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이 협상은 짐이 이긴 것 같군, 다이앤 영애.’
베르드는 선심 쓰는 척 약간의 품위 유지비를 얹어주겠다고 말했고, 아멜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자 호쾌하게 떵떵거리기까지 했다.
“영애.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뭐든 말해보게. 영애를 사신단의 일원으로 만들 수 있다면 짐이 무엇을 못 하겠나. 친우라 생각하고 편히 말해도 좋아. 이곳에서의 일로 이후 문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입을 뗄 때만 해도 호탕하던 베르드의 목소리가 끝으로 향할수록 느릿해졌다.
베르드는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아멜의 입매가 아주 조금이지만 호선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뭐지, 이 여유는?’
분명 황제는 자신이건만 일순간 주도권을 빼앗긴 기분. 찜찜한 정도가 아니라 무언가가 잘못되어간다는 긴장마저 들었다.
아멜은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떨구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었다. 드디어 자신이 가진 패를 오만한 황제 앞에서 흔들어 보일 때였다.
“폐하.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외람되오나 제가 원하는 것은…… 황실 백합 훈장입니다.”
“뭐? 아니, 영애가 그런 게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아?”
조사를 좀 했지. 아멜은 픽 웃음이 나려는 것을 삼켰다.
황실 백합 훈장은 하일 제국의 번영에 기여하고 국위를 선양시킨 사람에게 황제가 수여하는 훈장이었다.
현 황제와 전 황제 대에서는 수상자가 없어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도 그 존재를 대부분 몰랐다.
‘차이엘드 공작저에 있는 제국 역사서를 공부해두길 잘했지.’
황실 백합 훈장을 받는다면 아멜에게 필요한 두 가지, 즉 부와 명예를 모두 충족할 수 있었다.
황제가 내리는 것이니 기사인 아버지의 자존심을 상하지 않게 할 수 있고, 상당한 돈이 포상의 개념으로 따라오니 급한 재정 문제는 해결이 가능했다.
“다이앤 영애. 그건 좀……”
베르드가 난색을 표했다. 물론 아멜도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표면상으로 사신단은 그저 축제에 초대를 받고 다녀오는 것인데, 한 달짜리 여정을 이유로 황실 백합 훈장을 내릴 수는 없으리라.
‘황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지출을 줄여야 하니 쓸데없는 포상은 내리고 싶지 않겠지.’
하지만 그건 베르드와 황실의 사정. 아멜은 굳이 그들을 생각해줄 필요를 못 느꼈다. 애당초 반강제로 사신 역할을 수행하라며 부른 것은 황제였다.
베르드는 대단한 요구를 뱉어놓고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 아멜을 향해 소리쳤다.
“영애가 나를 얕보는군. 한 달 일정에 황실 백합 훈장이라니. 그 훈장의 값어치를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건가?”
“물론입니다, 폐하.”
“그렇다면 영애가 그 훈장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사신의 역할은 그저 켈트만의 축제에 참석하는 것뿐인데 너무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없는 사람의 객기라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네.”
“폐하. 송구하오나 저는 제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 그래.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얘기나 들어보지. 고작 한 달 동안 황명을 받들어 사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황실 백합 훈장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내 기꺼이 내주겠네.”
아멜은 노발대발하는 베르드를 바라보며 공손히 말을 이었다.
“먼저, 저는 현 정세를 모르지 않습니다. 켈트만과 제국의 사이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로 인해 틀어진 줄로 압니다. 누구도 황제의 사신이라는 명예를 차지하려 들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지요.”
베르드는 조금도 겁먹지 않은 음성을 들으며 어쩐지 위축되었다. 대체 이 여자는 뭘 얼마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고 한 달 여정을 떠나니 황실 백합 훈장을 달라?”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제 가치가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무슨…….”
“폐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사신단에 편입시키려 하시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
“폐하께서는 저를 다이앤 영애로 찾으신 것이 아닙니다. 차이엘드의 피앙세인 제가 필요하신 것이겠지요. 그래야 차이엘드라는 이름을 보고 켈트만에서 사신단을 건드리지 못할 테니.”
아멜은 무언으로 베르드의 심중을 떠보았다.
베르드는 손에 배어 나온 땀을 무릎에 문질러 닦으며 침묵을 지켰다. 묘책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꿰뚫린 기분. 눈앞의 다이앤 영애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켈트만 측의 제안에 화답하는 기색을 위해 이미 차이엘드 공작께 사신 자리를 제안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후순위로 제가 불려온 것일 테고요.”
“……차이엘드 공작이 그렇게 말하던가?”
“순전한 제 추측입니다. 차이엘드의 피앙세인 저를 찾으셨다는 건 차이엘드 공작가가 움직이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
베르드는 반응을 보이기가 겁났다. 모든 것이 아멜의 말대로였다.
차이엘드의 피앙세가 사신단의 일원이라고 한다면 켈트만에서도 사신들에게 아무런 압박을 가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만에 하나 일어날지도 모르는 ‘그 일’을 미리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멜리아 다이앤은 꼭 사신단에 편입시켜야 했다.
“……인정하지. 영애의 안목은 기대 이상이군. 내가 황실 백합 훈장을 약속한다면 사신의 자격으로 북방에 다녀오겠나?”
질문의 형식을 한 물음이었으나 사실은 명령이었다. 베르드는 아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주한 녹갈색 눈동자는 더 큰 것을 노리는 듯 형형했다.
“폐하. 송구하오나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황실 백합 훈장의 수여식을 황실의 홀에서 열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성대한 파티를 열어달라는 말인가? 황실 재정으로?”
“그리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시면 황명을 받들어 제게 주어진 사신의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허. 영애에게 주어진 사신의 의무는 고작 해봐야 차이엘드의 피앙세라는 이름으로 켈트만에 방문하는 것뿐이네. 그걸 모르나?”
“한 가지가 더 있지 않습니까.”
“……!”
“나디아 공주님이 여정 내내 무탈하시도록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설마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 줄이야. 모든 속내를 들킨 베르드의 얼굴은 황망했다. 아멜은 가만히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디아 공주는 베르드가 가장 아끼는 누이동생. 그런 그녀를 켈트만에 보내는 베르드의 심정이야 뻔했다. 이 정도는 속마음을 읽을 것도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동생의 안전을 확보하려 하겠지.’
다른 가문의 경호원과 기사들이라면 켈트만에서 저지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켈트만의 산업화와 수도 환경 개선 프로젝트, 수출과 수입에 지대한 관여를 하고 있는 차이엘드라면.
‘차이엘드를 너무 이용해 먹는 것 같아서 카일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본래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제 몸뚱이의 값어치를 가지고 흥정해야 했다. 아멜은 자신의 값어치를 잘 알고 있었다.
한참 후, 베르드는 힘없이 아멜의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주겠노라고 약조했다.
아멜은 황제의 서명이 담긴 친서를 받아들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멜리아 다이앤.”
“예?”
“아니네. 가보게.”
베르드는 아멜의 배짱과 맹랑함에 혀를 내둘렀다. 괴물 공작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린 영애를 만만히 본 것이 실수였다.
***
마차가 황궁을 벗어날 때쯤에야 긴장이 풀렸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황제 폐하와 딜을 하려니 진이 다 빠지네. 이렇게 무리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지금쯤 베르드는 속이 꽤나 쓰릴 것이다. 황실 백합 훈장에, 성대한 수여식까지 해주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테니까.
다이앤 백작 영애인 내가 황실 백합 훈장을 받고 황궁의 홀에서 베푸는 파티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초대한다면 다이앤 백작가는 다시 황궁에 출입할 수도, 사교계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내가 원하던 모든 것을 얻어낸 거래였다. 내가 이겼다. 그런데도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온전히 내가 가진 것만으로 이긴 게 아니었어.’
나는 왼손의 약혼반지를 바라봤다. 이 반지에 차이엘드의 문장이 담겨 있다. 나는 차이엘드의 약혼녀라는 지위를 이용해 거래에서 이긴 것이었다.
지위뿐일까. 내가 탄 마차, 마차를 끌고 있는 백마와 마부, 내가 입은 드레스와 치장에 쓰인 보석들은 모두 차이엘드에서 온 것이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실보다 득이 더 많은 거래였어.’
카일을 이용한 일에 후회는 없었다.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양심 같은 걸 지키려 들었다간 초라해질 뿐이니까.
다만 눈 붙일 틈도 없이 음식을 서빙하고 테이블을 치워야 했던 대한민국에서의 삶이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도 결국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내 앞길을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내 입지를 다지기 위해 다른 사람의 지위를 이용하고, 스스로도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일까.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다 마부에게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다이앤 백작저로 가주시겠어요?”
“누나 님. 차이엘드 공작저로 바로 돌아가시지 않는 겁니까?”
“조금 쉬고 싶어서요.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 전에 공작저로 돌아갈게요.”
마부는 내 부탁에 대답하는 대신 하녀 옷을 입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바네사를 힐끗 바라봤다. 바네사는 곧장 내 안색을 살폈다.
“마님. 괜찮으세요?”
“머리가 조금 아프긴 한데 집에서 쉬면 낫겠지.”
한 번 더 부탁하자 마부는 다이앤 백작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곧 보이는 다이앤 백작저가 반가웠다. 마부는 능숙히 말들을 멈추었다.
“누나 님. 두 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고마워요. 공작 전하께서 아시면 걱정하실 테니 근처에서 기다려주세요.”
바네사는 나보다 먼저 내려 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도왔다. 나는 치맛단을 붙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바네사는 마차 안에 있어요. 제 방은 저기예요. 만약의 상황이 생기면 잘 부탁할게요.”
“……알았어요.”
나는 다이앤 백작저에 들어섰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맞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었지만 두 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붕 떴다.
“아멜.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괜찮니?”
“……죄송해요. 올라가서 쉬어도 될까요?”
나는 동의를 구하고 내 방으로 올라갔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잠깐 자고 일어나자.’
한 달. 한 달 동안만 고생하면 앞으로는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딱 이번 한 번만 카일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움을 청하자.
‘카일이 공작저에 있을 테니까 너무 많은 사람을 데려갈 수는 없어. 여정을 생각해 본 다음 최소한의 동행인만 붙여달라고 하자.’
차이엘드에 마지막으로 뻔뻔하게 손을 벌려 다이앤 백작저를 정상화시키면 그 후에는 나도 돈을 위해 한 몸 불사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에휴. 이번 생까지 이렇게 전전긍긍 살아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나는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아르바이트를 몇 탕이나 뛴 것처럼 피곤이 몰려왔다. 울고 싶었지만 긴장이 덜 풀렸는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차이엘드에서 선물해준 장신구들을 하나하나 풀어 침대 아래에 내려두곤 눈을 감았다.
***
공국의 정무를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는 카일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예정대로라면 진작 도착했어야 할 마차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왜 안 오시지.’
약혼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잡념을 떨치려 내다본 지평선에는 마차가 덜컹거릴 정도로 급히 말을 모는 차이엘드의 마부가 보였다.
카일은 곧장 집무실에서 나와 일 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엔 다이앤 저택에서 이곳까지 빛의 속도로 말을 몰아 온 마부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헉, 헉…… 누나 님. 누나 님께서…….”
카일은 물론이고 주변을 정돈하던 차이엘드의 온 고용인들이 마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부는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내뱉었다.
“누나 님께서 우울해하셨습니다!”
“……!”
차이엘드의 모두가 그의 발언에 철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