. 베르드는 오늘 자 하일 타임스를 읽고 또 읽으며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사실 여태까지 황실이 유지된 것도 다 차이엘드라는 돈줄 때문이지.’

누군가가 황제가 언제부터 여색에 미쳤냐고 묻는다면 베르드는 똑똑히 대답할 수 있었다.

어머니, 현명했던 황후가 죽은 후부터였다. 베르드는 따스했던 어머니를 잊고 여인들을 무턱대고 침실로 끌어들이는 아버지를 증오했다.

‘대체 어떻게…….’

어머니를 잊으려 여인들을 끌어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베르드는 아버지의 방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의 방식이 얻은 것이라곤 여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막대한 지출과 황실 명예의 추락, 그리고 수많은 누이동생들뿐이지 않은가.

“오라버니, 인상 찡그리지 마세요! 파우더가 안 먹는단 말이에요.”

“알았다. 알았어.”

베르드는 최대한 온화한 웃음을 띤 채로 생각을 이어갔다. 아버지가 미웠으나 아버지의 뜻대로 차이엘드의 자금을 끌어오는 데에 협조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황실 돈에 씨가 마르면 어머니가 귀족이 아닌 누이동생들은 길거리로 나앉게 되리라.

‘그런 정의로운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차이엘드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 그가 방탕하게 구는 아버지보다 백 배는 더 미웠으니까.

차이엘드 공작가는 제국의 노른자 땅을 공작령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부호 가문이었다. 대대로 부자였다. 더 재물을 탐하지 않아도 충분하지 않나 생각될 만큼.

그러나 제국의 황후가 죽는 순간 선대 차이엘드 공작이 어떤 일을 벌였던가.

‘어떻게 누이동생이 죽어 불안정한 틈을 타 그런 일을 할 생각을 했을까.’

선대 차이엘드 공작은 황후인 누이동생이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황실이 흔들리리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두었다.

요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차이엘드의 편에 서기까진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황궁에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자보다 차이엘드에게 충성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개 같은 집안의 개 같은 방법으로 정해진 후계자가 바로 카일리안 차이엘드. 돈줄을 쥐고 황제의 위에 군림한 오만한 차이엘드 공작이었다.

‘……분명 역겨웠는데.’

베르드는 카일리안을 증오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감이 서려야 한다고 교육받은 황태자인 자신이 그의 앞에서라면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하는 게 싫었다.

‘짜증 나게 잘생기기까지 해서는. 키도 크고. 제길! 싸움도 잘하고! 돈도 많잖아! 게다가…….’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아가씨의 사랑을 받는 걸 보면 하반신도 걸출한 듯했다. 젠장.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질투가 더 났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 여자를 만난 후로부터 이상하게 카일이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베르드는 남을 동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차이엘드 공작에게 빈대처럼 빌붙어 사는 신세이니.

그러나 그녀가 카일을 사랑한다고, 그러니 돈줄로 보지 말라고 말했을 땐 머리에 얼음물을 들이붓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젠장. 그놈은 왜 그런 예쁘고 참한 아가씨랑 약혼을 해서!’

베르드는 도끼눈을 하고 누이동생들에게 물었다.

“……얘들아. 너희는 친구가 돈만 보고 접근하면 어떨 것 같아? 돈 안 주면 친구 안 하겠다고 말하면.”

베르드의 뺨에 복숭앗빛 파우더를 발라주던 나디아 공주가 간단하게 답했다.

“거지 같지.”

“……넌 아빠가 황제인데 ‘거지 같다’가 뭐야? 그리고, 다 너희 먹여 살리려고 한 행동이거든?”

누이동생의 따끔한 지적에 되려 찔린 베르드가 툴툴거렸다. 어린 것들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말해 봤자 누이동생들은 까르르 웃을 뿐이었지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 오라버니. 이제 립스틱…… 어라?”

발랄하게 말하던 공주 하나가 무슨 소리를 들은 것처럼 문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문을 활짝 열자 그곳엔 정중한 모습의 남자가 보였다.

“황태자 전하. 공작 전하께서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차이엘드의 집사장인 하일드였다. 베르드는 제 꼴이 어떤지 인지하지 못한 채 하일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카일이 직접 찾아왔다면 분명 재정 문제일 것이다.

‘아니면 이참에 황실을 파탄 내겠다는 소리를 할 테지.’

어쨌거나 지금, 하일 제국의 황실은 꺼지기 직전의 불씨이니 말이다. 차이엘드 공작은 머리까지 좋으니 지금이 황실을 무너트릴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맙군.”

베르드는 하일드의 손짓을 따라 벤치로 이동했다. 형제를 싹 쓸어버리고 공작 자리를 차지한 괴물 공작이 호수 앞 벤치에 앉아 감상에 젖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왔다. 왜 불렀냐?”

“오셨습니까.”

가식으로 점철된 깍듯한 존댓말. 흑발에 적안. 차이엘드 혈통들의 특징. 어머니도 같은 모습이었다.

베르드는 환영처럼 되살아나는 어머니와 그녀를 완전히 잊고 이 사달을 낸 아버지를 떠올리며 굳은 얼굴을 했다.

“카일. 네가 바라던 대로 황실이 망해가는 꼴을 보니 재미있냐?”

“그리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속 시원한 부분도 있지만.”

“……너 솔직히 말해. 하일 타임스에 익명 제보한 거, 네가 한 일이지?”

“제보자는 저도 찾고 있습니다. 사건을 명료하게 정리해둔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기도 하고. 그런 정보통을 놓치는 건 실수일 테니.”

카일 또한 건조한 눈으로 베르드를 바라봤다. 대체 무슨 짓을 하다 왔길래 얼굴이 단풍이라도 든 듯 울긋불긋하단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니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지는지라 카일은 얼른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베르드. 미리 말하지만 제겐 핏줄이라는 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배신당하거나 배신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알아. 그리고 역겨운 존댓말 집어치워. 저번엔 개가 되라느니 마느니 하지 않았나?”

“그럼 그렇게 하지.”

덥석 반말을 하는 카일을 보며 베르드가 혀를 내둘렀다.

“베르드. 황제 폐하가 오늘내일하시는 것 같던데. 난 네가 준비되어 있다는 대답을 원해.”

“부황의 건강이라면…….”

“건강을 말하는 것 같나?”

“……!”

베르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차이엘드 공작은 여전히 역겨웠고 여전히 오만했다. 그럼에도 그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가 미웠다.

너를 따르겠다고 고개를 숙일지언정 이 질문은 해야겠다. 베르드가 이를 악물다 운을 뗐다.

“카일리안 차이엘드. 황실을 네 애완견 취급할 거면 네가 새 제국을 세우는 게 낫지 않겠나? 왜 사람들을 가지고 체스 게임을 하는 거야?”

그러자 감정이 담겨 있지 않던 카일의 얼굴이 묘하게 발그레해졌다. 대부호 공작은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다 조신한 목소리로 대답을 흘렸다.

“내 약혼녀가 돈을 막 쓰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황실이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