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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6화 (56/134)

#56

드디어 오늘이었다. 아멜은 이른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곤 마지막으로 빼먹은 일은 없는지 확인했다.

‘어디 보자. 프링글스 사장님께 편지도 남겼고, 부모님 용돈 드렸고, 여정 중에 읽을 책들도 챙겼어.’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은 모두 마친 셈이었다. 아멜은 바네사의 안내를 받으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은 긴 여정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클레어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카일도 약혼녀를 금방 발견했다.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응. 미안해요. 제가 제일 늦은 거예요?”

“아닙니다. 모두 방금 나왔습니다.”

“사심이 돋보이는 거짓말, 잘 들었어요.”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카일이 환하게 웃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차이엘드 공작저의 사람들이라면 카일의 너스레에 제법 익숙해졌을 텐데 새삼 굳는 게 이상했다.

아멜의 시선을 알아챈 카일은 턱짓으로 그들을 가까이 오게 하곤 명했다.

“스타벅. 미래의 공작부인께 인사 올리도록.”

“넵! 마님, 안녕하십니까! 차이엘드 소속의 선장 스타벅이라고 합니다. 여정 내내 편히 모시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보다 그녀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선장…… 이라고요?”

하일 제국과 켈트만은 같은 대륙에 있어 국경을 접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수도에서 수도로 향하려면 긴 시간이 필요했다.

켈트만과 하일 제국의 수도는 으레 그렇듯 자연물, 즉 호수와 강, 산맥을 기준으로 나뉘었다.

‘문제는 호수와 강이 너무 거대해서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라는 거지.’

켈트만이 하일 제국을 호시탐탐 노려왔으면서 쉽사리 남침을 해 올 수 없던 것도 그 때문이다. 육지 생활에 익숙한 그들은 물길을 꺼렸다.

해서 켈트만과 하일 제국의 교역로는 모두 산맥과 황야, 사막을 거치는 육로였다.

“저는 당연히 육로로 가는 줄 알았어요. 물론 물길로 가면 빠르긴 하겠지만…… 인원이 조금 많지 않나요?”

“누나 님은 아직 차이엘드의 항구에 방문하신 적이 없는 것 같군요.”

“차이엘드 항구?”

“네. 서쪽에 있는 것들 말고 동쪽의 항구 말입니다.”

차이엘드 공작가가 하일 제국의 노른자 땅들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항구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여러 개라니.

‘이 집안은 대체……’

아멜은 오늘도 차이엘드의 부에 기함했다. 항구가 개인 소유일 수도 있나? 차이엘드라면 가능하리라는 결론만 나왔다.

“그럼 배를 타고 가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물길로 켈트만의 항구에 다다른 다음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마차로 켈트만의 수도까지 이동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차이엘드만의 여정이라면 모를까, 대규모의 사신단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인원이 많으면 여러 척의 배를 써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자잘한 사고가 날지도 몰랐다.

“카일, 굳이 육로가 아닌 수로를 택한 이유가 있나요?”

“지금은 전경이 아름다울 때라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카일은 싱겁게 대답했다. 하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새끼 이름이 마라바스 라이델이던가.’

육로는 경제적이고 대중적인 경로였다. 이동 시간도 돈이 배로 드는 수로와 큰 차이가 없었다. 군데군데 여관과 역참이 준비되어 있어 일정을 짜기에도 수월하다.

하지만 육로로 움직이는 것은 암살이나 피습의 위험이 있었다. 마라바스라는 수상쩍은 침입자가 아멜을 눈에 담는 것을 본 지금, 카일은 급습의 여지를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허니문의 모든 것>에 올해 신혼여행 트랜드는 크루즈 여행이라 나와 있기도 했고.’

게다가 선대 차이엘드 공작의 취미 중 하나가 범선 수집이었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수집한 배라면 분명 화려하리라. 누나에게 어필하기 딱 좋았다.

“누나, 슬슬 출발……”

산뜻하게 웃으며 말하던 카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클레어와 아멜이 서로를 껴안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마차에서 내린 아멜은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이런 미친…….’

대한민국에서 살 때, 캠핑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차 안에 침대도, 조리 시설도 있는 차라고 했다.

스포츠카나 기타 자동차에 욕심이 없던 그녀였지만, 여행에 유용할 것 같은 캠핑카는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유람선은 캠핑카 따위와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차이엘드의 문장이 박힌 이 거대한 범선은 마치 호화로운 저택을 물 위에 띄워놓은 듯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이런 건 처음 봐요. 이것도 카일 거예요? 황실 게 아니라?”

황실은 이런 물건을 소유할 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려던 카일은 어딘가에 있을 나디아 공주를 위해 말을 바꾸었다.

“물론.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얼른 올라가 보고 싶어요. 그래도 되죠?”

아멜은 비행기를 처음 타본 사람처럼 폴짝폴짝 갑판으로 향했다.

그녀를 뒤따르던 바네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각자의 마차를 이용해 항구에 도착한 사신단의 일원들 또한 아멜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런 배를 꺼내는 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텐데. 하여간 차이엘드 놈들은 마님에게 미쳤어.’

바네사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비단 차이엘드만의 일이 아니었다.

아멜이 사신단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그레첼 영애와 레이나 영애가 사신단에 자원했다.

담당 관리는 어린 영애들에게는 일정이 험난할 것이라고 누차 말했지만 둘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때의 빚을 갚고 싶다며 졸랐다.

아멜의 황궁 출입 시중을 들던 바네사는 우연히 그 광경을 목격했었다. 레이나 영애와 그레첼 영애가 관리를 상대로 떼쓰는 모습을.

‘성격 지랄 맞던 레이나 영애까지 꼬시다니. 다이앤 영애도 장난 아니란 말이지.’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아멜은 레이나 영애에게 편지를 보내, 영애는 어리니 여정에 참가하지 말라는 뜻을 전했다.

레이나 영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기분이 상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답장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알겠어요. 다이앤 영애의 뜻이 그렇다면 따를게요. 확실히 저보다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레첼 영애가 여정에 더 도움이 되겠죠. 부디 몸조심하시고, 다녀와서 재미있는 얘기 들려주세요.]

목욕 중이던 아멜에게 편지를 읽어주던 바네사는 몇 번이나 헛웃음을 지었다. 레아니 영애. 그 쪼그만 여자애가 남도 챙길 줄 알았던가.

‘하여간 다이앤 영애는 주변 사람들 물들이는 데 뭐 있어. 나니까 안 넘어가는 거지 정말 타고났다니까…… 어라?’

시야에 마님이 없다. 바네사는 들고 있던 짐을 몽땅 내려놓고 황급히 아멜을 찾아 갑판을 내달렸다. 아멜은 뱃머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팔을 활짝 벌리는 이상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휴, 정말! 마님! 뭐 하시는 거예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시려고!”

“어머, 방금 내 걱정해 준 거예요?”

“허 참…… 누가 마님 걱정을 했다고 그래요?”

바네사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습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식힐 즈음,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켈트만의 수도, 그 중앙에 있는 거대한 궁전.

켈트만의 선조는 대낮처럼 밝은 영광이 있으라는 뜻에서 궁전의 이름을 백주라 짓고 그 우두머리를 백주라 칭했다.

그러나 지금의 백주궁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욕망만이 흘러넘쳤다. 모두 백주궁의 중심에서 새어 나오는 것들이었다.

“하일 제국의 사신단이 출발했다는군. 늦어도 열흘 후에는 이곳에 도착하겠지.”

켈트만의 현 수장, 지디마가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그의 시선은 제 뒤에 펼쳐진 병풍을 향해 있었다.

시중을 모두 물린 탓에 백주의 집무실은 고요했다. 그러나 지디마는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듯 잠시간 침묵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자 그는 풍채에 걸맞은 호방한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봐, 가고일 백작. 너무 죽은 듯이 조용히 있지는 말게나. 그러다 자네가 정말 죽기라도 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 아닌가.”

그는 병풍 뒤에 서 있을 가고일 백작을 향해 말했다.

험한 농담은 본래 북방 민족의 문화였지만 가고일 백작은 그 언사가 섬뜩하기만 했다.

하일 제국에서 모시던 황제도 성군은 아니었지만 야욕에 사로잡힌 지디마는 더했다.

그는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자를 가차 없이 잘라내는 부류의 남자였다.

게다가 최근에는 국내외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덕에 정신까지 오락가락해 폭군 중의 폭군이 따로 없었다.

살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니 약 두 달 전, 백주궁에 처음 들어섰을 때가 떠올랐다.

사형 집행일 새벽, 가고일 백작은 그간 황궁 생활을 하며 매수해둔 기사 하나의 도움을 받아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기사는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에게 평생 약을 대주겠다는 제안을 떠올리며 목숨을 바쳤고, 덕분에 야반도주에 성공한 가고일 백작은 깔끔하게 그를 잊었다.

‘같이 갇힌 내 가족들도 버리고 왔는데 남의 가족까지 챙길 여력은 없어.’

새벽시장에 물건을 대러 움직이는 마차에 쥐새끼처럼 숨어 탔다. 이마에 찍힌 죄인의 낙인 때문에 지천에 어둠이 깔린 밤에만 이동할 수 있었다.

켈트만과 하일의 경계가 되는 강가의 기슭에 도착했을 때, 가고일 백작은 초주검이 되어 있었다.

몸도 온전치 않은데 뱃삯도 없어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육로가 있겠지만 어두워져야만 이동할 수 있는 죄인의 몸이니 걸리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그의 눈앞에 쇠와 나사를 조립해 만든 손이 살그미 뻗쳐 왔다.

“받아라. 이 스크롤을 사용하면 곧장 켈트만의 수도로 갈 수 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무덤덤했다.

가고일 백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그를 빤히 살폈지만 아무리 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동 마법 스크롤은 값비쌀 텐데, 이런 걸 왜 내게…… 이, 일단 고맙게 쓰겠소. 성함이?”

허둥지둥 양피지를 펼치며 묻자,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라바스 라이델.”

그의 도움 덕분에 가고일 백작은 목숨을 잃지 않고 켈트만의 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백주궁에 들어오게 되자 모든 것이 수월했다.

켈트만의 문무 대신과 지디마는 하일 제국 황제가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니던 그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봤다.

이마에 찍힌 반역자의 낙인은 그들에게 있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 뿐이었다.

“백주를 뵙니다. 추레한 몰골이라 면목이 없습니다만,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습니까?”

하일의 모든 것을 아는 가고일 백작과 하일을 집어삼키고 싶어 안달이 난 지디마의 협력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가고일 백작. 내 생각해둔 묘책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게.”

회상에 잠겨 있던 가고일 백작에게 지디마가 말했다. 야심만만한 그의 얼굴은 어딘가 밝기까지 했다.

“하일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차이엘드이지 않은가. 원래 인질로 잡으려 했던 사신단도 차이엘드가 합류해서 건드릴 수 없게 되었고.”

“……그러합니다.”

“그럼, 그 괴물 공작을 우리 쪽으로 포섭하면 될 것이 아닌가.”

“예?”

지디마는 차이엘드가 사신단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그를 포섭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백주궁을 탈탈 뒤진 끝에 그는 어미가 누구인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 제 막내딸이 적당히 자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침 내 막내딸이 열일곱이라고 하더군.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지.”

가고일 백작은 차이엘드의 장인이 되어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상상을 하는 지디마를 멍하니 바라봤다.

괴물 공작과 혼담을 주고받는다는 건 괜찮은 작전일지도 모른다.

‘아멜리아 다이앤이 없었다면 말이지.’

아멜을 건드렸다가 차이엘드에게 호되게 물린 전력이 있는 가고일 백작은 등줄기가 서늘함을 느꼈다.

“아니 됩니다, 백주시여. 차이엘드 공작에게는 약혼녀가……”

“약혼이냐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을. 듣자 하니 별 볼 일 없는 여자라던데. 이익대로만 움직이는 괴물 공작이라면 내 딸과의 혼담을 우선시할 것이야.”

가고일 백작은 자신만만한 지디마의 기세를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아직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약혼녀에게 얼마나 빠져 있는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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