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몰고 온 후폭풍이 지난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위중한 사안인 만큼 그간 많은 일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가고일 백작가의 처형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땐 예상보다 과감한 처사에 나와 카일도 당황했다.
황제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맡기리라고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형태가 처형일 줄은 몰랐다.
죄목은 황실의 보물인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반역죄.
‘반역이라니. 자기한테 제일 충성했던 사람인데.’
대한민국에 살았을 때, 사극에서 군주들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죄목으로 가장 애용하던 것이 반역죄로 기억한다. 이 세계관에서도 예외란 없었다.
사형 선고가 결정된 지 약 일주일 후, 황제가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이만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쫓겨나는 건데 제 발로 나가는 척을 한다며 사람들이 얼마나 욕을 하던지. 말을 아끼는 편인 차이엘드 공작저의 고용인들도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베르드가 즉위했지.’
처음엔 놀랐다. 여장이 취미인 장난기 많은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베르드는 카일에게 가짜 초대장을 보내 전쟁에 휩쓸려 죽기 때문에 그가 황제가 된 모습은 무척 어색했다.
참고로 대관식 날, 황제의 관을 쓴 베르들레반은 내가 살면서 봤던 군주들의 그림 중 가장 볼품없었다. 마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아빠 옷을 빌려 입은 듯했다.
‘이제 황제인 건가.’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황제와 내가 접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칼럼을 쓰느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금 황권은 무척 불안정하단다.
당연한 일이었다. 설사 황권이 안정된다고 해도 베르드는 아버지가 싸지른 똥을 치우느라 긴 시간을 보내리라.
게다가 베르드가 무사히 즉위하도록 아무런 압력도 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카일과 베르드 사이, 모종의 거래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마 둘이 화해하고 진짜 친구가 되……었을 리는 없지.’
대관식이 마무리될 무렵 나는 카일에게 새 황제의 즉위에 대한 소감을 물었었다. 카일은 내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대답했다.
“누나. 체스 게임을 해본 적 있으십니까?”
의미심장한 물음이었다. 예전에 컴퓨터로 해본 적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는데, 카일은 베르드를 힐끗 보다 말을 이었다.
“체스 말 중 가장 쓸모없는 폰을 유용하게 활용하려면 우선 등급이 높은 체스 말로 승급시켜야 합니다.”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폰은 상대방의 진영 끝까지 진입하면 높은 등급의 말로 변신이 가능했다.
어떤 의미에서 한 말인지는 대충 알아들었으나 구체적인 카일의 계획이 짐작 가지 않았다.
뭐, 그건 내가 신경 쓴다고 달라질 문제가 아니니 패스. 내가 체감하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후폭풍 중 으뜸은 하일 타임스와 관련된 일이었다.
하일 타임스는 내 폭로 덕에 하일 제국에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신문으로 등극했다. 연쇄 효과로 내가 쓰는 ‘앤 스미스’라는 필명은……
“앤. 자네는 천재야! 전설이라고! 자네가 하일 제국의 언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나? 익명의 폭로가 자네의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 프링글스 사장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전설이 되었다.
‘내 글을 그렇게 꼼꼼히 읽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누군가가 내 칼럼과 폭로문의 문체가 거의 똑같다는 것을 알아낸 게 시작이었다.
젠장. 글씨체를 들키지 않으려 타이핑까지 했건만.
칼럼으로 호평을 받고 있던 내가 폭로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부풀려졌고, 며칠이 지나자 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를 수호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언론인’이 되어 있었다.
‘칼럼 일은 당분간 자제해야겠어. 목걸이 사건에 대해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고 캐물으면 곤란하니까.’
곱씹어보니 목걸이 하나가 참으로 많은 변화를 일으켰구나 싶다.
아,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가고일 백작이 목걸이 운반을 맡겼던 요한이라는 사내는 켈트만과의 국경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사실 켈트만의 족장이 전쟁을 일으키려 목걸이를 일부러 빼낸 것일지도 모른다고 숙덕거리기도 했다.
‘잘 모르겠다. 황제가 알아서 하겠지.’
나는 이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와 완전히 관련 없는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원작에 언급도 없었던 엑스트라인 내게 너무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물론 가장 큰 변화는 눈앞에 있었지만.
“누나.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음…… 새삼 잘생겨서?”
원래대로라면 슬슬 파멸을 구상해야 할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얌전히 아침 식사나 하고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변화였다.
사랑과 평화가 최고라고 연신 세뇌한 탓인지 파멸은커녕 요즘 카일의 표정은 온화하기만 했다.
“카일.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우리 둘이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듭니다.”
“오늘 내내 같이 있을 거잖아요.”
카일은 보는 사람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후식으로 나온 딸기를 우물거리다 웃는 걸 보니 아이돌이 따로 없었다.
일 중독으로 보이던 카일은 베르드가 즉위한 뒤 뜬금없이 선언했다. 매주 토요일을 휴일로 보내겠노라고. 당시 읽었던 속마음을 아직도 뚜렷이 기억했다.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가 되는 법>에서 분명 일주일에 하루쯤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다고 했지.」
그렇다. 이 남자는 약혼으로 모자라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다. 차이엘드의 수장이기에 매주 휴일을 지키긴 어렵겠지만 시도의 목적은 분명 결혼이었다.
내가 지그시 바라보자 카일은 부담을 느꼈는지 볼을 엷게 붉히다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목걸이 사건으로 고생하신 보상을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을 움직이는 건 물질적 보상이니 오늘은 함께 상가에 다녀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
카일의 야심작, 아멜리아 호수에서 피크닉하는 것으로 오전을 보냈다. 카일은 피크닉 내내 ‘쇼핑’이라는 행위에 대해 기대감을 보였다.
“드디어 쇼핑…….”
마차에 오를 때도 그랬다. 이 남자는 상가에서 공룡이라도 판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카일. 상가 구경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왜 그래요.”
“처음입니다.”
“……네? 차이엘드는 돈 많잖아요. 어떻게 쇼핑을 안 해요?”
“원하는 물건은 항상 공작저에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사람을 불러 사들였고. 상가를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쩐지. 대형 마트에 처음 가는 강아지 같은 반응이더라니. 카일은 정말 소박한 데이트를 즐기고 싶었는지 신분을 감추기 위한 옷까지 갖춰 입었다.
‘얼굴이 신분증이라 이게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네.’
그가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카일이 전혀 효과가 없는 듯한 나름의 변장을 하는 이유는 공작이라는 지위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괴물 공작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괜한 걱정이었다. 줄곧 공작저에 머무르는 차이엘드 공작의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일반 상인들은 그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생긴 청년’을 보듯 카일을 바라봤다.
차이엘드라는 가문의 이름은 알지만 그 수장의 얼굴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카일은 옷을 바꿔 입고 쇼핑용 마차를 끌고 온 보람을 느끼며 주변을 둘러봤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싫어요. 카일이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제가 갖고 싶은 건 이 상가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미 공작저에 들어와서 살고 있고. 그러니 갖고 싶은 걸 고르십시오.”
카일은 뻔뻔하게 웃으며 내게 권했다. 그럼에도 내가 답하지 않자 자기가 알아서 여성복과 장신구 같은 것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부자는 쇼핑을 이렇게 하는구나…….’
알게 모르게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카일의 눈길이 5초 이상 머무른 물건들을 결제해 마차로 실어다 날랐다. 누가 보면 이삿짐을 꾸린다고 해도 믿을 양이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카일의 눈길을 받은 상점의 주인들은 자본이 주는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를 내비쳤다.
은연중에 자신을 ‘차이엘드 공작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묵인해준 사람’으로 여기는 카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환해 종교로 지정해 놓고 믿어도 될 만큼 아름다운 미소를 내비치며 카일이 작게 물었다.
“상가는 원래 이렇게 친절하고 행복한 곳입니까?”
“그야…….”
카일이 돈을 물 쓰듯이 쓰고 있잖아요. 상인들 입장에서는 일주일, 아니 한 달은 장사 안 해도 될 만큼 큰돈을 버는 건데 웃음 짓지 않을 리가.
하지만 나는 ‘상가=좋은 곳’이라는 카일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 그저 웃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망설임 없이 돈 펑펑 쓰는 건 늘 보던 일이니 그렇다 치고, 상가가 처음이라던 카일의 발걸음은 미리 정해둔 목적지가 있는 듯 거침없었다.
상가를 반쯤 돈 후에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나. 사람이 많으니 저 가게도 구경했으면 좋겠습니다.”
“저긴…….”
[빅토리아의 비밀]
제국 최고의 여성 속옷 가게 되시겠다. 카일은 내가 아레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슬쩍 떨어져 젊은 커플들이 복작거리는 ‘빅토리아의 비밀’을 향해 직진했다.
“카일. 무슨 생각 해요?”
“지금은 순전히 호기심뿐인데.”
“이리 와서 손잡아 봐요. 무슨 생각 하나 보게.”
“……아까 사 먹은 크레이프 크림이 묻어서 끈적거립니다.”
누가 혈기왕성한 연하 남주 아니랄까 봐, 목적에 충실한 것 좀 보게. 나는 모르는 척 카일을 신세계로 이끌었다.
***
그날 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말로 즐거운 하루였다.
처음 가본 상가의 사람들은 모두 웃으며 그를 맞아주었다. 그 이유가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가기 때문이라곤 짐작하지 못한 공작은 그저 상인들의 활기찬 웃음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게다가. 상가 방문의 목적을 이루었다. 하일 제국의 젊은 연인들이라면 꼭 가봐야 한다던 ‘빅토리아의 비밀’에 들르지 않았던가.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은 분홍색 커튼이 쳐진 가게에 전시된 야릇한 속옷들을 종류별로 두 개씩 모두 구입했다. 그것들은 일국의 옥새만큼이나 귀하게 운반되어 아멜리아의 드레스룸에 정리되었다.
먼저 씻은 카일은 침대에 얌전히 걸터앉아 드레스룸에 간 아멜리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진짜 입고 나오면 어떡하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걸 입고 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장난은 없고 진심과 흑심만 있었던 것 같지만.
“…….”
목이 탔다. 카일은 하일드를 불러 목을 축일 물을 가져오게 했다.
집사장이라는 직책 덕에 이 공작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훤히 꿰고 있는 하일드는 빈 물컵을 접시에 받아들며 운을 뗐다.
“공작 전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일전에 클레어로부터 하일드의 부인이 말도 없이 도망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난 후로, 카일은 하일드의 조언이라면 반신반의했다.
특히 연애나 사랑에 대한 조언은.
“일전에 들은바, 여성이 향수를 선물한다는 건 매혹적인 향기로 유혹해보라는 뜻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조언은 꽤나 마음에 들었다.
“누가 그럽니까?”
“다이앤 경께서 그리 말씀하셨지요.”
“……!”
출처마저도 마음에 든다. 카일은 하일드를 물리곤 일전에 아멜에게 선물 받은 향수를 꺼냈다. 고이 모셔두어 아직 뜯지도 못한 새것이었다.
‘유혹을 하라고?’
아주 잠시간 아멜리아가 제 유혹을 원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은근히 엉큼한 구석이 있는 약혼녀가 원하지 않을 리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카일은 한참이나 향수 병을 바라보다 단추를 툭툭 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아멜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침실에 들어섰다. 카일이 원하는 것을 요구할 땐 꽤 직설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럴 줄이야.
“제가 선물한 옷만 입고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드레스룸에 무수히 많이 걸린 야릇한 옷가지들을 보고 또 보다 겨우 하나를 골라 입었다. 가린 건지 드러낸 건지, 이럴 거면 왜 입는 건지 모를 디자인이었다.
‘후…….’
아멜은 걸친 샤워가운의 매듭을 다시 한번 단단히 여미며 침실에 들어섰다. 그런데.
“카일? 자요?”
밤만 되면 피가 끓어 눈이 초롱초롱해지던 파멸 남주는 넓은 등과 어깨를 드러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아멜은 은근히 억울한 마음이 들어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일이 잘 마무리된 기념을 하자던 내 약혼자는 어디 갔지? 카일…… 헙.”
아멜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를 싸그리 까먹은 채 별생각 없이 들췄던 카일의 이불을 다시 덮었다. 더워서 상의를 벗은 줄 알았는데 이 남자, 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일까.
‘나보다 더 드러내고 있잖아!’
당황과 흥분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카일이 살그미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가 야심으로 빛났다.
“저도 누나가 준 선물만 걸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준 선물이라면…… 향수?”
아멜은 고개를 숙여 카일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취향을 200% 반영해 고른 향수가 은은히 향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
그녀의 머리는 당황하고 있었지만 손은 빠르게 가운의 매듭을 뜯어버렸다. 몸을 가리고 있던 샤워가운이 아름답게 펄럭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멜은 치명적인 유혹을 선사하고 있는 카일의 이불도 침대 아래로 던져버리며 속삭였다.
“카일, 누나 믿지?”
“……저는 누나를 믿지만, 누나는 저를 믿지 마십시오.”
카일이 재빨리 불을 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