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레첼 영애에게 목걸이를 전달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범인일 테니까. 그레첼 영애의 목을 베지 않고 목걸이를 뺄 수 있는 건 애당초에 한 명이었다.
“카일이 경호원 안 붙여줬으면 시간도 못 끌 뻔했어요. 역시 내 약혼자가 최고야.”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내게 야릇한 키스를 퍼붓던 카일의 뺨을 꼭 잡고 몇 번이고 연달아 뽀뽀했다. 그러자 잡아먹을 것처럼 굳어 있던 카일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러신다고 제가 좋아라 하며 넘어갈 것 같습니까?”
“어머. 볼까지 붉혔으면서 안 좋아하는 척은. 그런데 넘어가긴 뭘 넘어가요?”
“확실히 짚고 넘어갈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나를 다른 남자랑 공유하는 건 싫습니다.”
“음? 그건 저도 싫어요. 제가 왜 두 남자에게 공유당해야 해요?”
“……?”
분명 물은 건 난데 카일이 더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오해를 한 것인가. 다행히 상황을 빨리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
계단 위에서 클레어가 소설책의 표지를 보란 듯 톡톡 두드려준 것이다. 저 소설책은 요즘 바네사가 빠져 있어서 잘 안다.
‘지난주인가 이번 주인가, 아내가 바람을 피우네 어쩌네 하는 제목이었지. 가만…….’
나는 카일의 말랑말랑한 뺨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기며 추궁했다.
“카일. 설마 제가 다른 남자랑 놀아난다고 오해한 거예요?”
“…….”
“대체 왜 그런 오해를 해요? 내가 이렇게 예쁜 카일을 두고 어딜 가. 응? 수도에 있는 남자들 잘난 순서대로 백 명 뽑아서 줄 세워놔도 안 넘어가요. 당신만큼 멋지고 다정한 남자가 어디 있다고 제가 넘어가겠어요?”
“누나…….”
여기까지만 했어야 하는데 감동받은 카일의 얼굴을 보니 칭찬 세례를 마구마구 퍼부어주고 싶었다.
“카일. 자신감을 좀 가져 봐요. 카일이 어디가 모자라서 제가 다른 남자를 만나겠어요? 상반신부터 볼까요? 얼굴 백 점. 단단한 팔뚝 백 점. 복근이랑 허리는 국보로 지정해야 할 정도예요. 두말할 것도 없이 퍼펙트 스코어죠.”
“…….”
“하반신? 말하면 입만 아프죠. 거짓말이 아니라 저는 매번 놀란다니까요? 사람 허벅지가 어떻게 이렇게 딴딴한지 이틀에 한 번씩 꿈에 나온다고. 하지만 가장 뛰어난 건 역시…… 헙.”
“하던 말씀 계속하십시오. 어디가 제일 마음에 드십니까.”
젠장. 또 이놈의 입이 방정이었다. 내가 민망함에 시선을 피하자 다시 평소처럼 돌아온 카일이 씩 웃었다.
“오늘 밤에 제가 맞추면 됩니까? 어딜 제일 마음에 들어 하시는지.”
보이지 않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눈웃음을 짓는 것을 보니 카일은 완전히 오해를 푼 듯했다. 나는 칭찬하듯 엉덩이를 토닥이며 물었다.
“왜 그런 오해를 한 거예요?”
“……남자 향수 냄새가 났습니다.”
“아, 그거?”
나는 가방을 뒤져 작은 선물 상자를 꺼냈다. 그레첼 영애의 저택에서 차이엘드 공작저로 돌아올 때 상점에 들러 사온 것이었다.
“선물이에요. 예전에 카일이 넘치도록 준 패물들로 사긴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내 월급으로 샀다고 말하면 하일 타임스 일을 줄줄이 읊어야 할 테니.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말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이 향, 저 향 다 맡아보고 산 거예요. 이게 제일 제 취향이더라고요. 카일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제가 좋아하는 향 골랐는데, 괜찮아요?”
“…….”
속마음을 읽어보니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지금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에 익사하기 직전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른 남자가 생긴 줄 알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깜짝 선물이라니.」
「왜 하필 맨살에 뿌리는 향수를 사다 주신 걸까.」
카일은 향수를 셔츠 옷깃에 살짝 뿌린 다음, 날 품에 안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향기를 맡고 그의 몸에 얼굴을 들이밀고 숨을 들이쉬는 상상을.
「……어떻게 참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었으나 카일은 벌써부터 참기 힘들어했다.
“카일. 내가 속마음 읽는 아레테 있다고 말 안 했던가?”
“……!”
“자꾸 그렇게 나쁜 생각 할래요? 설레게.”
“……놀리지 마십시오.”
“그런데, 카일. 오늘 저녁에 황궁에 다녀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약혼녀 얼굴을 봤으니 슬슬 출발해야겠습니다.”
순순히 카일을 보내려던 나는 멈칫 그를 붙잡았다. 카일이라면 분명 황제와 만남을 가질 것이다. 그 자리에 슬쩍 끼어들고 싶었다.
황제나 가고일 백작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면 십 년 묵은 체증도 내려갈 것 같단 말이지. 기회가 된다면 신문 말고 내 입으로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고 싶었다.
“카일. 같이 가면 안…… 되겠죠? 약혼녀 자격으로.”
“안 될 건 또 뭡니까. 약혼녀인데. 원래 부부는 대부분의 모임에 함께 참석합니다.”
카일은 태연히 내 어깨를 감싸 안고 마차로 향했다.
***
황궁에는 여러 번 들어와 봤지만 황제와의 만남은 처음이라 은근히 긴장되었다. 게다가 카일은 황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기로 되어 있는지를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다이앤 영애로군. 차이엘드의 피앙세가 되었다고 해서 내 언젠가 따로 부를 참이었네.”
구라치네. 여색에 미친 황제의 부름은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같이 불러주십시오, 폐하. 저는 제 약혼녀와 떨어지기 싫습니다.”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카일이 방어했다. 황제는 그저 허허 웃을 뿐이었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차이엘드 공작이 약혼녀에게 완전히 빠져 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가고일 백작?”
“제 눈에도 그리 보입니다.”
나는 황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들 그도 한 나라를 경영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가고일 백작도 제국의 수뇌이기는 마찬가지.
카일과 둘이 대화를 나눌 때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찌 되었건 저들도 저 자리에서 버틴 연륜이라는 게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연륜으로 적자를 막고 여자를 멀리했으면 더 좋았으련만. 이미 늦어도 너무 늦은 일이었다.
“폐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큼, 큼. 슬슬 본론을 꺼내 볼까.”
무슨 일로 불렀겠나. 내가 황궁에서 쓰는 돈은 사실 차이엘드의 빚이라는 폭로를 했으니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 것이겠지.
새색시처럼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 카일이나, 그 많은 돈을 끌어다 써 놓고 이제 와 면목 없다는 듯 구는 황제나 참 대단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꾼들의 싸움이라는 건가.’
나는 이 대화에 낄 수 없으리라고 직감하며 얌전히 찻잔만 바라봤다. 황제가 본론을 꺼낸 건 그쯤이었다.
“이거야 원…… 우리가 차이엘드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게 익명의 폭로에 의해 만천하에 드러났지 뭔가. 공작은 좋은 뜻으로 우릴 도와준 것인데 미안하게 되었어.”
황제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카일도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나 카일의 미소는 뭐랄까…… 같잖다는 느낌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개인적으로 미안해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허허. 그래.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내 똑바로 반성하고 다시는 같은 일이 없도록 노력하겠네.”
황제는 ‘다신 안 그럴게요’를 굉장히 근엄하게 말했다. 한 시름 놓은 듯한 그에게 카일이 다시 새색시처럼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황실과 차이엘드 은행 간의 일이 아닙니까. 그 은행의 소유자가 저이긴 하지만, 백성들도 차이엘드 은행과 차이엘드 공작의 차이는 알고 있을 겁니다.”
“……!”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변제일을 늦추도록 말해두겠습니다.”
지금 카일이 한 말은 그러니까……
‘너희는 내가 돈을 퍼준 줄 알겠지만 사실 그거 다 빚인 거 알지? 갚아.’
그래. 이거잖아.
황제와 가고일 백작의 얼굴이 동시에 파래지는 게 이해가 간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니 카일은 항상 서류를 작성한 뒤 차이엘드 은행을 통해 황궁에 돈을 빌려줬다는 것 같다.
기부금을 낸 적도 많았지만 여지껏 황실에서 펑펑 쓴 돈은 모두 대출이었다는 소리다.
‘목걸이 사건만 터지지 않았더라면 평생 갚으란 말을 안 했겠지.’
황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다. 공작은 어쨌건 황제의 아랫사람이니 이런 식으로 돌변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카일은 그 누구도 위에 둔 적이 없었다.
살길을 찾아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던 황제는 결국 악수를 두고야 말았다.
“공작. 내가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네만…… 마침 약혼녀를 데려왔으니 짚고 넘어가겠네. 자네의 약혼녀가 황가의 보물 중의 보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도난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는 건 들었나?”
“알고 있습니다. 가고일 백작이 친히 짚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큼, 큼. 그래.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원래대로라면 다이앤 영애는 철장 안에 있어야 할 걸세. 그 목걸이의 가치라면 나보다 공작이 더 잘 알겠지.”
“…….”
“차이엘드 은행에 진 빚에 대해 논하기 전에 목걸이 사건부터 짚고 넘어감이 옳다고 보네. 다이앤 영애, 어떻게 생각하나?”
황제는 이 일련의 사건들이 목걸이가 사라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정말 답이 없네. 내 의견을 물었으니 나는 말하기로 했다.
터트리기 딱 좋은 타이밍이지 않은가.
“폐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에는 아레테의 결정이 박혀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지. 그래서 아주 값비싸고.”
“그럼 혹…… 아레테의 결정에는 ‘수여’라는 특징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수여?”
대부분은 모르고 있을 거다. 아레테의 결정은, 아니, 아레테라는 능력 자체는 무척 귀하니까. 조사관들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황제는 어스름한 기억을 뒤지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분명 물건을 받은 사람은 물건을 준 사람의 허락이 없으면 빼지 못한다고 했어. 잠깐…….”
“폐하께서는 그레첼 영애에게 직접 목걸이를 걸어주셨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늘 하던 대로 가고일 백작에게 부탁했지.”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고일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밀랍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황제는 그제야 내가 하려던 말의 진의를 파악하고 가고일 백작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가고일 백작! 내가 그레첼 영애에게 직접 전달하라고 했던 목걸이는 자네가 잘 걸어줬겠지?”
“그, 그것이…… 바쁜 일이 있어 수하에게 맡겼는데…….”
“그래. 그 수하를 당장 잡아 와! 그놈이 범인일 테니!”
“그것이…… 도망을 갔습니다.”
“뭐라?”
“저도 아레테의 결정의 특성을 알아본 후로 최선을 다해 그자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국경 지역으로 도망갔다는 말 밖에는…….”
그 기어들어 가는 대답에 황제가 함께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웃는 것은 나와 카일뿐이었다.
이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분실 사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아니라 황실에 향했다.
그리고,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주체는 나를 협박했던 가고일 백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