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마라바스 라이델. 소설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의 악역.
그는 원래 바다 건너 대륙을 통일한 트라이하 제국의 황실 소속 연금술사였다.
어린 나이에 연금술, 주술을 비롯한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과 기계장치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한 황제가 로열 알케미스트로 만들었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마라바스는 자신의 머리와 재능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킨 다음 세계제국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다지지만, 그 청사진이 반역으로 간주되어 제국에서 추방당한다.
그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아레티스트라는 용병 집단에 들인 것이 바로 여주인공이었던 바네사 메이브란테였다.
‘이상해. 소설에서 분명 마라바스는 바네사를 짝사랑했어. 자길 거둬준 여자니까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마라바스는 아레테라는 초월적인 힘을 가진 자들이 세계의 정점에 서서 우매한 인간들을 다스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아레티스트의 멤버가 된 이후부터 마라바스는 아레테에 대한 연구에 치중, 놀라울 만한 이론적 토대를 다진다.
바네사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통해 얻은 아레테를 손쉽게 사용하도록 길을 제시해준 것이 바로 마라바스라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그렇게 최강이 된 바네사가 파멸한 대부호, 카일과 사랑에 빠져버리자 마라바스가 선택한 길은……
‘전형적인 악역의 마인드였지. 내 것이 되지 못할 바에야 아무도 갖지 못하게 만들겠어, 하는.’
나는 소설 속 마라바스의 행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바네사에게는 아레테를 이용해 자신과 함께 세계의 정점에 서자고 꼬드기는 한편, 카일의 세력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주의해야 하는 인물이야. 마라바스는 똑똑해. 연금술인지 마법인지 하는 것들에도 능하고.’
이 세계관의 학문은 모두 섭렵한 그였다. 아레테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와 척을 졌다면 최선을 다해 공격하고 방어해야 마땅하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티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은근히 내 눈치를 보고 있는 바네사에게 물었다.
“바네사. 사실대로 말해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음, 그게…….”
“아. 손 이리 줘요. 거짓말 하나 안 하나 알아야 하니까.”
바네사는 슬쩍 눈동자를 피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위로 내 손가락을 얹곤 진맥을 하듯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봤다.
바네사는 먼저 야간 경호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창밖에 보이는 건 마라바스의 인형들이었어요. 단번에 알아봤죠.”
나는 되묻지 않았다. 마라바스가 시체를 연결해 마치 산 사람처럼 움직이게 하는 연금술 영약과 주술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탄생한 피조물들을 인형이라고 불렀다.
‘연금술사라고 해서 돌로 금이나 만드는 줄 알았는데 거의 마법사에 가까운 일을 했었지.’
내가 당연히 받아들이자 바네사는 얼굴을 갸웃했다.
“마님.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마라바스를 아세요?”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어요. 총기사단장이셨잖아요.”
가벼운 거짓말로 넘길 수 있는 질문이었다. 바네사는 계속 설명을 이었다.
“아무튼. 마라바스의 인형들은 신체 일부가 기계로 개조되어서 보통 사람들은 상대하기 힘들어요. 열 마리도 넘게 왔길래 놀라서 달려나갔죠.”
바네사는 그 후 한참 동안 자신이 얼마나 멋들어지고 완벽하게 그들을 제압했는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그것들을 다 쓸어버리자 마라바스가 등장했어요. 제가 인형들을 공격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죠.”
“바네사는 마라바스의 인형들을 구분할 줄 알아요?”
“당연히 알면서도 팬 거죠. 저는 차이엘드에 고용된 상태니까. 아무튼, 마라바스는 제가 원하는 보석을 자기가 구했으니 함께 아레티스트로 돌아가 세계제국을 세우자고 권했어요.”
“잠깐. 바네사가 원하는 보석이라면…….”
바네사는 누가 들을까 주변을 살피며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맞아요’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가고일 백작의 수하가 훔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누군가가 가로챘으리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마라바스일 줄이야. 상황이 골치 아파졌다.
“그래서 바네사는 뭐라고 대답했어요?”
“그런 건 이제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죠. 이미 입금받았잖아요?”
차이엘드의 두둑한 보수에 취한 바네사의 결정은 빨랐다.
그 뒷이야기는 간단했다. 마라바스는 공들여 구한 목걸이를 거부하며 자신의 뜻에 동조해주지 않는 바네사를 공격했다. 바네사에게는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이후 바네사의 옆구리를 베어버린 마라바스는 그녀를 고용한 고용주, 즉 카일을 찾아 가주의 공간에 침범했지만 그곳에 있던 건 나뿐이었다.
‘하긴. 마라바스는 원작에서도 바네사 자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자기를 구해준 바네사의 힘과 차후 얻은 강력한 아레테를 사랑한 것에 가까웠지.’
사람 마음이 변하는 건 쉽다. 마라바스처럼 짝사랑이었을 경우에는 더더욱.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더 말할 것이 없으면 이만 돌아가 쉬라고 말하려는 찰나 바네사가 먼저 입을 뗐다.
“다이앤 영애. 죄송해요. 마라바스는 저를 찾아 차이엘드 공작저에 침입한 거고, 결국 영애가 다칠뻔했잖아요. 저 때문이죠. 해고든 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나는 침울하게 말하는 바네사를 빤히 바라봤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습격을 당한 데에는 일정 부분 그녀의 책임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주인을 다치게 한 고용인은 해고하고 벌을 주는 게 맞지만.’
바네사는 마라바스와 완전히 척을 졌다. 게다가 마라바스는 어젯밤 나를 보고 침을 삼켰다. 이름을 알려주면 물러나겠다는 뜬금없는 요구까지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어제 마라바스는 분명 아레테의 결정이 박힌 내 반지를 봤어. 내가 아레테 보유자라는 건 금방 알아채겠지.’
혹시 모를 신변의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
“바네사.”
“……네.”
“나는 바네사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해요. 언젠간 경호원으로 살기엔 아까운 실력이 되겠죠. 지금도 그렇지만.”
바네사는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전장의 천사라고 불리던 바네사의 진가를.
“어차피 마라바스와 사이가 틀어져서 갈 곳도 없잖아요? 뻔뻔한 것이야 바네사 특기고.”
“다이앤 영애……”
“바네사가 괜찮다면 내 경호 일을 더 해줬으면 좋겠어요.”
톡 쏘아붙이듯 말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바네사의 푸른 눈동자에는 이미 눈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영애. 저는…….”
“어차피 돌아갈 곳이 없을 테니 내 곁으로 돌아오라는 말이에요. 카일에게는 제가 말해둘게요. 뭐, 카일이 바네사를 정 자르고 싶어 한다면 바네사의 월급이 확 줄겠지만…… 나도 나름 월급이란 걸 줄 수 있을 만큼은 번다고요.”
최저임금이긴 하겠지만. 그 말을 했다간 바네사가 옳다구나 하고 도망갈까 봐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바네사는 입술을 맞물고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전노처럼 굴던 사람이 월급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구는 게 신기해 잠깐 바라보다 관뒀다.
“여기 있는 쿠키랑 케이크 다 먹고 나와요. 전 이만 카일에게 가볼게요. 울지 말고.”
나는 바네사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누나 님. 공작 전하께서는 집무실에 계시다고 합니다.”
“고마워요.”
내 전담 하녀는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길을 안내했다. 바네사 일을 곧바로 카일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바네사와 견원지간인 카일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한다면 나름의 강수를 두는 수밖에 없었다.
‘바네사가 울 줄이야.’
항상 돈에 쪼들리긴 했지만 책 밖의 삶에서도, 책에 빙의한 지금도 내겐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었다.
거처를 옮겨 가며 생활하는 용병단에 임시로 소속되어 있다가 그 소속마저 잃게 된 바네사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기만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용병이고 경호고 다 떠나서 바네사가 내 친구로 오래 곁에 남아주길 바랐지만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차차 그런 사이가 되면 좋겠지.’
입매가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표정 관리에 집중하기를 잠시, 앞서 걷던 하녀가 우뚝 멈춰서더니 황급히 옆으로 물러나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멜…… 괜찮니?”
내가 졸라 마련하는 아침식사 자리가 아니면 본궁에서 보기 힘든 클레어였다. 그런데 얼굴색이 좋지 않았다.
“언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색이 좋지 않은데…… 잠을 설치셨나요?”
클레어는 울컥한 것인지 순간 미간을 팍 찌푸렸다가 한숨을 쉬었다.
“네 방에 암살자가 들었다며. 몸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놨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니?”
“…….”
아무래도 고용인들의 입을 타고 옮겨진 소문이 조금 와전된 것 같다.
마라바스는 내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지만 그를 변호할 생각은 없었다.
“괜찮아요. 아, 언니가 바네사에게 야간 경호를 부탁하셨다면서요? 덕분에 살았어요. 위험한 순간에 바네사가 구해줬거든요.”
활짝 웃으며 감사를 표하자 클레어는 멋쩍은 듯 시선을 피하면서도 뿌듯함을 내비쳤다. 최애가 뿌듯해하니 내 웃음이 더 환해졌음은 당연했다.
“우리 아멜. 그런 걸로 일일이 감사하지 않아도 돼. 당연한 일이잖아. 왜냐면 난 네 하나뿐인 시누…… 이가 아니라 언니잖니?”
아무래도 시누이라는 단어는 좀 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쨌든 클레어의 배려가 고마웠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카일은 집무실에 있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집사가 내가 왔음을 알렸다. 나는 곧장 열리는 집무실로 발을 들이밀었다가 주춤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보고를 받는 카일의 얼굴이 심각했다. 나를 보고 부드러운 얼굴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게 분명했다.
“다과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바쁜 것 같은데.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왔어요.”
카일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책상에 걸터앉은 그와 거리를 좁혀 살갗을 스치니 속마음이 들려왔다.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예쁘게 찾아오시다니. 드디어…… 날짜를 잡는 건가.」
「귀족 간의 결혼은 황제에게 먼저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지.」
「베르드가 승인을 안 하면 어떡하지?」
「……마땅한 차기 황제를 찾아놔야겠군.」
깔끔하게 결론 내린 파멸 남주가 나를 향해 상큼하게 웃었다. 아쉽게도 내가 하려던 말은 카일의 상상과 조금도 관계가 없었지만.
“카일. 바네사 건으로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혹시 바네사를 해고하거나 벌할 생각이라면 의견을 바꿔줄 수 있을까요?”
“……그 말을 전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나는 그럼 다른 게 뭐가 있냐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카일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그녀를 해고하거나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드리면 제게 뭘 주실 겁니까.”
일에는 냉정한 대부호 차이엘드 공작이 언제부터 거래를 이렇게 흐물흐물한 태도로 제안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음…… 위대하신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원하는 게 뭘까요?”
“그리 어려운 건 아닙니다.”
카일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혼인신고서에 서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신부수업이 까다로울 수도 있으니 잠시 동안이라도 고명한 부인을 가정교사로 들이는 게 좋겠군.」
「이번 주 내내 날씨가 괜찮다고 했으니 내일 청첩장 돌리고 모레쯤 식을 올리면 딱일 텐데.」
나는 카일의 품에 기댄 채 그의 고민들을 염탐했다. 답지 않게 시시각각 얼굴색이 달라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에게 가업을 어떻게 물려줘야 할지 골몰하던 카일이 멈칫했다.
「……잠깐. 누나는 닿으면 속마음이 들리는 아레테가 있잖아.」
카일은 내게 놀아났다고 생각하는지 도끼눈을 한 채 나를 바라봤다.
“이미 제가 뭘 원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카일이 원하는 건…… 역시 나인가? 절 원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