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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47화 (47/134)

#47

마라바스가 숨죽인 걸음으로 거리를 좁히곤 아멜의 앞에 섰다. 팔뚝 정도 길이의 단도가 칼집에서 빠져나와 공중을 사선으로 갈랐다.

카강-!

아멜은 그의 검을 막아냈다. 칼과 칼이 맞닿자 조금 놀란 듯한 그의 머릿속이 훤히 보였고, 그녀는 그 틈을 파고들기로 했다.

“마라바스 라이델.”

“……!”

대치 속에서 여유를 찾아가는 그녀와 달리 침입자, 마라바스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치부를 내준 기분이었다.

바네사가 아레티스트를 버리고 선택한 여자라기에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지만, 차이엘드의 피앙세는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몽롱하던 녹갈색 눈동자가 침입자를,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살기로 빛났다. 마치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마라바스 라이델. 언젠가 내게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무례한 방법일 줄은 몰랐는데.”

“……나를 어떻게 알지?”

아멜은 당황이 서린 마라바스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책에서 읽었다고 해도 안 믿을 거면서.

“내가 그것까지 말해줘야 하나? 트라이하 제국의 로열 알케미스트가 내겐 무슨 일이지?”

“…….”

“아, 지금은 아레티스트의 용병이었지. 당한 꼴을 보아하니 바네사는 이미 만난 것 같은데.”

아멜리아에게는 마라바스의 속이 훤히 보였다.

「젠장. 이 여자는 뭐지? 어떻게 그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야?」

그는 자신의 정체를 일개 영애가 알고 있다는 데에 무척 당황했다가, 검을 뽑아 들었다.

쨍그랑-!

아멜은 실수인 척 협탁에 있던 유리병을 바닥으로 떨어트려 깨트린 뒤 그의 검을 주시했다.

훈련받은 성인 남자에 비해 힘이 부족하긴 하겠지만 속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치명상은 막을 수 있으리라.

유리 깨지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와주길 바라며 그녀가 검을 다잡을 때였다.

“……!”

마라바스의 눈동자가 그녀의 왼손으로 향했다. 그는 단번에 약혼반지에 박힌 것이 아레테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등줄기에 짜릿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예상치 못한 수확. 마라바스는 눈앞의 여자를 다시 한 번 훑어봤다.

검을 잡은 자세에 놀랍도록 흐트러짐이 없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데다 그 정보를 활용해 상대의 머릿속을 교란시킬 줄도 알았다.

깨끗한 백자에 장미꽃잎을 띄운 듯한 입술과 부드러운 피부, 달콤한 체향을 가진 눈앞의 여인은 군침을 돌게 했다. 그의 생애에 두 번째로 일어난 식욕이었다.

“영애의 이름은 뭐지?”

“침입자에게 이름을 알려줄 필요는 없지.”

아멜리아는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들거나 기 싸움에서 지는 것은 곧 급습의 허락이라는 것을 알았다.

악역에게 힘겨루기로 밀릴지언정 기세로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멜은 기사라도 된 듯 자신만만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마라바스는 무심결에 아멜의 굴곡진 머리카락을 시선으로 따라 그리며 물었다.

“……영애의 이름. 이름을 알려주면 오늘은 이만 물러나겠다.”

그는 여전히 아멜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멜은 여유로운 얼굴 위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말했다.

“내가 왜 침입자에게 이름을 알려줘야 하지?”

자신이 거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기라도 한 듯 마라바스는 나긋하게 움직이는 아멜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분 나쁜 두통과 함께 심박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상한 기분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휘두를 즈음.

벌컥-!

“누나 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누나 님, 괜찮으십니까!”

우렁찬 외침과 함께 차이엘드의 경호원들과 기사들이 우르르 방에 들어왔다. 아멜의 의도대로 그들은 유리병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온 것이었다.

“아멜!”

물론 가장 앞서 달려온 것은 카일이었다. 그는 초조한 눈으로 아멜의 상태를 살피곤 손끝을 움직여 그녀에게 방어의 아레테를 입혔다.

마라바스는 그 아레테의 흐름을 읽어냈다.

‘차이엘드 공작의 아레테는 방어.’

즉, 물리적 공격으로 이 여자의 목숨을 앗아가기란 불가능해진 셈이었다. 상황이 성가셔졌다.

“침입자. 당장 내 약혼녀의 곁에서 물러나라.”

“차이엘드 공작. 그 이상 다가온다면 네 약혼녀를 데리고 같이 뛰어내리겠다. 방어의 아레테라고 해도 납치는 가능하지.”

“…….”

성격대로라면 당장 남자를 찢어발기라고 명했을 카일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아멜과 침입자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카일이 살기 어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볼 때였다.

파바밧-!

창문 쪽에서 작은 쇠붙이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연달아 박혔다. 제법 두꺼운 독침 여러 개였다.

“개자식…… 경호원으로 살겠다는 게 죄야? 네가 나를 베?”

분노에 찬 목소리가 뒤따랐다. 마라바스의 몸에 독침을 박아넣은 것은 창문으로 기어 올라온 바네사였다. 그녀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놀란 아멜은 코앞의 마라바스와 그녀를 연달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랐다.

“바네사!”

“다이앤 영애. 얼른 차이엘드 공작 쪽으로 가요.”

“알았어요.”

바네사가 던진 것은 강력한 마비 독이 발린 침이었다. 수 초 동안은 옴짝달싹도 못 할 만큼 강력한 독이었지만 지속시간이 무척 짧았다.

순식간에 독에 당한 마라바스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마지막 힘을 짜내 바네사의 몸을 밀치고 창문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부상 상태라고 해도 바네사는 아레티스트 중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차이엘드 공작 무리들이 때마침 찾아와 불리했다.

이길 수 없으니 이대로 창밖으로 도주해 일단 물러날 속셈이었다.

“저 개자식이!”

휙-!

바네사는 순식간에 창문으로 몸을 던지는 마라바스를 향해 욕지기를 내뱉다, 단검을 그의 어깨를 향해 내리꽂았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단검이 그의 몸 어딘가를 깊게 찔렀으나 마라바스는 연금술로 만든 묘약을 동원해 사위에서 사라졌다.

바네사로서는 분해 죽을 것 같았다. 이번 일은 사정이 조금 복잡했고, 무엇보다 동료라고 생각했던 마라바스가 자신을 찔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주의를 일부러 다른 곳으로 돌린 다음 그 틈에 공작저의 중심부까지 쳐들어올 줄이야. 깜빡 잘못했다간 큰일이 날 뻔했다.

‘어떻게 얻은 경호원 자린데 그 새끼 때문에 잘리게 생겼네. 썅!’

바네사는 일단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옆구리가 찢어진 것쯤이야 특급 용병인 그녀에겐 별일 아니었다.

그런 그녀가 경호 대상, 아멜리아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망연자실한 탄식을 흘렸다.

“저, 저 침입자 놈이…… 어느 틈에 다이앤 영애를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거죠?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잖아요!”

아멜리아가 다친 것에 분개하면 카일의 공감을 사 퇴직금이라도 받을 수 있으리라. 물론 정말 아멜의 몸에 울긋불긋한 자국들이 만발했기 때문에 놀라 소리친 것도 있었다.

바네사는 아멜이 떨어트린 검을 쥐며 한 번 더 위협적인 목소리를 냈다.

“우리 마님을 이렇게 망가뜨린 저 침입자 새끼를 지금이라도 쫓아가서 확 그냥……!”

아멜은 깜짝 놀라 제 몸을 이불로 감싸며 말했다.

“바, 바네사! 치료부터 받고 쉬는 건 어떨까요? 많이 다쳤잖아요.”

“제가 어떻게 쉬겠어요? 그 개자식이 우리 마님 몸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데!”

잠시 후, 카일이 멋쩍게 말했다.

“……바네사. 그건 제가 한 짓입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은 무언의 명이라도 받은 듯 일제히 아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바닥만을 쳐다봤으며 바네사 또한 민망함에 헛기침만 해댔다.

정작 괴롭힘의 장본인으로 판명된 카일은 곧장 아멜에게 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만 빼면 멀쩡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침입자 건을 처리할 때였다.

“하일드. 당장 추격대를 꾸려 침입자를 추격하십시오. 그놈에 대한 모든 정보를 내일 아침까지 보고해야 할 겁니다.”

“예, 전하.”

“바네사. 침입자와 구면인 것 같던데. 잠깐 따로 얘기 좀 하지.”

카일의 눈동자는 싸늘했다. 바네사는 꿀 같던 차이엘에서의 경호원 생활이 비로소 종료될 것을 직감했다. 뭐, 지금 상황이라면 할 말이 없긴 했다.

‘마라바스가 날 찾아서 여기까지 왔다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반쯤 포기한 바네사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즈음, 줄곧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아멜이 이마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카일…… 미안한데 그건 나중에 하고 지금은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나른하고 어딘가 힘없는 목소리에 카일은 물론 공작저의 고용인들마저 분노를 삼켰다. 죽여 마땅한 침입자 때문에 누나 님이 이렇게 놀라셨다니!

“혼자 쉬기엔 조금 무서워서…… 같이 있어 주세요. 응?”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카일은 아끼던 무언가를 잃은 얼굴을 하고 쪼르르 아멜에게 다가갔다.

누나가 지금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물론 당장 마라바스인지 뭔지 하는 놈을 족치고 싶었지만 그 일을 대신해줄 고용인들은 많고도 많았다.

“하일드. 일을 부탁합니다.”

카일은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명을 전한 채 아멜의 몸에 이불을 둘러주었다.

“바네사도 치료해주시겠어요? 우선 푹 쉬게 해주세요.”

아멜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만들어 보이며 부탁했다.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이미 차이엘드의 모두는 그녀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을 모르는 듯했다.

비상사태가 종료되었기에 고용인들은 재빨리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주변 경비가 몇 배는 더 강화된 가운데, 아멜과 카일은 다시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카일은 아무 말 없이 아멜을 꼭 껴안고 뒷머리를 쓸어주었다. 마라바스에게 습격당한 것은 아멜이었으나 더 철렁한 것은 그였다.

1층에도, 로비에도 침입자가 풀어둔 잔챙이들이 있어 침실에 바로 올라오지 못했다. 몇 분 동안 느낀 약혼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가 생전 느꼈던 어떤 감정보다 거대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괴물 공작이라는 평가와 달리, 자신이 이런 감정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에는 감사했다.

하지만 아멜리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더 느끼긴 싫었다.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하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자신이 싫었다.

“……죄송합니다, 누나.”

“카일이 뭐가 미안해요. 달려와 줘서 고맙기만 한걸요?”

“…….”

“오늘은 일단 자고 내일 생각해요. 졸릴 텐데.”

아멜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인 다음 눈을 감았다. 카일의 걱정과 달리 그녀는 패닉 상태에 빠져 있기는커녕 오히려 부지런히 마라바스의 수를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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