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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5화 (55/134)

#55

신문에는 켈트만의 축제에 하일 제국 황제의 사신들이 방문한다는 기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켈트만과의 정세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던 국민들은 양측의 우호적 교류를 양손 들고 반겼다.

백성들은 황제가 사신을 보낸다는 사실 자체에 안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칫 위험하다고 느껴지는 일정에 차이엘드 공작가의 수장,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함께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카일이 움직일 정도면 안심해도 된다는 건가. 거물이 움직이면 반응 자체가 다르구나.’

공작저에 머무르며 잠시 잊고 있었던 차이엘드 공작가의 위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연일 같은 주제인 신문을 덮을 즈음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손길이 사라졌다. 나는 거울로 내 머리를 정리해주던 바네사를 힐끗 바라봤다.

“끝났으면 슬슬 나갈까요?”

“어머. 다이앤 백작저에 가는 게 무척 즐거우신가 봐요?”

내가 당연하지 않냐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자 바네서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영애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란 말이죠.”

“마님, 마님 하다가 갑자기?”

“차이엘드 공작저 같은 곳에 살면서 다른 장소가 생각나는 게 신기해요. 저였다면 여기서 떠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을 텐데.”

“뭐…… 시설만 놓고 보면 차이엘드 공작저가 최고죠. 하지만 우리 집에 가는 거니까 기분이 남달라요.”

“그렇구나…….”

평소라면 그런 게 어디 있냐, 시설이 최고다, 하고 주장했을 바네사가 조용히 꼬리를 내렸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고향도, 가족도 없는 고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음…… 바네사가 자기 입으로 고아라고 말해준 적이 없으니 미안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마차를 타기 위해서는 방을 나서야 했다. 바네사는 다른 고용인들과 함께 내 문을 열어주고 드레스 자락을 잡아주면서도 조용했다.

저택의 문을 나서기 직전, 나는 바네사에게 슬쩍 말했다.

“뭐, 바네사한테는 차이엘드 공작저가 최고겠죠. 바네사가 돌아올 곳이 여기니까.”

“마님……”

“왜 그렇게 봐요?”

입술을 맞물고 있던 바네사가 어딘가 아련한 웃음을 지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이젠 내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존칭을 쓰는 것도 제법 익숙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말이지.’

나는 바네사가 껌을 붙이는 바람에 잘라야 했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보곤 마차로 향했다.

***

차이엘드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는 다이앤 백작저로 향했다. 아멜은 카일의 어깨에 기대 물었다.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차나 함께한 다음 오려고 했는데. 대체 저녁 약속은 언제 잡은 거예요?”

“다이앤 백작 부부도 누나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

“카일.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아멜이 환하게 웃었다. 카일도 따라 웃었다. 마차 구석에 앉은 하일드 집사장만이 훈훈한 미래의 공작 부부를 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다이앤 경 고집을 꺾느라 어찌나 힘들었던지.’

처음 카일이 다이앤 백작저에서의 저녁 식사를 제안했을 때 그 의견을 전달한 것은 하일드였다. 물론 완고한 다이앤 백작은 단번에 거절했다.

“하일드. 공작 전하께서 누추한 다이앤 백작저에 걸음하는 것은 보기 좋지 않네. 황제 폐하께서 내려주신 작위에 따라, 공작저에서의 저녁 식사에 초대해주신다면 영광으로 알고 참석하겠다고 전해주시게.”

하일드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누가 총기사단장 출신 아니랄까 봐, 페르슈 다이앤은 지나치게 법도에 빡빡하게 굴었다.

물론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그저 제국의 공작이었다면 지위가 낮은 다이앤 백작저에 친히 걸음하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딸의 약혼자인데! 미래의 사위라고!’

하일드는 오늘의 저녁 식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다이앤 백작저에 며칠 동안이나 드나들었다.

요리사와 식기 등등 저녁 식사에 필요한 일체는 차이엘드에서 마련할 것이라고 다이앤 백작 부인을 설득하는 한편, 한때 상관이었던 다이앤 백작에게는 반협박을 해댔다.

“다이앤 경, 내 딸 데리고 사고 친 놈을 죽이러 왔다며 장인어른이 던진 화분을 머리에 맞고 휴가를 쓰셨던 일을 잊으셨습니까!”

“큼, 큼…… 하일드. 오래전 일을 잘도 기억하는군.”

“다이앤 경께선 지금 장인어른 분과 똑같이 행동하고 계신 겁니다. 장인 되실 분께 계속 거절만 당하면 공작 전하께서 얼마나 상심이 크겠습니까!”

하일드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다이앤 백작저의 바닥에 쌓여 있는 차이엘드의 선물들을 가리키며 열변을 토했다.

과거의 일을 꺼내니 완고하던 다이앤 백작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카일은 진작 하일드를 큐피트로 쓸 걸 그랬다며 아쉬워했지만 하일드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마차가 다이앤 백작저에 도착했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아멜은 이제껏 봐 왔던 모습과 전혀 다른 다이앤 백작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건물색이 달라 보일 정도로 자라 있던 이끼들이 싹 사라졌고, 마당에는 푸릇푸릇한 잔디들이 깔려 있었다.

늘 사람이 없어 적적한 느낌만을 내던 다이앤 백작저의 곳곳을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분주히 누비는 모습은 가히 새로웠다.

카일은 작은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멜을 향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누나. 마음에 듭니까?”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사하네요. 연대보증 이전의 다이앤 백작저도 이렇게 예쁘진 않았을 거예요.”

아멜은 빙긋 웃으며 카일을 백작저로 안내했다. 카일은 따라 걸음을 옮기며 아내가 될 약혼녀의 집을 구경했다.

켈트만에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올 즈음이면 약혼녀는 부와 명예를 모두 얻은 상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다.

‘결혼.’

카일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두 글자를 속으로 곱씹으며 다이앤 백작저에 들어섰다.

***

다이앤 백작저에서의 저녁 식사는 내내 훈훈했다.

일류 요리사의 디저트까지 싹 해치운 아멜은 빙긋 웃으며 다이앤 백작 부부를 눈에 담았다. 부부 또한 아멜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머, 아멜. 네게 주려고 꺼내둔 게 있는데 방에 두고 온 것 같구나.”

다이앤 백작 부인이 운을 뗐다. 아멜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따라 일어났다. 다이앤 백작 부인은 방 안의 책상에 놓인 작은 상자를 아멜에게 건넸다.

“열어보렴. 처녀 시절에 친구에게 선물 받은 팔찌란다. 네가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어머니의 친우분이시라면…….”

“그래. 네가 얼마 전에 티파티에서 만났다던 부르크 백작 부인이 내게 준 거야.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다이앤 백작 부인은 양팔로 딸을 보듬어 안았다. 조심히 다녀오렴,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아멜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얇고 심플한 디자인의 팔찌가 들어 있었는데, 장식이라곤 가운데에 박힌 쌀알만 한 녹색 보석이 전부였다.

“우와…… 예뻐요. 에메랄드인가요?”

“아니, 그건 연금술사가 만든 광물이라더구나. 트라이하 제국의 특산품이라고 했어. 누군가가 착용자에게 음험한 마음을 품으면 보석의 색깔이 변한단다. 신기하지?”

“마법이 걸려 있는 거예요?”

아멜은 어머니가 손목에 해준 팔찌를 이리저리 훑어봤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팔찌인데 마법이 깃들어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법은 총 다섯 번. 색깔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착용자에게 음험한 마음을 품었다는 뜻이란다. 원래는 무색이었는데 지금은 초록색이지? 내가 착용하고 있을 때 한 번 마법이 발동했기 때문이야.”

조곤조곤한 설명을 듣던 아멜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럼 누가 어머니께 음험한 마음을 품었다는 건데……”

능글스런 눈웃음을 지으며 눈을 마주하자 다이앤 백작 부인은 큼, 큼 하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아멜의 양손을 꼭 붙잡았다.

“아멜, 기도하자. 사랑이 많으신 주님……”

“흠. 아버지가 음험한 마음을 품으셨구나. 재미있는 얘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이제 슬슬 식탁으로 돌아갈까요?”

“…….”

“두 분이 첫눈에 반했다고 하셨으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음흉한가?”

아멜은 천연덕스레 말하곤 어머니의 팔을 휘감아 안은 뒤 식탁으로 향했다.

한편, 다이앤 백작과 카일은 듣는 사람의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서로의 안부를 물은 다음 대화가 끊겼고, 카일은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할 수 있어. <장인어른과 친구처럼 지내는 법>을 세 번이나 읽고 왔으니까……’

카일은 식탁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쥔 다음 입을 뗐다.

“선물을 장식해주셔서 기쁩니다. 그림이 백작저에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카일이 가리킨 건 다이앤 백작저에 보냈으나 그동안 포장지에 싸여 있었을 것이 분명한 유화 한 점이었다.

드디어 제 선물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다이앤 백작은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데려갈 놈이라고 생각하니 마냥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어쨌든 카일의 노력은 와닿았다.

기이한 양가감정이 들었다. 차이엘드 공작이라면 딸을 정말 아껴줄 것이라는 확신과 그래도 딸이 제 곁을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아버지라면 누구나 겪는 내적 갈등이리라.

“보내주신 그림 속 오리가 귀여워 마음에 듭니다. 식당에 걸어두니 활기가 도는군요.”

“귀여운 오리입니다.”

카일은 긴장 탓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아무 말을 했다.

안 그래도 일전에 누나의 방에 슬쩍 찾아왔다가 문 뒤에서 걸린 전력이 있어 이미지가 좋지 않을 터. 이번 기회에 예쁜 짓을 해 다이앤 백작의 신임을 얻고 싶었다.

‘……야밤에 사다리를 타고 딸 방에 쳐들어온 엉큼한 사위라는 누명도 좀 벗고.’

그러나 카일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색한 적막이 감돌았다.

이러다 피 말려 죽겠구나 할 즈음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능글능글 웃고 있는 아멜과 다이앤 백작 부인이었다.

카일과 다이앤 백작이 동시에 광명을 찾은 듯 환히 웃었다.

‘적당한 대화 주제가 없었는데 잘 됐군.’

대화 주제를 찾던 다이앤 백작은 딸의 손목에 들어찬 팔찌에 관심을 보였다. 마법이 깃든 장신구 얘기라면 남녀노소 흥미로워할 만한 것이었다.

“공작 전하. 저 팔찌에는 신비한 마법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이앤 백작이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일은 아멜을 위해 제 옆자리 의자를 빼주며 귀를 기울였다.

“트라이하의 연금술사가 만든 것인데 말입니다.”

카일은 아멜의 손목을 끌어와 팔찌를 살폈다. 집중하려 해도, 큭큭 웃으며 아버지의 말을 기다리는 약혼녀의 시선을 느끼니 몸이 자르르 끓었다.

오늘따라 가느다랗고 희게 느껴지는 손목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양 손목을 거칠게 휘어잡고 싶기도 했고.

‘안 돼. 집중하자. 누나 앞인데.’

카일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팔찌에 세팅된 보석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팔찌가 자신의 음험한 생각에 반응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카일은 필살의 상큼한 웃음을 지었다.

“색깔이 바뀌는 팔찌라니, 신기합니다.”

“…….”

저놈이 해맑게 웃으면서 내 딸에게 무슨 시커먼 마음을 품은 건가. 다이앤 백작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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