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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41화 (41/134)

#41

베르드는 카일의 답을 한참이나 곱씹었다.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것 같았다. 괴물이라 불리는 차이엘드 공작이 약혼녀가 돈 막 쓰는 걸 싫어해서 황실을 갈아엎지 않는다니.

“……카일. 미쳤냐?”

비웃으려 한 말이었으나 카일은 진지함을 가득 담아 답했다.

“겪어보니 알겠더군. 왜 사람들이 사랑을 미친 짓이라고 하는지.”

“……그게 방금까지 나더러 황제가 될 준비가 되었냐고 묻던 놈이 할 말이야?”

“취미가 여장인 너는 평생 모르겠지. 말 나온 김에 묻고 싶군. 여장은 대체 왜 하는 거야? 성적 취향인가?”

“그건…….”

카일이 너무도 진지했기에 베르드는 차마 ‘여장을 하고 남자 귀족들 엿 먹이는 게 재미있어서’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조금 더 그럴듯한 대답이 필요한 순간이리라.

“역시 성적 취향이군.”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그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호수를 눈에 담던 카일은 아멜리아를 떠올렸다. 문득 공작저에 있는 아멜리아 호수를 누나와 함께 거닌 지 이틀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보고 싶다.’

아멜리아를 떠올리자 황태자와의 대화가 무척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할 말은 마무리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도 좋을 듯했다.

“베르드. 황가에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건 누구보다 네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시간 더 줄 생각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뜻을 확실히 말해줬으면 좋겠군.”

황제인 아버지냐, 황실과 누이들이냐. 베르드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시선을 받으며 어려운 저울질을 해야 했다. 저울의 양팔에 올려진 것들이 모두 소중해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카일. 부황을 위해 네가 준비한 건 뭐지? 광장에 마른 장작을 쌓고 불을 지필 건가? 망나니를 부를 건가?”

형제를 말살한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면 공개 처형쯤은 우스운 일로 여길 것이라는 게 베르드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지?”

누나가 싫어할 텐데. 미움받기 싫으니 그런 일을 할 생각은 없었다. 황족을 불살라버리는 건 여러모로 후한을 키우는 일이기도 했고.

“차이엘드 소유의 아무도 살지 않는 평화로운 섬. 그게 내가 황제 폐하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이다.”

“……처형하지 않을 건가?”

“베르드. 부황을 처형하기를 원하나? 네 부탁이라면 그렇게 하지.”

“…….”

아버지의 목숨과 열 명이 넘는 누이들을 저울질했을 때는 어느 쪽이 더 무겁고 가벼운지 쉬이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유’와 누이동생들의 삶이라면.

“카일리안 차이엘드. 내가 황제가 되어도 후회하지 않겠나?”

베르드는 결국 암묵적으로 핏줄인 아버지를 배신했다. 그로써 혈육을 죽이고 공작 자리를 차지한 차이엘드 공작의 완전한 측근이 되었다.

카일은 용건을 마쳤을 때의 형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이곤 말했다.

“제가 후회할 것 같습니까? 누가 황제가 되든 상관없는데.”

마음에 안 들면 갈아버리면 되는 일. 픽 웃은 공작은 다시 황태자에게 예를 갖추곤 마차에 올랐다. 군더더기라곤 없는 동작이었다.

베르드는 점점 멀어지는 마차 위에 새겨진 차이엘드 공작가의 문양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앞발을 든 맹수. 원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낸다는 괴물들의 집안.

‘제길. 내가 저 발톱을 핥게 될 줄이야.’

지끈거리는 그의 머릿속에 일전에 만났던 아멜리아 다이앤의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랐다.

‘제발 그 아가씨의 말대로 저놈이 괴물이 아니어야 할 텐데.’

베르드는 잘 알지도 못하는 다이앤 영애의 말이 사실이기를, 자신이 내린 결정이 하일 제국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

다시 차이엘드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 안. 카일은 창밖의 성난 군중들을 바라보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다음 골목에서 왼쪽으로 빠지면 대로가 있을 겁니다. 그 길을 통해서 가주십시오.”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하일 타임스를 찍어내는 건물이 그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니 건물을 보고 싶었다. 오늘 아침 신문을 읽고 브리핑을 받는 내내 하일 타임스에 대해 관심이 지대했던 카일이었다.

‘대체 하일 타임스는 어떻게 제보자를 구한 거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분실된 사건으로 인해 가장 큰 이익을 본 게 하일 타임스라고 생각될 정도로 특종으로 인한 매출은 엄청났다.

하일 타임스에 대서특필된 목걸이 관련 기사들을 겨우 짜깁기해 내놓을 뿐인 타 신문들은 이미 신뢰도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카일은 익명의 제보자가 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다. 어떤 배짱을 가진 사람이기에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으려는 황궁의 비밀을 가지고 황실을 뒤흔든단 말인가.

“공작 전하. 저 건물이 하일 타임스 사입니다.”

하일드가 빨간 벽돌로 된 건물을 가리켰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피 끓는 청년들이 성지순례 하듯 신문사 앞에 몰려 있었다.

다른 신문의 기자들. 몰락한 가문의 가난한 자제들. 이 기회에 황실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으로 나아가자는 외침.

‘저 여자가 왜?’

그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백금발을 가진 여자가 있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사랑스러운 약혼녀가 경호원으로 들인 마음에 안 드는 여자.

“잠깐 멈추십시오.”

마부는 능숙하게 마차를 세웠다. 카일은 바네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마법 망토를 두르곤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하일 타임스의 건물로 들어간 바네사는 남자에게 서신을 건넸다.

닦지 않은 창문을 통해 보는 것이라 편지를 받은 남자의 얼굴이나 그것을 전해주며 덧붙이는 바네사의 입 모양이 보이지 않았다.

용건을 마친 바네사는 지체하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자신을 지켜보는 차이엘드 공작을 발견하곤 화색을 했다.

‘웬 떡이야? 저 마차를 타고 가면 공작저까지 훨씬 빨리 갈 수 있겠는데?’

바네사가 눈을 반짝이며 차이엘드의 마차를 향해 뛰어왔다. 그 모습을 본 카일은 인상을 더욱 깊게 찡그리며 말했다.

“당장 출발하십시오. 저 여자가 오기 전에.”

“하지만 저 여자분은 누나 님의 경호…….”

“쳇.”

마부가 망설이는 사이 바네사가 마차에 찰싹 달라붙었다. 이 여자는 예의범절을 독학한 것일까. 카일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뭡니까.”

“큼, 큼. 공작 전하를 뵙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태워주시면 안 될까요? 걸어가려면 다리가 아파서…….”

“싫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울컥 화가 났지만 바네사는 화를 내고 자존심을 지키는 것보다 비굴하게 굴더라도 마차를 얻어타는 쪽을 택했다. 다이앤 영애에게 미쳐 있는 이 남자라면 구슬리기가 쉬우리라.

“알았어요. 걸어갈게요. 마차 안이 텅텅 비었는데 저를 발견하고도 그냥 지나쳤다고 말씀드리면 마님이 참 슬퍼할 텐데.”

“…….”

“그것도 마님의 심부름을 나온 저를…… 헙.”

바네사는 제 입을 막았다. 아멜은 자신을 통해 하일 타임스에 몰래 익명의 폭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다. 특히 차이엘드 공작이 이 일을 알아서는 안 된다던가.

‘하여간 서로를 끔찍이 아낀다니까.’

바네사는 순진한 얼굴을 했지만 속으로는 혀를 츳츳 찼다.

일단 아멜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카일은 바네사를 마차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연인의 이름이 그만큼이나 중요했다.

마차가 출발하자 카일은 곧바로 추궁하듯 물었다.

“하던 말 계속하십시오. 누나가 뭘 시킨 겁니까?”

“어머. 공작 전하께서 누나라는 말도 쓰시네요?”

“남의 애칭에 관심 끄고 본분이나 똑바로 해. 내 약혼녀가 뭘 시켰지?”

길들여졌다고 해도 맹수는 맹수였다. 바네사는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썅. 내가 아레테가 없지 자존심이 없냐?’

반말을 툭툭 내뱉는 카일을 한 대 패고 싶다가도 그가 자신의 월급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얌전해졌다. 아레테보다, 자존심보다 중요한 건 생활비였으니까.

바네사는 가장 우아한 방법으로 그를 골탕 먹이기로 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저도 주인을 향한 지조가 있는 경호원이라.”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네사에게서 풍겨오는 남자 향수 냄새가 거슬렸다. 누나가 이 여자를 시켜서 남자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공작이 이를 갈며 짜증을 삭이는 것을 확인한 바네사는 비웃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꼬리를 꼭 다물곤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오늘 이 소설책을 가져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짜증을 내며 바네사가 꺼낸 책의 제목을 바라보던 카일의 얼굴에 일순간 낭패감이 서렸다.

[지난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바람? 설마 누나가…….’

방금까지만 해도 며칠 굶은 늑대의 것처럼 형형히 빛나던 공작의 눈이 버림받은 새끼 강아지마냥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

그레첼 남작저에 얼굴도장을 찍은 건 오늘이 이틀째였다. 나는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그레첼 영애가 대접해주는 차를 마셨다.

“고마워요, 다이앤 영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니에요. 목걸이의 행방에 대해 조사하는 건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한걸요?”

그렇다. 나는 그레첼 남작저에서 목걸이가 사라진 연회 날 그레첼 영애를 만났던 사람들을 하나씩 조사하는 척 시간을 벌고 있었다.

입으로 무슨 질문을 내뱉었는지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나는 목걸이 얘기를 꺼내며 그들에게 슬쩍 접촉해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는 데만 집중했으니까.

그레첼 영애와 연회 당일에 접촉했던 사람들은 이제 절반 정도 만나보았다. 그레첼 남작가의 고용인들도 빠짐없이 조사했다.

‘남은 건 그레첼 영애의 지인들과 황궁 소속의 고용인들인가.’

터트릴 열매가 바늘 하나를 찔러 넣으면 펑 터질 만큼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생각보다 갈피가 안 잡혀서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요.”

“어떡하면 좋아요…….”

“걱정 마세요. 죽으란 법은 없을 거예요. 어떻게든 되겠죠, 뭐.”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나는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고 훌쩍이는 그레첼 영애를 토닥이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결국 황실에서는 내 익명의 폭로가 모두 거짓이며 오늘 중으로 반박 근거를 종이에 찍어 수도의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겠다고 공고했다.

나는 바네사를 시켜 황실의 반박문을 가져오게 했다. 급히 반박을 내는 것으로 보아 황제는 정말 수세에 몰린 듯했다.

‘썩을 대로 썩어서 구멍이 뚫린 배는 가라앉아야지. 여태까지 떠 있었던 게 더 이상해.’

그레첼 영애가 울음을 그칠 즈음 바네사가 도착했다. 손에는 내가 기다리던 황실의 공지문이 들려 있었다.

“여기요, 마님.”

“고마워요. 바네사.”

내가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자 그레첼 영애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왜 같이 철창에 갇혔던 바네사가 내 경호원이 된 것인지 궁금해하는 얼굴. 하지만 이유를 말해줄 수는 없었다.

“그레첼 영애,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네사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하일드 집사님께 이런 교육까지 받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화장실에 가는 게 아니었다.

느리게 걸으며 바네사가 가져온 황실의 공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요약하자면 ‘익명의 계집이 황실에 대해 떠벌린 것은 다 구라’였다.

“마님. 하나도 동의하는 게 없는뎁쇼?”

“바네사. 대체 그 말투는 뭐예요?”

“요즘 하인 말투를 연습 중이라서요. 그나저나, 이제 어떡할 거예요? 하일 타임스 사장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것도 이제 질려요. 누가 보면 제가 그 남자를 짝사랑하는 줄 알겠어.”

“미안하지만 그 일, 한 번만 더 해줘야겠어요.”

내가 말하자 바네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또? 왜요?”

그야 당연히……

“추가로 폭로해야죠. 황실의 현 재정 상태에 대해.”

바네사는 나를 향해 작은 감탄사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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