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부지런한 신문 배달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이른 아침.
며칠째 하일 제국의 황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좌불안석이기는 그의 수족인 가고일 백작이 더했다.
“가고일 백작. 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내가 이 황궁에서 믿는 건 자네뿐일세.”
“이, 일단 오늘 자 신문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시지요, 폐하.”
“대체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어떤 놈이 훔쳐 간 거야! 일단 이번 일만 넘기고 나면 목걸이 절도 사건과 관련된 놈들의 목을 싹 다 베어버려야겠어.”
“……그리하시옵소서.”
침착한 척 말하는 가고일 백작은 사실 그 누구보다 떨고 있었다.
가고일 백작은 호통치는 황제를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황제와 자신의 몸뚱이는 기슭에서 마구잡이로 자란 덩굴식물처럼 깊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를 떼어내려거든 제 명줄이 끊어지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어쩔 수 없이 연대해야만 했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 그 사실을 알았다간…….’
가고일 백작은 입술을 짓씹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은 차이엘드 공작과 그 오만한 약혼녀가 처리해 줄 것이니 손대지 않고 코를 푸는 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이 점점 꼬였다. 그제서야 가고일 백작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 대해 정보를 모아보기 시작했다.
하일 타임스라는 중소 규모의 신문사에서 특종을 터트리기 전까지는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그 진귀한 목걸이가 사실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분실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가 ‘그 실수’를 저지른 건 아무도 몰라. 이 망할 신문 폭로 사건만 어떻게든 지나가면…….’
일단 황실과 제국이 안정되고 나면 목걸이를 찾으면 된다. 차이엘드 공작이 하일 제국에 있으니 성난 켈트만이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가고일 백작이 간절한 마음으로 양손을 깍지꼈을 때, 그의 수하가 뛰어와 무릎을 굽혔다.
“말씀하신 오늘 자 하일 타임스입니다!”
“이리 내!”
황제와 가고일 백작은 신분도 잊은 채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야들야들한 종잇장에 자신들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듯.
[익명의 제보자, 추가 폭로…… 하일 제국 황실의 재정 상태는?]
[황실은 세금을 모두 어디에 사용했는가]
헤드라인만 훑어보았는데도 두 남자의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과연 신문에는 그들의 운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파멸. 혹은 죽음.
“……이제 어찌하면 좋은가.”
황제는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 신문에서 눈을 뗐다. 황실의 재정 상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황제인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하룻밤을 상대할 여인들에게 선물할 값비싼 보석과 드레스, 체면치레를 위한 모피, 반쪽짜리 황녀들을 위한 생활비까지도.
아니.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차이엘드 은행 빚의 이자나 갚을 수 있을까.
[차이엘드 공작가의 자금 지원이 없었더라면 황실은 진작 파산했을 것이다.]
기사가 옳았다. 황실은 돈이 없었고 차이엘드는 그 적자를 막대한 자본으로 덮어주었다. 이 사실이 알려졌으니 이제 끝이겠지만.
‘……여색을 탐한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
‘황제를 모시면 세상이 내 것이 될 줄 알았는데. 이젠 내 목이 제일 먼저 달아나게 생겼군.’
하일 제국의 황제와 가고일 백작은 서로에게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입술을 짓씹었다.
이 초조함마저도 곧 끝나리라 생각하니 입안에 쓴맛이 퍼졌다.
***
나는 오늘 할 일이 많았다. 일개 칼럼니스트가 차이엘드 공작보다 바쁠 리 없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하일 타임스 건물에 들러서 칼럼을 넘긴 다음 사람들 반응이 어떤지 보고 와야겠어. 거리에 나가는 김에 통장 잔고도 확인하고 와야지.’
빵빵해졌을 통장 잔고를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매번 받기만 했으니 카일을 위한 작은 선물도 사주고 싶었다.
“아멜.”
“…….”
“누나.”
“어머, 미안해요. 언제부터 불렀어요?”
“…….”
카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봤다. 무척 쓸쓸하고 불쌍한 얼굴을 하고. 이상하다. 최근에는 도망 시도도 한 적 없는데 왜 이런 얼굴일까.
“오늘은 저녁에 황궁을 방문하는 것 말고는 일정이 없는데, 오랜만에 같이 산책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날이 좋아 호숫가를 걷기 좋을 텐데.”
“미안해요. 오늘 다녀올 곳이 있어서.”
“어디 가시는 겁니까?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시고.”
“음…….”
하일 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카일은 내 안전을 걱정하니 익명 제보를 못 하게 할지도 모르니까.
해서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했다.
“제가 외출하는 이유야 매번 똑같죠. 목걸이 분실 사건 때문에 그레첼 남작저에 가요. 얼른 조사를 끝내려고요.”
“……그렇습니까. 오늘은 조금 더 기분이 좋아 보이시길래.”
“아하하…… 아침 잘 먹었어요. 먼저 일어날게요.”
나는 망연히 나를 바라보는 카일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카일이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을지 꿈에도 몰랐다.
마차에 오른 나는 늘 하던 대로 시장에 마차를 세워달라고 말한 뒤, 가게를 통해 샛길로 들어가 하일 타임스의 건물로 향했다.
신분과 차이엘드의 약혼반지를 감추기 위해 마법 망토를 두르고 장갑을 끼는 것도 잊지 않고.
“앤 스미스,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프링글스 사장님은 끝이 동그랗게 구부러진 수염을 손질하며 나를 반겼다. 아무리 봐도 모 감자칩이 생각나는 인상. 나는 딴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가방에서 원고부터 꺼냈다.
“이게 이번 원고예요. 저번에 이야기한 대로 요즘 화젯거리를 중심으로 써 봤어요.”
“어디…….”
내가 이번에 쓴 칼럼은 역시나 황실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사람들의 이목이 가장 쏠려 있는 주제이니 인기가 많으리라.
[황실의 실수, 그 피해는 누가 떠안나]
자극적인 제목의 답은 간단했다. 황실이 자금을 방만히 운용해 적자를 겪고 있다면 그 손해는 누구를 착취해서 메우겠는가?
‘당연히 이 신문을 사서 볼 사람들이지.’
독자층을 정확히 겨냥해서 쓴 글이었다. 칼럼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할 것이고, 그 분노는 화살처럼 응축되어 황제의 심장을 관통하리라.
황제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황실에도 황제의 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가고일 백작뿐일 테니. 수세에 몰렸으니 차이엘드의 약혼녀인 나를 건드릴 수도 없을 터.
‘문제는 진범이 누구인지 터트리는 타이밍, 그리고 목걸이의 행방인데…….’
최선을 다해 찾고 있긴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 목걸이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 이상 시간을 끌면 나 말고 다른 영애들도 건드리겠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은 이만하면 충분히 무르익었다. 나는 슬슬 찔러 넣을 바늘을 준비하기로 하곤 걸음을 옮겼다.
***
“공작 전하. 부탁하신 책을 사 왔습니다.”
하일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그의 손에는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라는 소설책이 은쟁반 위에 받쳐져 있었다.
[지난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카일은 초상이라도 난 듯한 얼굴로 하일드가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머리가 침울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바람을…….’
책 제목을 끝까지 읽는 것조차 힘들었다. 카일은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누나가 다른 남자를 만날지도 모른다니.
그럴 수도 있다. 약혼녀는 매력적인 여성이니. 눈빛이 야해 삼 초만 바라보면 누구의 마음이든지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남자가 먼저 들러붙었을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속이 뒤틀려 죽을 것 같았다.
“누나가, 누나가……”
카일은 고개를 힘없이 떨궜다. 상상하기 싫지만 누나가 정말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그러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화를 낼까? 아니, 그랬다간 누나가 정말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남자가 있는데 화내는 남자에게 돌아올 리는 없지.’
그렇다고 모른 척을 하자니 억장이 무너졌다. 추궁하지 않고서는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없으리라.
카일이 고통스레 신음하자 하일드가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주인을 위로했다.
“공작 전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사랑은!”
하일드가 주먹으로 쾅 책상을 내리치곤 복식 호흡을 해 쩌렁쩌렁 소리쳤다.
“돌아오는 겁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카일은 하일드가 보여준 박력에 눈을 빛내며 안도했다. 그래, 누나는 잠깐 떠났을 뿐 돌아올 것이다.
그의 희망찬 생각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레어가 찬물을 부었다.
“하일드 집사장. 그대의 부인은 도망갔다고 알고 있는데.”
“……!”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아직 저택의 안주인 역할을 하기엔 아멜이 부족하기에 그녀의 일을 대신해주고 있던 클레어였다.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었으나 하일드는 치부를 들킨 듯 가슴을 움켜쥐며 자리를 벗어났다.
놀라긴 카일도 마찬가지였다.
“레이디 클레어. 하일드에게 부인이 있었습니까?”
“예. 공작 전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도망쳤다고 들었습니다.”
“……부인이 도망을?”
“이혼한 건 아니라고 하는데…….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요.”
카일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었다. 도망이라면 공작저 입성 초기, 누나의 취미가 아니던가.
‘사랑은 돌아오는 거라면서!’
그가 하일드에게 배신감을 느낄 때였다. 누군가가 누나 님이 돌아왔다고 소리치는 게 들렸다. 카일은 주인의 퇴근만을 기다리던 개처럼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그래. 모르는 척하자. 사랑은 20년이 넘어도 안 돌아오는 것 같으니.’
집사장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은 카일은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아멜을 맞았다.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안도감을 되찾고 싶었다. 그런데.
‘……장갑?’
불편하다며 끼지 않는 장갑을 외출할 때마다 꼬박꼬박 끼다니. 이렇게 하면 약혼반지가 보이지 않을 터였다.
“…….”
“카일, 왜 그래요?”
아멜은 환히 웃으며 카일을 껴안았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품에서는 남자 향수 냄새가 났다. 일전에 바네사가 아멜의 심부름을 하러 나갔다 풍기던 것과 비슷한 냄새.
‘……오늘은 직접 다녀오신 건가.’
이름도, 생김새도 모르는 남자에게 분노와 질투심이 끓었다. 이 향수는 분명 남성용이었다. 아멜은 남자를 만나고 왔다.
달콤한 체향과 외간 남자의 향수 향이 뒤섞일 정도로 깊게.
“…….”
“카일?”
“아멜.”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른 카일은 왼손의 장갑을 찬찬히 벗겼다. 차이엘드의 문양이 들어간 약혼반지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이 기분은 분노일까, 아니면 사랑일까. 카일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복잡하고도 뜨거운 느낌에 잠식되며 아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키스하게 해주십시오.”
“……카일. 왜 그래요?”
아멜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는 카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일까.
“나 보고 싶었어요? 그러면 말을…… 읍.”
애교로 슬쩍 넘기려던 아멜은 자신보다 두 뼘은 큰 카일의 몸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그는 단단한 팔로 약혼녀를 품어 안고 거칠게 입술을 탐했다.
누가 봐도 키스를 나눈 것처럼 아멜의 입술을 빨아들이고 깨물었다. 텅 빈 공작저에 카일이 아멜이 제 것이라는 흔적을 남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카일, 잠깐만…… 읏.”
“제가 왜 이 반지에 아레테의 결정을 넣었는지 아십니까.”
“…….”
“혼자 다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도, 눈동자도, 숨도. 제가 독점하는 게 싫습니까?”
“카일이 저를 독점하는 게 왜 싫겠어요? 그리고 이 반지…….”
나는 카일의 손가락에 내 손을 얽으며 웃었다.
“뺄 수 있는 건 내 손에 반지를 끼워준 카일 하나잖아.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처럼.”
“…….”
카일은 야릇하게 웃는 약혼녀를 보며 허, 하고 한숨을 흘렸다. 이 여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레첼 영애의 목에서 목걸이를 빼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것을.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애태우는 겁니까?”
“일단 범인부터 잡고 얘기할까요?”
이제 무르익은 열매를 터트릴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