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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2화 (52/134)

#52

부르크 백작 부인과 안면을 튼 이후로 나는 황궁에서 열리는 티파티에 간간이 얼굴을 내비쳤다.

아직 개인이 주최하는 티파티에 가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피하고 있지만 밀려드는 초대장의 양을 봐서는 그쪽도 슬슬 응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긴장과 부담스러운 시선들의 결정체인 황궁 티파티에 계속 참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머니였다.

부르크 백작 부인에게 답할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대답이었지만, 나중에 곱씹어보니 내가 사교 모임에 종종 얼굴을 비춰야 어머니가 추후 사교계에 복귀할 때 부담이 덜할 듯했다.

‘클레어가 그랬지. 귀족 영애로 태어나 귀부인으로 자란 여성들에게 사교 활동이 없다는 건 인생의 큰 축이 없는 거라고.’

어머니를 생각하자니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나는 웃음으로 일관했다. 오늘 초대장의 발신인인 나디아 공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이앤 영애.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나디아 공주님의 초대를 받아 영광입니다.”

“부디 앞으로도 이런 자리에서 많이 뵙길 바라요.”

“그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디아 공주는 사근사근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오늘 티파티 초대장의 발신인이었는데, 카일에게 듣기론 베르드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이라고 했다.

‘열일곱 살이라고 했지. 아직 어린데 철이 일찍 들었네.’

파티 주최자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들 텐데 내색 없이 내게도 인사하는 게 기특했고, 그래서 더 딱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몇 번의 티타임에 더 참석하는 사이 하일 제국과 켈트만을 둘러싼 정세가 급변했다.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 쪽으로 붙었다는 보도가 신문에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때 특종을 건지지 못해 인지도가 바닥을 친 신문들의 기자들이 연합해 국경 지역을 샅샅이 뒤졌고,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 쪽으로 향했다는 증언을 다수 확보했다고 들었다.

‘프링글스 사장님도 켈트만에 대한 칼럼을 써볼 생각이 없냐고 재차 물었었지.’

내가 칼럼을 기고하는 하일 타임스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때 특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번 가고일 백작 관련 보도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이 연합해 구한 정보를 하일 타임스에 넘겨줄 리 없었으니까.

발 빠른 켈트만의 족장은 자국 신문을 통해 하일 제국에 사신단을 초대하는 서신을 보냈노라고 밝혔다. 공개적으로 베르드의 빠른 결단을 요구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 정세에 누가 켈트만의 심장부에 가려고 할까. 현재까지 밝혀진 사신단 구성원은 황실 대표라는 이름으로 차출된 나디아 공주가 전부였다.

‘베르드라면 분명히 카일에게 사신단을 부탁했을 거야.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카일은 거절한 건가?’

하긴. 카일도 결국은 하일 제국의 귀족이었다. 자국과 대립 구도를 형성해 가는 켈트만의 축제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인질로 잡히기라도 하면 낭패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득 볼 것이 없는 여정이니.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니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이나 해 보자. 관련 상품이 시장에 나왔을까?’

한창 정세를 이용해 돈을 불릴 궁리를 할 즈음, 바네사가 나를 불렀다.

“마님. 황제 폐하께서 보낸 시종이라는데 뭐라고 답할까요?”

“……황제 폐하께서? 그럼 거절할 방법이 없잖아요. 무슨 일로?”

“폐하께서 마님을 잠깐 뵙고자 한다는데요?”

“음…….”

차이엘드 공작저에서라면 모를까 황궁에서 황제의 부름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넙죽 달려가는 꼴을 보였다간 아마도 있을 협상에서 불리해질 게 뻔했다.

나는 파티가 파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다음,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가 걸음을 옮겼다.

***

베르드는 황제의 집무실에 앉아 문만 바라봤다. 사람을 보내 다이앤 백작 영애를 불러오라고 한 지 어언 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다이앤 영애가 오지 않으면 큰일인데.’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베르드는 사람을 불러 한 번 더 그녀를 부르려 했다. 때마침 멀리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다이앤 백작 영애인가?”

“예, 폐하.”

“어서 들라 하게.”

아멜은 척 봐도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젊은 황제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녀가 늦은 것에 대한 적당한 핑계를 대자 베르드의 표정이 풀어졌다.

‘황제 폐하께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면 제안할 건 뻔하지.’

하지만 아멜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슨 일로 부르셨냐는 말과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색시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자 베르드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다이앤 백작 영애. 아니, 아멜리아. 사람들은 미리 나가보라 하였네. 짐과 자네는 일전에 연이 있었지. 그때 자네가 짐을 걷어차 무척 힘든 나날을 보냈지. 기억나나?”

“……예, 폐하.”

“그래. 그런 연이 있었던 만큼 지금부터는 자네가 짐을 친우로 생각해줬으면 하네. 너무 어렵고 딱딱하게 대하지 말라는 뜻이야.”

“폐하의 백성인 제가 어찌 황제 폐하를 친우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부디 말씀 거두어 주시길 바랍니다.”

‘역시 단번에 미끼를 물진 않는군.’

베르드는 은근히 차이엘드 공작과 닮은 구석이 있는 아멜을 보며 흥미를 드러냈다. 경직된 분위기도 흐트러트릴 겸 잠깐 잡담을 나누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뭐, 그렇다면 짐은 다이앤 영애를 친우라 생각할 테니 영애는 마음대로 하시게. 영애도 알겠지만 요즘 여러 문제로 차이엘드 공작과 회의가 잦은데, 쉬는 시간마다 차이엘드 공작이 영애 이야기를 하더군.”

그런 적 없었다. 카일은 약혼녀를 독점하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베르드는 아멜의 심중을 떠보는 게 목적인지라 사실관계는 개의치도 않았다.

“영애 이야기를 너무 들어서 나 혼자 영애에게 친밀감이 쌓였는지도 모르지.”

“……공작 전하께서 제 이야기를 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베르드는 아멜이 쓴 호칭에 갸웃했다. 공작 전하라니. 너무 딱딱하지 않은가.

아멜리아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 약혼녀’하고 소유욕과 집착을 드러내는 차이엘드 공작과 딴판이었다.

“어휴, 말하면 입만 아프지. 영애의 찬란한 미모에 대해 어찌나 찬양하던지.”

베르드는 그 후 한참이나 아멜의 외모를 칭찬했다. 카일의 입에서 그녀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 나온 적이 없었지만 거짓말은 어렵지 않았다.

아멜리아 다이앤은 수도 사교계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인 데다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와 보석을 휘감고 다녔다.

사내라면 누구든 그녀의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 색 정도는 외우고 있으리라. 고간까지 걷어차인 베르드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 영애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라고 생각하진 말게. 난 영애만 보면 몸이 굳어. 또 걷어차일까 봐.”

“……그 일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

아멜은 하일 제국의 미래를 걷어찼던 일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사과할 마음이 있었다.

베르드와 아멜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조금 더 주고받았다. 대부분 베르드가 묻고 아멜이 짧게 대답하는 식이었다.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베르드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곤 말문을 열었다.

“다이앤 영애. 슬슬 내가 왜 불렀는지 궁금하겠지. 다름이 아니라 내가 영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네. 제안이나 거래라고 불러도 되겠지.”

“거래라면…….”

아멜은 일부러 순진한 척 굴었다. 예상대로 베르드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영애도 신문을 통해 켈트만이 황실에 보낸 초대장에 대해 알고 있겠지. 나는 영애에게 그 사신단의 일원이 되기를 제안하네. 체류비와 식비를 포함한 경비 전체는 황실에서 지불하겠네. 어떤가?”

“…….”

이 황제가 날 호구로 보나.

아멜은 기분이 상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사신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제가 부족합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보게. 오늘 확답을 주지 않고 조금 더 생각해봐도 괜찮으니. 짐이 보기엔 영애가 딱 적임자야.”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목걸이 사건 때 영애를 지켜봤는데, 다른 어린 영애들이나 귀부인보다도 처신에 능하더군. 왠지 새로운 지역에 방문하는 걸 좋아할 것도 같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영애에게는 사신단 역할을 수행하면 얻게 될 적당한 돈과 명예도 필요하지. 영애가 사신단에 자원한다면 황제의 권한으로 다이앤 백작이 황궁에 출입할 수 있도록 돕겠네.”

“…….”

“돈이 넘쳐나는 차이엘드 공작이 다이앤 백작에게 선의를 베풀지 않았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기사인 다이앤 백작이 자존심과 명예를 이유로 공작의 호의를 거절한 쪽이겠지.”

아멜은 아무런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기사의 명예를 위할 수 있는 것은 황제인 나뿐이라는 걸 영애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아멜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황제가 된 후로 베르드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상황과 상대방의 니즈를 파악하는 것이 제법 예리했다.

‘원작에선 답답할 정도로 눈치가 없는 캐릭터였는데.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건가?’

아멜은 하일드 집사장의 끈질긴 권유에도 차이엘드의 선물들을 한사코 거절하던 다이앤 백작 부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선물을 거절한 그들의 탓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은 있을 테니까.

칼럼을 쓰고 돈을 모은 건 이 세계에서의 정체성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낯선 세계에 떨어진 저를 사랑으로 보듬어준 그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베르드가 이런 제안을 할 걸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다이앤 백작가에 황제의 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아멜은 베르드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아멜은 베르드의 제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많고 많은 귀족 여성 중 베르드가 필요로 하는 건 오직 나 하나.’

다이앤 백작가의 황궁 출입 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분명 빨리 처리할수록 좋았지만, 당장 급하진 않았다.

오히려 당장 협상이 급한 것은 황제였다. 황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필요로 한다.

무엇이든 희소한 것은 그 값어치가 남다르다. 아멜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베르드는 실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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