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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0화 (50/134)

#50

카일은 요즘 입궁이 잦았다. 보고도 이전보다 훨씬 자주 받는 것 같았다.

아멜이 공작저에 들어와 살게 된 이래로 가장 바쁜 모습은 조만간 큰일이 터질 예고처럼 보였다.

아침이 밝은 지금, 카일은 요즘 늘 그랬던 것처럼 몸을 일으킨 다음 비몽사몽인 아멜에게 짧게 입 맞추고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잠이 깬 아멜이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조금 더 주무십시오.”

“으음…… 싫어요.”

“하실 말씀이라도?”

“카일 얼굴 보고 싶어요.”

“…….”

오늘 아무 일정이 없다는 듯 카일이 다시 누웠다. 약혼녀가 내 얼굴이 보고 싶다는데 황제나 켈트만이 뭐가 중요할까. 다 필요 없고 온종일 아멜의 눈길이나 받고 싶었다.

참으로 불성실한 마음가짐을 들은 아멜이 픽 웃었다.

“카일. 오늘 바쁘지 않아요?”

“급한 일정은 딱히 없습니다.”

“거짓말.”

“거짓말인 걸 알아주시려거든 거짓말을 하는 이유도 같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멜은 씩 웃으며 그의 턱선을 마음껏 쓰다듬기 시작했다.

“붙잡아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카일이 오늘 바쁜 거 알아요.”

“제 일정을 다 알고 계신 겁니까?”

“굵직한 것들은요. 오늘도 황제 폐하와 밀담을 나누는 것이죠? 저도 오늘 공주님들이 주최하는 티파티에 가요. 운이 좋으면 황궁에서 마주칠 수 있겠네요.”

카일의 머릿속에 티파티 일정이 좌르륵 지나갔다. 오늘 그의 최종 목적지가 황제 알현이 아닌 티파티로 굳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맞으니 함께 입궁할 수 있도록 말해두겠습니다. 출발지도 같고 목적지도 같은데 굳이 마차를 따로 탈 필요는 없으니까.”

“황궁이 얼마나 넓은데요. 카일이 번거로울 거예요. 그냥 따로 가는 게 어때요?”

“……싫은데.”

카일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대답을 들은 아멜은 짐짓 엄한 얼굴로 말했다.

“흠. 카일, 어제도 말하려고 했는데요. 침대 위에서 자꾸 슬쩍슬쩍 반말하는 거…….”

쪽.

아멜은 카일의 입술에 도장을 찍듯 키스하고 말을 이었다.

“좀 설레요.”

카일은 그녀가 씩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그림을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멍하니 바라봤다. 귓가에 제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

황실의 공주들이 주최하는 티파티는 황제, 베르드의 아이디어였다.

부황이 크게 한탕 하고 물러나신 덕에 정치적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한 베르드는 어떻게 하면 황실과 사이가 멀어진 귀족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문제에 대한 베르드의 답이 바로 티파티였다. 그의 누이동생들은 비록 사생아이긴 하지만 신분은 공주였다. 공주는 대부분의 귀부인들보다 높은 신분.

그런 공주들이 황궁의 정원을 개방하고 귀부인들의 말에 귀 기울여 준다면 귀부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베르드의 최종적인 목적은 귀부인들을 사로잡아 그녀들의 남편과 황실의 거리를 좁히는 데에 있었다.

즉위 직후부터 이뤄진 베르드의 노력은 슬슬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사생아 공주들이 주최하는 파티라며 고깝게 여겼던 귀부인들도 살가운 태도와 싱그러운 정원에 마음을 열어갔다.

그리고 오늘, 귀부인들만이 초대되는 이 파티에 미혼인 백작 영애가 딱 한 명 초대받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귀부인들은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척 봐도 관리가 힘들어 보이는 새카만 바탕에 금장이 들어간 넓은 마차 한 대가 유유히 들어왔다. 마부가 고삐를 쥐자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백마들이 착 발을 맞추어 멈췄다.

이 파티에 참석한 귀부인은 물론 공주들까지, 저 마차가 어느 가문의 마차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차이엘드의 마차가 여긴 왜?”

“미혼인 레이디 클레어께서 오신 건 아닐 테고.”

“설마…… 다이앤 영애가 온 건가?”

아멜은 사교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지만, 차이엘드의 피앙세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녀는 이미 사교계의 중심이었다.

추수 연회에서 아멜을 자신의 피앙세라고 소개하는 카일을 본 모두가 그들의 인연을 추측하기 바빴다.

아멜리아 다이앤이 팔려왔다거나 사랑은 없고 계약만 있는 형식적인 관계라는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화끈한 키스 장면을 보여준 덕에 사람들의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하던 중이었다.

귀부인들은 여전히 정원을 둘러보는 척하며 차이엘드의 마차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뭐야. 마차 안에 차이엘드 공작이 있잖아? 여기까지 데려다주는 건가?’

수많은 눈동자가 아멜과 카일, 그들의 시종들을 훑었다.

시종들이 재빨리 마차 아래 계단을 만들었고 하일드 집사장이 먼저 내려 공손히 문을 열었다. 귀부인들은 그 장면을 보고 자못 놀랐다.

기사단장 출신인 하일드 웨일이라면 공작의 애첩이나 애인, 하룻밤 상대에게 극진히 예를 갖출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시종들과 백마의 태도에도 마차 안의 여인을 귀애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귀부인들을 기함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저, 저 남자가 그 괴물 공작이라고?’

‘형제들 다 죽이고 공작 자리에 올라간 게 카일리안 차이엘드 아닌가?’

‘말도 안 돼.’

카일은 아멜이 내릴 때 마차에서 따라 내렸다. 정원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약혼녀를 한참이나 감상하던 그가 못 참겠다는 듯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감았다.

“……저도 차 마시고 싶습니다, 누나.”

“안타깝지만 오늘 티파티는 귀부인들만을 위한 자리랍니다. 제가 왜 초대받았는진 모르겠지만.”

아멜의 너스레에 카일이 하일드를 바라봤다. 충직한 집사가 재빨리 설명을 시작했다.

“황실에서는 이미 누나 님을 차이엘드 공작 부인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겠지요. 차이엘드 공작저의 모든 고용인들처럼 말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알려주십시오. 자리를 엎고 나와도 수습할 수 있습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카일의 눈동자를 목격한 귀부인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갓 결혼한 새댁들은 첫사랑인 카일이 저런 모습도 보인다는 사실에 무척 우울해했다.

서른 언저리의 귀부인들은 오랜만에 듣는 누나 소리에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으며 남편이 직책이 마땅찮은 귀부인들은 미래의 차이엘드 공작 부인과 안면이라도 트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확신이 차올랐다. 소문대로, 차이엘드 공작은 약혼녀에게 푹 빠진 것이 맞았다.

***

내 걱정과 달리 파티의 분위기는 온유했다. 모두가 나에게 친절했고 질문 폭탄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느껴져 부담스러웠다.

이 자리를 위해 클레어에게 사교계 특강을 받았으나 대화를 길게 나누면 내가 사교 활동에 익숙하지 않다는 게 드러날 것이 분명했다.

해서 나는 적당히 미소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전략을 선택했고 이 방법은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사람들은 떠드는 사람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에게 더 끌리는 법이니.

물론 나를 주시하는 날 선 시선도 있었다. 추수 연회에서 어린 영애들과 어울렸을 때는 풋풋한 새내기들과 함께하는 대학교 OT가 떠올랐는데 지금은 눈치싸움의 한복판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백작 영애이면서 차이엘드의 피앙세인 나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파티가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여느 티파티와 마찬가지로 귀부인들은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위한 규칙인 듯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옮겨 앉은 테이블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시선을 느꼈다. 사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귀부인이 나를 위아래로 끈덕지게 훑어보곤 피식 비웃은 것이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클레어가 이런 상황에 대비해 가르쳐 준 다과상 엎는 방법이 떠올랐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다.

어디 보자. 이 귀부인은 분명…….

“부르크 백작 부인.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그래. 부르크 백작 부인이었다. 정계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하는 부르크 백작가의 안주인. 부인 또한 사교계에서 상당한 저력을 지닌 듯했는데, 왜인지 그녀는 나를 상당히 아니꼽게 여기고 있었다.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마신 부르크 백작 부인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영애께서는 아직 결혼 전이시면서 어찌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무슨 뜻이신지요.”

“다이앤 백작가는 부친이신 페르슈 다이앤 백작이 거액의 빚을 져 황궁 출입이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부르크 백작 부인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던 사실을 날카롭게 물었다. 백작 부인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지만 내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분명 무례한 행동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사사로운 대화로 인해 주변 귀부인들이 불쾌해하실까 염려됩니다. 이야기는 정원을 거닐며 이어가도록 하지요.”

“영애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지요.”

아무래도 부르크 백작 부인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기세 좋게 일어선 그녀는 시종들을 모두 물리고 내 옆에서 걸었다.

귀부인들이 궁금증 반, 걱정 반인 눈길로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원을 잠시 거닐던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

“부르크 백작 부인.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초대장의 발신인이신 나디아 공주님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음이 가장 큽니다.”

“귀부인들을 위한 자리입니다. 영애는 다이앤 백작가의 딸이 아닙니까. 차이엘드 공작과 약혼했다고 한들, 결혼 전이라면 가문의 사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르크 백작 부인.”

“보증에 휘말린 책임을 가족 모두가 함께 지기로 한 것이 다이앤 백작의 뜻이라면, 다이앤 영애께서도 다이앤 백작 부인처럼 입궁을 꺼려야 사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정돈된 겉모습이나 예리한 눈동자, 가시 돋친 말투까지. 부르크 백작 부인은 내게 뚜렷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겐 그 모습이 측은해 보였다. 나는 탐스럽게 핀 장미의 향을 맡으며 픽 웃었다. 그녀의 말에 담긴 진짜 의미를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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