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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1화 (51/134)

#51

나는 장미를 매만지며 부르크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웃는 내 얼굴에서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 움찔했다.

“부르크 백작 부인. 조금 더 걸을까요? 어머니의 친우분과 대화하는 일은 제게도 즐거우니까요.”

“……친우라. 다이애나가 나를 그렇게 부르던가요?”

친근하게 우리 엄마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확실했다. 은근히 우리 아버지를 깎아내리면서, 어머니가 궁정 출입과 사교 활동을 꺼리는 사실을 잘 아는 것.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 짐작한 대로 부르크 백작 부인은 어릴 적 우리 어머니와 어울리던, 친구였다.

‘잔소리가 전형적인 엄마 친구 잔소리기도 하고. 말투를 보니 엄마를 채간 아버지를 무척 싫어하나 보네.’

하일드 집사장님과 클레어가 파티 참석자 중에는 우리 부모님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말해주긴 했지만 이렇게 다가오실 줄이야.

어머니의 친우라는 지칭에 잠시 풀어진 얼굴을 했던 부르크 백작 부인은 다시 엄한 얼굴을 지어 보이려 했다. 하지만 내 앞에선 소용없는 짓이었다.

‘엄마 친구들은 나한테 껌뻑 죽지’

애교, 하면 나니까. 특히 엄마 친구 나이대의 성인 여성이라면 살살 녹일 자신이 있었다.

“부르크 백작 부인. 어머니께 종종 이야기 들었어요. 따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자기소개는 됐어요. 내가 영애 이름도 모를까 봐? 페르슈 다이앤, 그자의 이름이라면 듣기도 싫고.”

먼저 눈웃음을 지으며 사근사근 다가가자 까칠하던 부르크 백작 부인의 얼굴에 감정이 섞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흘린 정보들로 내가 모르는 20년 전 하일 제국 사교계에 대해 추측했다.

“안 그래도 어머니께 이 자리에 참석할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부르크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하시던걸요? 제가 실수하더라도 지켜봐 주실 것이라면서요.”

“……다이애나가?”

“네. 고명하신 백작 부인께서 도와주신다는 말에 제가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

부르크 백작 부인은 민망한 듯,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나는 그녀에게 반걸음 다가가며 필살의 애교 어린 목소리를 장착했다.

“티파티 내내 절 살펴 주고 계셨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며 슬쩍 옷깃을 스치자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다이애나를 닮아서 딸이 사랑스럽네. 이 애가 커가는 걸 내 눈으로 봤어야 하는데.」

「궁정 출입이 힘들 정도라니 찾아가면 부담스러워할 테고. 치장에 드는 비용이 있으니 오라고도 못 하겠고.」

「망할 페르슈 다이앤…… 순진한 다이애나를 꼬드긴 다음 사고 쳐서 결혼했으면 행복하게 해줬어야지, 연대보증을 서?!」

아무래도 부르크 백작 부인은 아버지를 훅 가게 했다던 어머니의 전설의 명대사, ‘차 마시고 갈래요?’에 대해 모르는 듯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절대 말하면 안 되겠다. 아버지께 저주할라.’

나는 호호호 웃으며 어머니와의 우정에 대해 들려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내 듣기 전략은 통했다.

부르크 백작 부인은 한동안 어머니와 사교계를 휩쓸었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무척 행복한 얼굴을 하고. 내가 할 일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뿐이었다.

“부르크 백작 부인께서는 저희 어머니가 사교 활동을 하지 않아 섭섭하게 생각하셨군요. 저도 같은 마음이랍니다.”

“…….”

“하지만 짚어주신 대로 지금의 다이앤 백작가는 사교 활동이 힘들어요. 그러니 다이앤이라는 성을 가진 저라도 귀부인들께 눈도장을 찍어두지 않으면 추후 사교계 복귀가 많이 힘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후…… 알고 있어요. 내가 다이앤 영애에게 괜한 심술을 부렸네요. 미안해요.”

부르크 백작 부인이 처음으로 편안한 웃음을 지었다. 날 보는 눈빛 또한 더 이상 날카롭지 않고 한없이 따뜻했다. 지금이 딱 투정을 부릴 타이밍이었다.

“그래도 아까는 너무하셨어요. 저야 어머니의 친우분에 대해 미리 들어 알고 있었지만, 두 분의 각별한 우정을 모르는 다른 귀부인들께서 오해하실 만한 상황이었다고요.”

뾰로통한 투정에 흐물흐물 녹은 부르크 백작 부인은 피식 웃으며 어느샌가 내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주었다. 손길이 무척 친밀했다.

“그 일은 돌아가서 내가 수습하도록 하죠. 생각해 보니 영애 말이 맞아요. 영애가 사교계에서 입지를 굳혀야 다이애나의 사교계 복귀가 쉬워지겠어요.”

살짝 닿은 손끝을 통해 어머니를 향한 옛 친구의 따뜻한 걱정들이 들려왔다.

「이 애는 결혼해서 행복해야 할 텐데.」

「……적어도 차이엘드 공작이라면 연대보증으로 망하진 않겠지. 망해도 삼 대는 갈 거고.」

「어쩜 이렇게 웃는 게 사랑스러울까.」

훈훈한 속마음을 들으며 나도 따라 웃었다. 티파티 장소로 돌아오자마자 부르크 백작 부인은 자신의 무례한 언행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이는 내게 하녀복을 입고 따라온 바네사가 물었다.

“마님. 대체 뭘 했길래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사람이 저렇게 사르르 녹아서 와요? 싸움 나는 줄 알았다고요.”

“어머, 그랬나?”

“마님은 정말 볼수록 대단한 분이시네요. 이러니 차이엘드 공작이 홀딱 넘어갔지. 그런 건 어디서 배워요?”

나는 슬슬 막바지인 티파티 쪽으로 다가가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타고났나?”

***

아멜의 처세술과 순식간에 적을 제 편으로 만드는 화법에 감탄한 것은 바네사뿐만이 아니었다.

티파티가 벌어지는 별궁에서 멀지 않은 발코니. 회의가 잠시 중단된 틈을 타 아멜을 지켜보던 카일과 베르드도 짐짓 놀란 얼굴이었다.

“와…… 빡빡하기로 유명한 부르크 백작 부인을 10분 만에 녹이네. 자네 약혼녀 대단해.”

황제가 된 베르드는 어색한 말투로 아멜을 칭찬하다 넋 놓고 약혼녀를 눈에 담는 카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원탁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는 내내 썰렁하던 차이엘드 공작의 눈동자가 환희와 애정으로 형형했다.

‘사랑에 빠져 물렁해진 차이엘드 공작이라.’

베르드는 카일의 약혼녀 감상이 끝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대화의 물꼬를 텄다.

“차이엘드 공작. 짐이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말이야.”

“잡담은 삼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폐하.”

“잡담이라니. 이번엔 진짜 중요한 일이라고. 켈트만에서 서신을 보내왔는데, 대외적으로 알리기엔 부담스러운 내용이라 아직 공개한 적은 없네.”

“켈트만?”

카일은 조금의 흥미를 느꼈다. 회의실에 들어서기 전 하일드에게 받은 보고 때문이기도 했고, 요즘 움직임이 심상찮은 그들이 하일 제국의 황제에게 보냈다는 서신의 내용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요약하자면 켈트만에서 매년 여는 수렵제에 올해부터 타국의 사신들과 함께하고 싶으니 함께 즐길 하일 제국 귀족들을 보내달라더군.”

“폐하께서 축제 초대의 진의를 모르시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카일의 말대로 베르드 또한 축제 초대장의 진의를 알고 있었다.

이번 축제 초대장은 하일과 켈트만의 동맹이 두터운지 얄팍한지를 가늠해보기 위한 수단임이 분명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장검을 들어 올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켈트만족의 전투력은 강했다.

양 세력 간 우호의 상징이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하일 제국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분실된 지금, 켈트만은 호시탐탐 하일 제국을 노리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부로 하일 제국의 중추를 구성하는 귀족 무리를 보낸다는 것은 대단한 신뢰가 깔려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귀족들도 미치지 않은 이상 자원할 리 없겠지.’

그렇다고 해서 눈속임을 하는 양 변방 지역의 이름뿐인 귀족들을 사신으로 보냈다가는 켈트만 측의 호의에 건성으로 답했다고 꼬투리 잡힐 것이 뻔했다.

“신문에서는 날마다 켈트만과 제국의 우호에 대해 걱정하는데 어떤 귀족이 미쳤다고 사신단에 자원하겠나? 막말로, 켈트만의 수장이 그들을 인질로 잡아 교섭이라도 시도할지 누가 아나?”

베르드가 답답한 심경으로 토로했다. 카일은 그 얼굴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국의 황제가 아무런 결정도 못 하는 꼴이라니. 겁을 조금 더 주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폐하. 오늘 아침 차이엘드의 정보원을 통해 며칠 전 처형식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으로 향하는 것을 목격한 자들이 꽤 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뭐? 가고일 백작이 거기서 왜 나와?”

“황실 감옥에서 단신으로 탈출했다는 것이 이상해 조사해보라 한 것인데, 설마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으로 향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베르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가고일 백작이라면 하일 제국의 정세는 물론 황실의 운영 체계와 내부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가 아닌가.

“자, 자네 지금 농담하는 건 아니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폐하와 농이나 나눌 만큼 친밀하지도 않고. 집사장에게 일러두었으니 오늘 중으로 폐하께 관련 보고서가 전달되리라 생각합니다.”

“잠깐.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에 붙었다는 말은 그러니까…….”

“켈트만이 먼저 접근했는지, 제3의 세력이 가고일 백작의 탈옥을 도왔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의 수뇌와 접촉했다면 하일 제국 황실의 거의 모든 정보가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베르드는 다리에 힘이 풀려 난간을 덥석 붙잡고야 말았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형 사고라니. 안 그래도 황권이 풍전등화인데!

“카일. 자네가 사신으로 가면 안 될까? 황제의 친우이자 대 차이엘드 공작인 네가 가면 그쪽에서도 건드리지 못할 거고. 켈트만도 차이엘드의 돈을 무서워하긴 하겠지.”

“싫습니다.”

“다른 귀족들과 달리 켈트만에도 영향력이 대단한 자네는 암살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잖나.”

“갈 생각 없습니다. 켈트만의 수렵제라면 일정이 거의 한 달인 데다 이동 거리도 상당해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게다가, 또 뭐? 귀찮은 것 말고 이유가 더 있어?!”

“약혼녀를 한 달이나 혼자 둘 생각이 없어서.”

베르드는 그런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카일. 켈트만의 자연경관이 훌륭하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일전에 들어보니 도시마다 차이엘드 공작가의 별장이 하나씩 있던데. 약혼녀가 좋아하지 않겠나?”

“제 약혼녀를 위험에 처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여행이라면 개인적으로 움직이면 되지 굳이 사신단 소속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자네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못된 오라비로 느껴지는군. 난 누이동생인 나디아 공주에게 이미 부탁했네. 나 대신 황실의 대표로써 켈트만의 축제에 참여해 달라고.”

베르드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누이동생에게 부탁할 땐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부탁해야 했더라면 가슴이 미어졌으리라. 물론 가고일 백작 이야기를 누이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 아팠다.

카일은 제법 서글픈 눈을 하는 베르드를 힐끗 바라보다, 다시 아멜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침 아멜은 티파티의 주최자인 나디아 공주와 인사를 나누며 해사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베르드의 눈동자가 카일 못지않게 번뜩였다.

“차이엘드 공작. 정말 켈트만에 다녀올 생각이 없나? 황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보상은 후하게 하겠네. 원한다면 대공 작위도 내려주지.”

“대공 작위라면 벌써 열 번도 넘게 거절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 말고 다른 귀족을 찾는 게 빠르실 겁니다.”

카일은 이번에도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드는 방금 전처럼 초조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래. 자네 말이 옳아. 싫다는 사람 시킬 수는 없지. 내 괜찮은 사람을 찾아 설득해 보겠네.”

베르드는 대지를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는 척 아멜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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