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그 소원을 이제 슬슬 이루자’고 말하려던 카일은 내 뻔뻔한 대답에 얼굴을 화르륵 붉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을 반응이었다.
내가 내숭을 떨며 살살 말을 돌렸다면 카일이 살그미 결혼 얘기를 꺼냈으리라.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가니 할 말을 잃은 게 분명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연공을 퍼부었다.
“왜 카일 입으로 말 안 해요? 원하는 게 나라고.”
“…….”
“제가 아닐 리는 없는 것 같은데. 음, 나쁜 생각을 하느라 말을 못 하나? 절 어떻게 하려고요. 응?”
못된 손길로 촉촉한 입술을 지분거리며 눈웃음까지 치니 카일은 기댄 몸을 급히 일으키고 마음을 읽지 못하도록 나와 거리를 벌렸다.
“……슬슬 가고일 백작의 처형식을 보러 가야겠습니다. 황제 폐하와 나눌 이야기도 있고.”
재미있어서 더 놀리고 싶었지만 급한 일이 있다는 사람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가고일 백작의 처형식이라면 꽤나 잔인할 테니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나는 바네사 건을 둥글게 처리해달라고 거듭 부탁하곤 순순히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
카일은 아멜에게 당장 수도로 출발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가고일 백작의 처형식까지는 꽤 시간이 있었다.
처형식에 조금 늦는다고 해도 가고일 백작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은 볼 수 있을 예정이었다.
그의 목을 칠 망나니의 검날을 무척 무디게 만들어두라고 명했으니 단칼에 죽는 행운은 누리지 못하리라.
시간 낭비라면 치를 떠는 차이엘드 공작은 약 삼십 분을 짜릿하게 사랑스럽고 유혹적이었던 아멜을 곱씹는 데에 보냈다.
모르는 척 내숭을 떨었어도 귀여웠을 테지만 누나는 자신의 매력이 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보조개가 쏙 패도록 능글능글 웃으며 유혹을 해대면 참기 많이 힘들었다.
“하일드. 그 여자를 데려오도록.”
카일은 처형식에 출발하기 전 누나의 부탁을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본래 차이엘드의 가주들은 사람을 쓰는 데 무척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했다.
돈도 권력도 결국은 사람에게 달린 일인지라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면 가문의 부와 명예를 수호해야 할 차이엘드의 고용인으로 실격이었다.
하지만 카일은 아멜리아 다이앤 한정으로 무척 너그러운 관용을 지닌 남자였다.
제 기준으로는 해고가 마땅한 경호상 실수를 하긴 했지만 미래의 차이엘드 공작 부인이 그 고용인을 계속 쓰고 싶다면 그녀의 뜻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자신의 곁을 지킬 고용인을 고르고 해고하는 것은 차이엘드 공작 부인이 될 그녀가 누릴 당연한 특권이니까.
끼익-
“공작 전하께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온 마음에 안 드는 여자, 바네사 메이브란테를 바라봤다. 옆구리에 입은 부상은 주치의에게 시간이 나면 봐주라고 할 참이었다. 시간이 안 난다면 어쩔 수 없고.
아직도 이 여자의 낯짝을 보면 뭉텅이로 잘려나간 약혼녀의 머리카락이 생각나 부아가 치밀었다.
바네사는 점점 굳어가는 카일의 얼굴을 보며 올 것이 왔구나, 했다.
‘하긴. 어떤 고용주가 침입자가 목에 칼을 들이밀도록 내버려 둔 경호원을 자르지 않겠어.’
한숨을 삼키며 초연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아멜의 부탁을 받은 카일은 그녀를 해고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였다.
약혼녀와 절친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눈앞의 여자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제 입으로 허세를 부릴 때는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어젯밤에 본 실력은 진짜였다.
‘치명상을 입은 상태에서 침입자의 수하들을 제압하고도 침입자를 제압할 정도라.’
기사단장 출신인 하일드 집사장보다 그 움직임이 밀렵해 조금은 흥미가 일었다.
카일은 오늘 아침, 구금실로 가 바네사가 제압했다던 침입자의 수하들을 직접 눈에 담았다.
사실 카일은 그것들이 인형인지 공동묘지에서 반쯤 썩은 시신들을 건져온 것인지 알지 못했다.
누나 님의 복수를 한다며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너도나도 슬쩍 가 침입자의 수하들을 한 대씩 후려친 탓이었다.
그들을 임시로 가둬두었던 장소에서 클레어가 피 묻은 삽을 들고 나왔다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으나 카일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바네사가 상당한 실력자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침입자와 아는 사이인 듯했다.
‘그놈을 잡으려면 이 여자가 필요해.’
카일은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고 자신이 보았던 어젯밤의 장면을 떠올렸다.
침실 문을 열었을 때, 마라바스라는 이름의 남자는 약혼녀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아주 예리한 칼날을.
그런데도 느껴지지 않았던 살의와 아름다운 존재에게 홀린 얼굴을 하던 마라바스의 얼굴. 그것들이 카일을 미치게 만들었다.
카일의 머릿속에서 마라바스의 가장 큰 죄는 차이엘드 공작저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감히 약혼녀, 아멜리아 다이앤의 무방비한 잠옷 차림을 눈에 담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찾아내면 눈알부터 뽑는다.’
마라바스에게는 이미 차이엘드의 정보원이 다섯 명이나 붙었다. 지금도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정보가 속속들이 보고되는 중이었다.
바네사는 심상치 않은 살기를 풍기는 카일의 눈치를 슬쩍 봤다.
차이엘드 공작을 괴물이라고 부르던 항간의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알아보니 마라바스와 같은 용병단 출신이던데. 여태까지 왜 보고하지 않았지?”
“그건…….”
“내가 처형식에서 돌아올 때까지 관련 사항을 보고서로 만들어두도록.”
카일은 바네사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까칠하게 덧붙였다.
“차이엘드는 아멜리아 다이앤 경호에 자원을 아낄 생각이 없지만, 그렇다고 실수를 눈감아줄 생각도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바네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생각했다.
‘새끼, 말하는 본새 좀 보게. 마님 앞에서는 강아지처럼 살살 기더니만. 대체 마님은 이런 놈을 어떻게 길들인 거야?’
하지만 바깥으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는 고용주였으니까.
“암요. 잘 알겠습니다.”
“하나만 더 묻지. 다음에 마라바스 라이델을 만난다면 그자를 죽일 수 있겠나?”
바네사는 사회생활의 정석대로 고용주가 원하는 대답을 하기로 했다.
“다리를 부러뜨리고 팔을 구속한 다음 공작 전하께 바치겠습니다. 무방비한 마님의 모습을 눈에 담은 남자의 최후를 직접 결정하실 수 있도록.”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웃음기라곤 조금도 없는 목소리로 답한 카일은 턱짓으로 그녀를 일으켰다. 이제 이야기도 끝났겠다, 슬슬 가고일 백작의 처형식을 보러 가야 할 때였다.
약혼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가고일 백작의 행위는 차이엘드 공작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가문의 수장이 그의 역린을 건드린 순간 가고일 백작가의 운명은 결정된 셈이었다.
멸문(滅門).
길어도 일주일 안에는 처리해주겠다는 신임 황제의 확답을 받았으니 인내는 짧을 것이다. 카일이 무표정으로 가고일 백작의 낯짝을 떠올릴 즈음이었다.
정갈한 노크가 집무실에 퍼졌다. 허락의 음성이 떨어지자 들어온 것은 어딘가 곤란한 기색의 하일드 집사장이었다.
“공작 전하. 방금 황실에서 사람이 와 급히 소식을 전했습니다.”
“무슨 소식입니까.”
하일드 집사장은 눈짓으로 바네사를 내보낸 다음, 카일에게 고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구금되어 있던 가고일 백작이 도주했다고 합니다.”
차이엘드 공작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카일은 냉소적인 얼굴로 하일드에게 되물었다.
“처형식이 오늘인데 가고일 백작이 사라졌다는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려 있어 하일드는 제 잘못인 양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송구합니다, 전하. 황실에서 사람을 풀어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도망간 사람을 다시 잡아들일 능력이 있었으면 놓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우리 사람을 풀어 잡아 오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다신 도망가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것까진 괜찮지만 목숨은 붙여서 왔으면 좋겠습니다.”
감히 순진한 누나에게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려 한 남자다. 자비심을 보일 가치조차 없다.
원래도 얌전히 보내줄 생각은 없었지만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 발악하는 꼴을 보니 더 짓밟고 싶었다.
일단 잡아 온 다음, 제 발로 목숨을 연장한 일을 후회하도록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도망가면 가족들이 다 처형당할 것을 알 텐데.”
“감수하고 도망한 듯합니다. 감옥에 남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남겨두었다고 합니다. 원래대로라면 하인으로 팔려가는 대신 목숨은 건졌을 백작의 핏줄들도 처형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가고일 백작의 가족이 어떻게 되지?”
“양친은 돌아가셨고, 백작 부인과 그 사이의 딸이 둘. 이름 모를 여성들과 하룻밤 관계에서 나온 사생아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가고일 백작의 잦은 외도 덕에 애틋한 가족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나가 도망가 넷이 죽겠군.”
카일은 요즘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척 싫었다. 왜 소중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자식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배신하는 것일까.
가고일 백작에게 깨끗한 인정이나 승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실망이 예상보다 컸다.
그는 애당초 큰 그릇을 지닌 자가 아니었고 여태껏 기세를 떨친 것도 그의 능력이라기보단 귀족사회에서 소외당하기를 자처하며 황제의 최측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사장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고일 백작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르는 것 같습니다. 능력 밖의 일을 하려는 시도가 값진 노력으로 평가받을 때도 있지만 지금 그가 벌이는 행동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귀족으로 태어나 평생 시중을 받으며 산 그가 아닙니까.”
“확실히 가고일 백작 자체는 쓸모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씀은…….”
“하일드. 사람을 풀어 켈트만의 영역으로 향하는 길목을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목격자가 있는지 현지인들에게 묻는 것도 잊지 말고.”
하일 제국과 켈트만의 우호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가고일 백작의 이용가치가 가장 높게 평가될 만한 곳은 역시 켈트만이었다.
“가고일 백작이 혼자 힘으로 탈출했을 리 없습니다.”
“탈출 당시 조력자가 있었는지, 있다면 그 배후가 누구인지 철저히 조사해 보고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십시오.”
카일은 오늘 아침 받았던 보고서를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세계 곳곳에 심어둔 정보원들이 일제히 켈트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알리고 있었다.
정보원들의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켈트만과 관련된 주식 종목이나 물품들의 가격 변동이 말해주고 있었다.
‘켈트만이 하일 제국에 영향력을 확대하기를 원하는군.’
켈트만은 대륙의 북부가 근거지였다. 그곳은 농사가 어려워 약탈이나 채집, 수렵으로 식량을 확보해야 했으며 영토 내에 물길이 없어 타국과 교역 또한 어려웠다.
때문에 켈트만의 족장으로 추대되는 자들은 언제나 남진 정책, 즉 남쪽의 하일 제국을 제압한 다음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고대했다.
‘주인의 집에 멋대로 쳐들어오는 개라.’
경고하는 선에서 끝내려 했지만 켈트만이 가고일 백작을 끌어들인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카일은 약혼녀를 위협한 남자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었고, 누군가가 가고일 백작과 손을 잡았다면 그들의 손목과 목을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하일드. 준비해주십시오. 황궁에 다녀와야겠습니다.”
그의 머릿속에 광대한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