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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4화 (54/134)

#54

다른 공작저에서 같은 대답을 했더라면 고작 그딴 일로 이 사달이냐며 당장 끌려나가 매질을 당했겠지만 이곳은 차이엘드 공작저였다.

“……!”

마부의 발언은 카일을 비롯한 주변 고용인들을 모두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 쾌활한 다이앤 영애가 우울이라니.

물론 그 소식에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카일이었다.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눈앞이 캄캄했다.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마부는 아멜의 현 상황과 현 위치를 낱낱이 불었다.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카일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일드. 먼저 백작저로 갈 테니 시킨 일을 마치고 뒤따라오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가장 날쌘 말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카일은 곧바로 말 안장에 올랐다. 지금 상황에 한가하게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는 없었다.

***

지름길과 발 빠른 말을 이용해 단숨에 다이앤 백작저에 도착한 카일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겁니까.”

“윽…….”

누나를 밀착 경호해야 할 바네사가 지붕에서 한가롭게 육포나 뜯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바네사는 머리가 다 헝클어질 정도로 급히 달려온 차이엘드 공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마님이 우울해하는 걸 보고하러 바로 복귀하는 마부나, 곧바로 달려오는 공작이나.’

차이엘드 공작저는 단체로 미친 게 틀림없었다. 바네사는 미친놈과 길게 대화하지 않기로 했다.

“마님이 혼자 있고 싶다고 하셔서요. 방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울먹이면서 따라오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부득이하게 이곳에서 경호 중입니다.”

“…….”

카일은 바네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인사한 카일은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렸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심장이 철렁했다.

“……누나.”

“…….”

“안에 계십니까?”

카일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3초 정도. 그 후에도 답이 없자 안에서 큰일이라도 난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카일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나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게 어딘가 애처롭게 보였다. 게다가 그 주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은 모두 자신이 선물한 보석들이었다.

‘대체 황궁에서 무슨 일이…… 베르드 그 개자식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

카일은 끓어오르는 화를 식히며 약혼녀를 살폈다. 일단 외상은 없었다. 시야에 들어와 있으니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마부의 말로는 가벼운 두통을 호소했다니 이대로 자도록 두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카일은 발소리를 죽이며 걸어가 침대의 옆면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선물들을 조심히 줍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이 저렸다.

분명 잠결에 실수로 떨어트린 것이다. 일부러 버리진 않았으리라. 아무리 그렇게 뇌까려도 결국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벗어던지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선물들은 버려진 것일까. 누나가 버린 걸까.

카일은 입을 꼭 다문 채 장신구들을 주워 탁상 위에 얹어두었다. 씁쓸한 생각에 눈을 감으려 할 때였다.

“카일. 언제 왔어요?”

가볍게 머리 위로 얹히는 손. 카일은 보드랍게 머리를 헝클이는 아멜의 손가락에 약혼반지가 있음을 느끼곤 표정을 풀었다.

“누나. 괜찮습니까?”

“뭘 들었길래 그렇게 물으실까.”

“…….”

아멜은 침대에서 내려와 카일의 옆에 앉았다. 카일의 얼굴을 보면 미안함과 자괴감이 들 줄 알았는데,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의외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도 끝내주게 잘생겨서 그런가.’

이 얼굴을 한 달이나 보지 못한다면 슬플 것 같았다. 목소리도 듣고 싶을 것이고 따뜻한 포옹도 그리울 게 뻔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가난은 선택지를 줄인다.

아멜은 자신을 위해, 다이앤 백작가를 위해 켈트만에 갈 수밖에 없었다.

카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득히 먼 어딘가를 떠올리는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누나. 왜 그런 얼굴을 하시는 겁니까.”

“……무슨 얼굴이요?”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처럼.”

“카일. 할 말이 있는데 잠깐 들어줄래요? 오늘 황실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아멜은 카일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베르드가 나쁘다느니 하는 사견은 넣지 않았다. 이 거래는 그녀가 전적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그런 조건으로 황제 폐하께서 사신의 일원이 되기를 제안하셨어요. 제게 필요한 제안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어요. 다녀오면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을 거예요.”

“……이미 가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다녀오고 싶어요. 가능하다면 동행할 사람 몇 명만 붙여줄래요?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카일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약혼녀를 보자 안에서 무언가가 울컥했다.

누나가 죄지은 사람처럼 침울해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베르드 그 개자식과 단둘이 있었다는 사실에도 속이 뒤틀렸다.

그 개자식의 제안 때문에 말끝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붙이는 것도 미칠 것 같은데 당연히 혼자 떠나려고 생각하는 걸 들으니 속이 절절 끓었다.

눈을 똑바로 보고 묻고 싶었다.

왜 내가 약혼녀인 당신과 같이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냐고. 나는 당연히 같이 떠날 생각을 하는데.

답답한 마음에 마른세수를 하는 카일을 보며 아멜이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카일. 제가 한 번만 더 차이엘드를 이용해도 될까요?”

“……누나. 자기가 가진 패를 쓰는데 왜 허락을 받습니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해서 제게 계속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람? 필요하면 몇십 명이든 몇백 명이든 붙여줄 수 있었다. 아예 함께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필요한 모든 건 차이엘드가 해줘야 옳았다. 아멜리아 다이앤은 차이엘드 공작부인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아멜이 남에게 손 벌린다는 듯 말하니 카일로서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자기 것을 쓰는데 왜 미안해하고 왜 허락을 받는지. 아멜이 버리듯 침대 아래로 던져둔 장신구들이 눈에 들어와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카일은 아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곤 말했다.

“누나가 그렇게 원하시니 도와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주십시오. 정세를 알면서 뭘 믿고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 무슨 생각으로 켈트만으로 떠나는지.”

노기 어린 음성과는 달리 카일은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제발 나를 믿는다고 하기를. 당신의 차이엘드를 믿으니까 무모한 짓인 걸 알면서도 가기로 했다고 답해주기를.

약혼자인 내가 당연히 당신을 보호하고 따라오리라 생각했다고 말해주기를.

연인을 나를 두고 떠날 생각 따위 애초에 한 적도 없다고 속삭여주기를 속으로 수없이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멜은 단호했다.

“카일. 미안하지만 내가 떠나는 건 돈과 명예 때문이에요. 몇 번을 물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카일은 제가 어떤 심경인지 절대 모를 거예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저를, 차이엘드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겠다고.”

“싫어요.”

단호한 대답에 카일의 심장은 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러나 아멜은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내가 카일과 차이엘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기 싫어서 켈트만으로 가는 거니까.”

“…….”

“카일. 저는 카일에게 기대기만 하는 건 싫어요. 사신 역할을 수행해서 부와 명예를 얻은 다음 제 두 다리로 카일 곁에 서 있고 싶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 카일?”

진지하게 쏘아붙이던 아멜은 카일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은근한 분노를 드러내던 남자가 발갛게 익은 채 일시 정지 상태였다.

눈앞에서 손을 휘저어도 반응이 없다. 아멜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속마음이 들려왔다.

「제 두 다리로 카일 곁에 서 있고 싶어요……?」

「그러니까, 누나가 부와 명예를 얻어서 하고 싶은 일이 내 곁에……」

「제 두 다리로 카일 곁에…… 여기서 말하는 카일이 나니까……」

‘제 두 다리로 카일 곁에 서 있고 싶어요.’ 부분을 몇 번이고 곱씹는 카일은 귀까지 빨갛게 익었다.

“카일. 괜찮아요?”

“……방금 하신 말, 진심입니까?”

“진심이에요. 다이앤 백작가가 차이엘드만큼 위대해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기대기만 하는 건 이제 싫어요.”

“그런 뜻이었습니까.”

“응. 그러니까 내가 내 다리로 카일 곁에 설 수 있게 조금만 도와줄래요? 전 차이엘드의 약혼녀……”

아멜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당황했다. 약혼녀랍시고 도움을 청하는 중인데 카일이 약혼반지를 쏙 빼앗아갔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멜은 눈만 깜빡였다. 카일이 약혼반지를 뺏은 건 결단코 처음이었다. 역시 너무 과한 요구였을까.

설명을 요구하듯 눈을 마주하자 카일은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잠깐 빼고 계십시오.”

“이용해먹었다고 벌주는 거예요?”

“……제가 나쁜 생각 할 것 같아서.”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반지를 잠시 빼앗기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음험한 생각들이 차올랐다.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목이 바싹 말랐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올렸다는 걸 그녀가 아는지 모르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곱씹을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마성의 문장이었다. 카일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아멜과 마주한 채 말했다.

“누나의 돈과 명예를 위해 기꺼이 돕겠습니다. 수행인이든 뭐든 필요한 대로 말씀하십시오.”

“정말요?”

“대신 저도 따라갈 겁니다.”

“이상하다.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거라고 방금 말한 것 같은데.”

카일은 아멜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으며 뻔뻔하게 답했다.

“슬슬 켈트만에서 진행되는 차이엘드의 사업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전 누나 뒤만 졸졸 따라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카일. 그렇게 바쁘면 안 와도……”

“그렇게 바쁘진 않고. 준비는 내일부터 하도록 명해두겠습니다.”

과자 선물세트를 선물 받은 어린애처럼 해사하게 웃은 카일은 머릿속으로 신혼여행, 아니, 켈트만 방문의 계획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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