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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46화 (46/134)

#46

사위가 일순간에 어두컴컴해졌으나 아멜리아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겁을 먹지 않았다. 관능적인 향을 폴폴 풍기는 카일의 맨살이 닿아오는데 캄캄한 게 대수일까.

향수만 뿌리고 누워 있는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니.

슬쩍 이불 아래로 드러난 근육으로 단단히 다져진 몸은 누구라도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하물며 욕망에 충실한 편인 아멜리아가 치명적인 유혹을 해대는 카일을 사양할 리는 없었다.

“카일. 이런 앙큼하고 섹시한 유혹은 어느 책에서 읽은 거예요?”

그의 위를 점한 아멜이 관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카일은 자신의 어깨와 가슴팍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며 웃었다.

“책에서 읽은 건 아닙니다.”

“흐음, 그러면?”

카일은 제 옆얼굴을 덧그리듯 쓰다듬는 아멜의 손길을 느끼며 답했다.

“……누나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서.”

그의 대답은 그녀를 만족시키다 못해 묘한 흥분마저 일으켰다. 아멜은 어느덧 어둠에 적응한 눈이 비춰내는 카일의 모습을 구석구석 관찰했다.

흰 베개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과 그 아래에서 맹수처럼 빛나는 붉은 눈은 어둠에 덮였는데도 기묘한 광채를 발산했다.

석류알 같은 눈동자에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그를 매만지는 자신의 모습이 담겨서인지 사랑스러웠다.

상대는 갓난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한다는 차이엘드 공작이었다. 하지만 아멜은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을 좋아했다. 스스로도 주제넘은 일이라는 자조가 들었지만.

아멜은 그의 귓바퀴를 엄지와 검지로 살살 문지르다 기어이 그의 입술을 작게 베어 물며 웅얼거렸다.

“카일은 내려다보는 게 훨씬 예뻐요.”

“……그렇습니까.”

카일은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 겨우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누나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게 제일 관능적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한 사족처럼 느껴질까 봐 내뱉지 못했다.

아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까 봐 말을 아낀다는 편이 더 정확했다.

우유를 탄 커피처럼 부드럽고 우아한 갈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흐르고, 그 탐스러운 굴곡마다 달빛이 고이는 모습은 꼭 모든 빛이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드는지 무르익은 붉은 입술과 입꼬리, 움푹 팬 보조개가 뇌쇄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정신을 놓게 하는 동시에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아멜리아의 녹갈색 눈동자는 그가 겪어온 스물세 번의 가을을 압축해놓은 듯 생기 있게 빛났다.

그런 눈동자에 오로지 자신만을 담은 채로 언제 입을 맞출까 빙긋빙긋 고민하는 아멜리아를 마음껏 볼 수 있다면 어떤 불편도, 수치나 고통도 감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멜리아는 처음으로 자신을 품에 안아준 사람이었고, 그 순간 카일은 그녀의 몸에서 옮아오던 온기가 자신이 느낄 처음이자 마지막 온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멜이 몸을 숙여 먼저 거리를 좁힐 때마다 카일의 온 감각들은 그녀가 구원처럼 선사한 하룻밤을 떠올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저릿해지는 기억이 제게도 생길 줄은 몰랐다. 그런 기억의 상대가 다름 아닌 아멜리아여서 눈을 맞출 때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

아멜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눈을 감고 거리를 좁혔다. 조심스레 카일의 숨을 한 입,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충만한 행복에 차 있는 그의 마음이 들려왔다.

처음엔 낯간지러웠지만 어쨌든 아멜도 사람인지라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나 생각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녀의 기분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쪽,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들이 그의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질 때면 그녀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카일은 정성스레 자신을 자극하는 그녀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녀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빗어 내릴 때마다 흰 이불 위로 공작의 꼬리깃처럼 우아하게 퍼질 아멜의 머리카락이 보고 싶었다.

금세 자세를 바꾸려는 그를 아멜이 저지했다.

“싫어요. 먼저 작정하고 유혹한 건 카일이잖아요?”

아멜은 체중을 실어 그를 누른 뒤 다시금 자잘한 입맞춤을 이어갔다. 카일은 그 관능적인 위협에 반기를 드는 것을 포기하곤 눈을 감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엎치락뒤치락하게 될 것이고 오늘은 시간이 많은 편이었다. 이 밤이 금방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카일은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

아멜과 카일이 서로를 찬찬히 매혹하고 음미하는 동안 옆방에서는 씁쓰름한 커피 향이 진동하고 있었다.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멜의 경호원, 바네사였다.

‘대체 지금이 몇 시야? 신기록이네, 신기록.’

그녀는 세상만사에 달관한 고승의 그것보다 더 초연한 눈을 하고 시계와 방의 한쪽 벽을 번갈아 바라본 뒤 다시 커피를 마셨다.

바네사는 지금 잘 수 없었다. 그녀는 야근을 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야근이란 그녀의 평소 업무인 ‘아멜리아 다이앤 경호’를 야간 시간에도 하는 것이었는데, 의뢰인은 클레어 차이엘드였다.

얼마 전, 포크로 벌레를 명중시킨 일이 감명 깊었는지 클레어는 따로 바네사를 별궁으로 불러들였다.

차이엘드 공작에게 받는 보수의 두 배를 제안하며 그녀가 시킨 일은 바로 밤부터 새벽까지의 시간 동안 다이앤 영애를 경호하라는 것이었다.

‘하여간. 차이엘드 놈들은 다이앤 영애한테 미쳤어.’

아멜만 모르는 사실 하나.

차이엘드의 하녀들이나 요리사들, 마부나 정원사들, 심지어 마구간의 말과 아멜리아 호수의 오리들까지도 아멜리아 다이앤을 귀애했다.

차이엘드 공작이나 클레어는 아끼고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반쯤 미쳐 있는 수준이었다.

냉기가 뚝뚝 넘치는 클레어가 친히 심야 경호를 의뢰했을 때, 바네사는 흔쾌히 수락했다. 다다익선. 돈은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게다가 바네사는 밤잠이 무척 없는 편이었다. 오랜 용병 생활로 하루에 두어 시간만 자도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다이앤 영애 심야 경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네사의 체력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제발 잠 좀 자라! 제발!’

카일과 아멜이 그렇고 그런 이유로 잠을 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거의 매일.

물론 둘은 공작저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 큰 소음은 최대한 자제했으나 아레티스트의 특급 용병이었던 바네사는 창문에 깃털이 스치는 소리도 포착해내는 어마어마한 청력의 소유자였다.

바네사는 까드득 손톱을 물어뜯으며 벽을 노려보았다. 귀를 막았지만 그녀의 탁월한 집중력은 카일의 거친 호흡이나 아멜의 새된 목소리를 여실히 잡아냈다.

‘젠장. 차이엘드 공작…… 제발 다이앤 영애 좀 놔 줘라. 아까가 마지막이랬으면서 왜 끝내지를 않니…….’

본의 아니게 둘의 사생활을 엿듣게 된 가련한 바네사는 여러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차이엘드 공작이 전혀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작은 아멜리아가 했다고 한들 마지막에 보채고 살살 꼬드기는 건 언제나 차이엘드 공작이었다. 바네사는 혈기왕성한 연하남은 절대 만나지 않겠노라고 재차 다짐했다.

‘내일 다이앤 영애한테 맛있는 걸 좀 챙겨줘야겠어. 이러다 사람 잡겠다.’

바네사는 심각한 얼굴로 이러다 아멜리아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복상사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닐 테니까.

그러자 곱상한 미간에 작게 주름이 졌다. 이러다 정말 아멜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제 처신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네사는 차이엘드 소속의 고용인이 된 것이 무척 만족스러웠다. 숙식도 제공해주는 데다 돈지랄을 미덕으로 여기는 가풍 덕인지 예상대로 보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아멜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기우였다. 아멜은 다른 귀족 영애들처럼 권위적이거나 딱딱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음담패설과 마님, 마님 하는 능구렁이 같은 말투로 그녀를 놀리는 건 항상 바네사였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바네사 또한 다른 차이엘드의 고용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느샌가 인간적이고 상냥한 다이앤 영애에게 매료되었다.

결론은 열정을 위해서라면 돈 정도는 포기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레티스트 소속일 때와 삶의 질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바네사는 최대한 가늘고 길게 아멜의 경호원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멜이 고용주인 차이엘드 공작과 결혼해 오래오래 살아줘야 하는데…….

“누나. 피곤합니까?”

“카일…… 어차피 피곤하다고 말해도 안 들을 거면서, 왜 물어봐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

옆방에 계신 누구누구 씨가 경호할 사람을 잡게 생겼으니 바네사로서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차이엘드 공작, 제발 우리 마님을 놔 줘……!’

바네사는 거의 기도하듯 뇌까리며 창가로 향했다. 시커먼 구렁이를 백 마리 정도 삼킨 듯한 차이엘드 공작이 어떤 감언이설로 다이앤 영애를 꼬드길지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바네사는 잠시 후, 예상치 못한 침입자를 발견하곤 눈을 예리하게 번뜩였다.

‘……저것들이 여긴 왜?’

아무래도 잠시 확인해보고 와야 할 듯했다. 바네사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

흰 이불을 돌돌 두른 아멜은 카일의 가슴팍을 베고 눈을 감고 있었다.

힘이 쭉 빠져나가 몸이 나른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는 카일의 손길에는 지친 기색이라곤 없었다.

‘……역시 로맨스 소설 남자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어.’

오늘 밤에도 다시금 깨달음을 얻는 그녀였다. 아무리 욕망에 충실하게 군다고 한들, 그녀가 남주의 덕목을 갖춘 남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멜은 제 얼굴과 귓가를 지분대던 카일의 손을 잡아 깍지낀 다음 말했다.

“카일. 물 마시고 싶은데 사람 좀 불러줄래요?”

카일은 녹녹하게 젖은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멜의 부탁대로 사람을 불러줄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간 다른 사람이 무방비 상태의 약혼녀를 보게 될 테니.

‘절대 안 돼.’

그런 일이 발생했다간 목격자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제가 다녀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 누나.”

달콤하게 속삭인 카일이 자리를 비웠다. 아멜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흰 원피스 잠옷을 주워 입었다.

“…….”

수상쩍은 시선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돈 없이 구차하게 살아온 나날들과 아멜리아의 기민한 몸 덕에 눈치라는 것이 고도로 발달한 아멜이었다.

그녀는 침을 삼키곤 집요하게 자신을 쫓는 시선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파악했다.

‘창문 쪽인데. 남자인가? 침입자?’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이 아니니 수상한 인물인 건 확실했고, 가주(家主)인 카일의 방 근처에는 암살자들이 타고 오를 것을 대비해 높은 나무나 조형물을 두지 않으니 자력으로 창문까지 올라왔을 침입자는 꽤 실력이 있는 듯했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

비명을 지르면 차이엘드의 사람들이 와주겠지만 침입자가 자신을 해치는 게 더 빠를 수 있었다.

아멜은 눈동자를 굴리다 장식용 검으로 손을 뻗었다.

달칵-

그녀가 칼자루를 단단히 쥐자마자 창문이 열렸고, 침입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기분 나쁜 피 냄새가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퍼졌다.

“……!”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멜은 당황했다. 침입자는 이미 부상을 입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게다가 아멜은 그의 얼굴을 알았다. 정확히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젠장. 망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짙은 남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계 팔과 음침한 눈빛. 단검을 사용하는 공격방식까지.

‘언젠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악역님께서 등장하다니.’

눈앞의 음침한 남자는 아무리 봐도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끈질긴 악역이자 주요 등장인물, 마라바스 라이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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