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차이엘드의 범선은 호화로운 연회장과 편안한 객실, 심지어 서재까지 갖추고 있었다. 요리사들만 수십 명이 탑승했으며 모든 것이 최상급이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으나 어쨌든 황궁에서 나고 자란 나디아 공주도 거대한 배에 감탄할 정도였다.
‘차이엘드가 이 정도 부를 가졌으니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꼼짝 못 하신 거겠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의 범선을 마구간의 말 부리듯 아무 때나 꺼내 쓸 수 있는 것이 차이엘드 공작이었다.
나디아 공주는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서 질리도록 들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부와 명예는 물론 냉철한 판단력과 잔인한 성정을 지닌 괴물이라고.
처음 차이엘드 공작과 그 약혼녀가 사신단에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디아는 제 신변이 조금은 안전해진다는 안도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꼈다.
‘괴물 공작은 어떤 사람일까.’
아멜리아 다이앤과 몇 차례 티타임을 가졌을 때 얼비쳤던 모습으론 괴물이라는 이명이 연상되지 않았다. 그는 다정했고, 상당한 사랑꾼으로 보였다.
‘하지만 형제들을 죽이고 공작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지. 그에게 밉보여서는 안 돼.’
어떻게 해서는 켈트만에서의 여정을 마치면 분명 하일 황실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행히 차이엘드의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는 방법이라면 알고 있었다.
‘켈트만에 가면 다이앤 영애와 사적인 만남을 많이 가져야겠어.’
막 결심을 마친 그녀에게 선장 스타벅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불퉁했다.
“공주님께 보고드립니다. 바람과 물결이 따라준 덕에 예정보다 일찍 정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그리 알고 있지.”
“……예, 공주님.”
스타벅은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장차 차이엘드의 안주인이 되실 누나 님께선 ‘고마워요, 스타벅 선장. 덕분에 편안했어요.’ 하고 친절한 인사말을 건넸건만!
‘차이엘드 공작 부인께서 어서 사교계를 휘어잡으셨으면 좋겠군.’
그는 어딘가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조타실로 돌아갔다.
***
드디어 켈트만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의 차이엘드 별장에서 하루를 보낸 우리는 백주궁이 있는 켈트만의 중심부로 향하기 위해 마차에 올랐다.
당연히 다른 귀족 영애와 한 마차를 타고 가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카일이었다.
“단둘이 있는 건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누나.”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던 하일드 집사장과 바네사는 이미 매수된 것인지 그림자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웃겨. 어젯밤에 모닥불이 약하다는 핑계로 제 방에 들어온 건 누구였더라?”
“감기 걸리실까 봐. 북부는 낮에도 밤에도 춥습니다.”
“날씨 때문이 아닌 것 같던데.”
카일은 도통 모르겠다는 듯 뻔뻔하게 굴다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제 몸에 기대도록 했다. 편안하고 포근해서 그대로 있기로 했다.
원래는 마차에서 켈트만에 대한 책을 읽으려 했지만 켈트만은 비포장도로가 많은지라 멀미가 나서 포기했다.
“카일. 켈트만에 대해 잘 알아요?”
“어느 정도는. 차이엘드는 켈트만의 목재와 철광석 사업에 깊게 관여하고 있습니다.”
“목재와 철광석 사업은 켈트만의 족장 소유가 아니었나요?”
순간 카일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벌써 가문의 사업에 관심을 보이신다는 건…… 역시 미래의 차이엘드 공작부인이라는 자각이 있으신 건가.」
「……세상에 내 편이 생긴다니.」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몽글몽글해지는 미소였다.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차이엘드는 그 목재와 철광석을 독점해 판매합니다.”
“그럼 카일은 켈트만에게 밉보이면 안 되겠네요? 독점권을 잃을 수도 있을 테니까.”
“켈트만의 목재는 질이 좋긴 하지만 그 정도 수준의 목재는 하일 제국에도 많습니다. 생산량에 비해 내수가 적습니다.”
“켈트만에서는 자국의 목재가 안 팔린다는 얘기죠? 쌓이는 재고를 사가는 게 차이엘드라는 거고. 그럼 켈트만 입장에서는 카일이 우수 고객이겠네요?”
“그렇습니다. 철광석의 경우, 불순물이 너무 많아 제련하지 않으면 이용가치가 없습니다. 문제는 켈트만에 그만한 제련 기술자가 없다는 건데…….”
“아, 알았다. 철광석을 사다 차이엘드에서 가공하는 거죠? 제련된 철광석을 팔면 차이엘드의 이윤이 상당하겠어요.”
“이윤은 상당하지만 켈트만에서의 사업은 예민해서 주기적으로 현장을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런 일이 벌어질 때라면 더더욱.”
카일은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광부로 보이는 남자들이 곡괭이 자루를 바닥에 내리찍으며 무언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날이 추운데도 그들은 술을 들이켜며 행진을 이어갔다. 상당히 긴 행렬의 모두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수도로 향하는 시위 행렬인 것 같은데 광산 쪽에 무슨 일이 있나요?”
“조사한 바에 따르면 켈트만의 백주궁 측에서 임금 지급을 미루고 있다고 합니다. 차이엘드와는 관련 없는 일이지만 확인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저 사람들이 카일에게 불만을 품는 일은 없을까요?”
“지금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카일의 미소는 누구도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긴. 나라의 돈줄이라는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 거래 대금 지급 사실을 광부들에게도 알려 왔습니다. 광물을 배로 실어 나르는 것이야 그들도 봐서 알 테고. 저들의 분노는 확실히 백주궁을 향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카일은 저를 걱정해주는 것이냐며 나를 꼭 끌어안았지만 내 안도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지만 카일리안 차이엘드에게는 적이 너무 많았다. 원작을 읽었기에 염두에 두고 있던 쪼렙 악역 베르드나 악역 서브남 마라바스는 정직한 적에 속했다.
카일의 진짜 적들은 형체가 없다. 무언가를 넘치도록 가져본 적이 없는 나였기에 처음에는 카일을 향한 타인들의 적의가 어디에서 오는지 몰랐다.
그러다 깨달았다. 카일을 향한 적의는 그저 자신보다 많이 가진 자에 대한 질투와 시기, 분노라는 것을.
마침 형제들을 죽였다는 소문까지 있으니 카일을 미워하는 일은 쉬웠다.
‘다행히 베르드는 한풀 꺾인 것 같고. 마라바스는…… 조심해야 해. 어디에서 급습해올지도 모르니.’
아무튼 카일이 전쟁을 일으키고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갈 여지는 차고 넘쳤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세뇌해둘 필요가 있다. 나는 카일의 양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춘 다음 입을 열었다.
“카일.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게 뭔지 알아요?”
“…….”
「갑자기 이런 고백을 한다는 건 이젠 남이 들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내 곁에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카일의 사고는 전혀 다른 쪽으로 뻗어가고 있었다. 나는 손을 꼭 깍지끼며 말했다.
“러브 앤 피쓰. 사랑과 평화예요.”
“……제가 아니었습니까?”
그래, 이 맥락이다.
“카일. 평화 없이는 사랑도 없어요. 전쟁이라도 난다면 서로의 안부를 걱정하느라 사랑할 시간도 없을 거라고요.”
“…….”
“게다가 카일은 공작이니 전쟁이 나면 모범을 보여야 할 것 아니에요? 카일이 참전하기라도 하면 저는…….”
말끝을 흐리는 것으로 말을 마쳤다. 카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곱씹다가 물었다.
“평화가 유지되면 저를 쭉 사랑해주신다는 말입니까?”
“음…… 맥락상 그렇죠. 평화 없이는 사랑도 없으니까요.”
카일은 괜한 걱정 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그런 건 걱정 마십시오, 누나. 평화 유지하는 데 돈 얼마 안 듭니다.”
***
켈트만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주궁. 백주 지디마는 제 잔에 술을 따르는 막내딸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규수라고 부르기엔 무예와 책을 더 좋아하는 왈가닥이었지만 혈기왕성한 사내를 휘어잡기에는 충분한 미색이었다.
“리엔. 이 아비의 말을 잘 듣거라.”
“……예.”
지디마의 기대와 달리 리엔은 얌전을 떠느라 이미 지친 상태였다.
늘 질끈 올려 묶는 머리를 땋아 내려 동백꽃으로 장식한다거나, 가슴이 부각되는 전통 드레스를 갖춰 입는 일은 지루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서 빨리 검술 훈련을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일전에 차이엘드 공작을 보았던 것을 기억하느냐?”
“예.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리엔은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면 되도록 빨리 잊으려 했다.
그러나 카일리안 차이엘드라는 남자는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존재감은 단연코 리엔이 살면서 봐 왔던 사람들 중 으뜸이었다.
‘무시무시한 남자였지. 괴물이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만큼.’
갓 성인이 된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위압적인 데다 통솔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걸음이나 백주를 면전에 두고도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 꼭 저는 태어날 때부터 대부호 차이엘드의 수장이 될 몸이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스스로 수족을 자처하며 발에 머리를 조아리던 자들은 얼마나 많던가. 그 아우라보다 머리와 계산, 협상력이 더 뛰어나다는 사실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아버지, 차이엘드 공작의 이야기는 갑자기 왜…… 아, 사신단이 오늘 도착한다고 했지요?”
“사신단도 사신단인데 말이다. 나는 네가 차이엘드의 안주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허나 그에겐 이미 다이앤 가의 약혼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약혼은 본래 쉽게 허물어지는 약속이다. 네가 찬양하는 페르슈 다이앤과는 먼 친척이라고 하더군.”
먼 친척? 병풍 뒤의 가고일 백작은 의아해했으나 지디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혼기가 아니냐. 차이엘드의 안주인이라면 모든 여인들이 탐내는 자리이고. 네가 차이엘드 공작의 마음을 얻어낸다면 켈트만에도 좋은 일이지.”
“그 말씀은……”
“네가 사랑하는 이 땅을 위한 일이다. 그를 유혹해 하룻밤으로 미래를 약속받거라. 그리하면 지금 백주궁에 닥친 위기도 수월히 넘길 수 있을 것이야.”
“아버지, 저는……”
“내 네게 내릴 명령은 다 했으니 이만 나가 보거라. 곧 도착할 사신단을 네가 제일 먼저 맞는 것이 좋겠구나.”
“…….”
리엔은 고개를 숙이고 종종걸음으로 백주의 방을 나섰다. 실수인 척 아버지가 아끼는 난초 화분을 두어 개 엎고서야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나라를 이리 만든 것은 아버지면서, 왜 제게 이런 명을 내리시는 겁니까.’
그들의 분노가 백주궁으로 향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병풍 뒤에 감춰두고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조언자의 탓이 컸다.
그런데 그 일을 수습한다며 해낸 생각이 혼맥이라니.
‘망할. 다음 생에는 공주가 아니라 왕자로 태어나야지.’
공주는 궁에서 내쫓기면 사내놈들 구경거리나 되는 신세였다. 내쫓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딸의 앞길을 정해주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
‘하는 수 없지.’
기회는 기회이니 차이엘드 공작을 이용해 자유를 얻으리라. 리엔은 하녀들을 불러 최대한 아름답게 치장한 다음 사신단 도착 시간에 맞춰 뜰로 향했다.
사신들을 맞기 위해 열 맞춰 대기하고 있던 문무 대신들은 왈가닥 공주의 치장에 놀란 모습이었다.
“무얼 그리 보느냐.”
“아, 아닙니다. 저기 마차가 오는군요.”
마차들이 하나둘 들어오는 가운데, 차이엘드의 문양이 박힌 마차가 찬찬히 멈춰 섰다.
‘괴물 공작은 저 마차에서 내리겠구나.’
리엔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후, 하인들이 마차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렸다. 그러나 차이엘드 공작은 내리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냐.”
리엔이 묻자 켈트만의 장정 둘이 재빨리 차이엘드의 마차로 달려갔다. 하일드는 난감한 얼굴로 마차를 똑똑똑 두드렸다.
잠시 후.
“하일드. 한 바퀴 더 돌라고 했을 텐데.”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제 입술에 옮겨 묻은 입술연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대 차이엘드 공작의 등짝을 찰싹찰싹 때렸다.
“카일, 얼른 내려요! 얼른!”
켈트만의 모두가 그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