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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58화 (58/134)

#58

언제나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던 수하들만 데리고 움직이던 카일리안 차이엘드였다. 그는 정점에 홀로 군림한 제왕처럼 늘 동행을 두지 않았다.

그와 같은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렸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건만,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번쩍거리는 차이엘드의 약혼반지까지 끼워져 있었다.

‘저 여인이 소문의……!’

‘괴물 공작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대단한 미색이긴 하지만…….’

켈트만 측은 요 몇 년 사이 카일에게 무슨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추측하느라 바빴다.

여인이 미색으로 괴물 공작을 유혹한 것이라면 충직한 하일드 집사장이 그녀를 미덥지 못하게 여길 터.

하지만 하일드는 마차에서 폴짝 내리는 아멜에게 두꺼운 방한 망토를 손수 대령했다. 깃을 여미고 리본을 묶어주는 일은 괴물 공작이 자처했다.

하일 제국의 사신단 중에서는 특별 대우를 받고 있는 당사자, 아멜리아 다이앤만이 일련의 행위에 낯을 붉혔다.

“카일.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

“약혼자가 약혼녀 챙기는 게 뭐 대수라고.”

꼼꼼히 망토를 여민 카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열 맞춰 기다리고 있는 켈트만의 대신들을 살폈다. 대부분이 아는 얼굴이었다.

모두가 먼저 알은체를 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단 한 명만 빼고.

“하일 제국의 사신단이 백주궁에 도착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카일은 리엔 공주의 낭랑한 목소리와 화사한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릴 적 저를 보고 ‘힉, 괴물!’하고 중얼거리는 것을 몰래 들은 적이 있었다.

‘……좋은 기억은 아니군.’

어차피 비즈니스적인 관계이니 부러 살갑게 굴 필요는 없었다. 카일은 그들이 알고 있던 제 모습 그대로, 형식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저게 내가 아는 괴물 공작의 얼굴인데…….’

리엔은 물음을 삼켰다. 제 약혼녀를 볼 때면 어찌 저리 따스하단 말인가. 눈가를 사르르 접으며 미소짓는 게 꼭 빙산도 녹일 것 같았다.

리엔은 개의치 않기로 하고 계단을 내려와 사신단의 앞에 섰다. 가장 먼저 사신단에 자원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사신단의 대표를 맡은 아멜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나디아 공주님이랑은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다르잖아?’

사생아라는 이유로 이름뿐인 공주 지위에 체념하며 살아온 나디아와는 달리, 눈앞의 리엔 공주는 그 풍채가 대단했다.

아멜은 닥치는 대로 구했던 일자리에서 만난 수많은 사장님들을 떠올렸다. 리엔 공주는 이마에 갑(甲) 자가 쓰여 있는 것 같았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영광스러운 초대해 응하게 되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리엔 공주님.”

“예를 거두세요. 그대가 다이앤 백작가의 아멜리아인가요?”

“그러합니다.”

“머무는 동안 편안하시길. 오늘은 여독이 있을 터이니 손님들을 안내하고 편히 쉬도록 조치하라고 부왕께서 명하셨습니다. 여봐라, 손님들께 방을 안내해드려라.”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미리 배정된 대로 하일의 사신들은 안내했다. 제 차례를 기다리는 아멜에게 리엔이 불쑥 다가왔다.

“귀부인들과 공주님의 처소는 제가 직접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백주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리엔은 살짝 뒤돌아 카일에게 싱긋 웃어주곤 아멜과 나디아 공주, 그레첼 영애를 데리고 떠났다.

리엔은 몰랐다. 약혼녀와 숙소를 따로 쓰게 되었다는 이유로 카일의 기분이 무척 상했다는 것을.

***

“자, 이쪽입니다. 사전에 협의된 대로 레이디들을 위한 경호는 얼마든지 들여도 괜찮아요.”

리엔 공주가 사근사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미소로 화답하며 머물게 될 방을 둘러보았다.

내 방은 나디아 공주와 그레첼 영애의 방 사이에 있었다. 시녀 자격으로 따라온 바네사도 내 방 안의 작은 쪽방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추운 기후 탓에 커다란 모닥불이 방의 가운데에 있었고, 불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진 담요나 조각상들이 곳곳에 자리했다.

‘내가 책에 빙의해서 이런 호사도 누려보는구나.’

언젠가 여행 잡지에서 본 아늑한 전통 가옥을 연상시키는지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철없이 기분이 들떴다.

“다이앤 영애, 방이 마음에 드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멋진 방이에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편히 쉬시길. 여독이 풀릴 즈음 자리를 마련할 테니 차 한잔 같이해요. 검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즐겁겠지요.”

리엔은 내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놓았다. 순간이지만 속마음이 들려왔다.

「그 다이앤 핏줄이라니.」

「그건 그렇고…… 아버지, 조금 힘들겠는걸요?」

아버지라면 켈트만의 족장을 말하는 것일 텐데. 힘들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기고 리엔은 방을 나섰다.

바네사는 기다렸다는 듯 폭신한 침대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 대자로 팔다리를 휘적이며 뒹구는 게 아주 행복해 보였다.

“바네사. 거기 내 침대거든요? 쉬는 건 그렇다 쳐도 신발은 좀 벗고 올라가지?”

바네사는 누운 채로 신발을 휙휙 벗어던지며 투덜댔다.

“아, 예예.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제가 얼마나 피곤한지 마님은 모르실 거예요. 죽는 줄 알았다고요.”

“여정이 많이 힘들었어요? 간식거리라도 좀 내오라고 할까요?”

“여정이나 간식 문제가 아니라…… 공작 전하께서 마차 여행 내내 영애를 안 놔줬잖아요. 영애 본인은 덕분에 아―주 즐거운 여정이었겠지만.”

“큼, 큼……”

“그 비좁은 뒷좌석에 아버지뻘인 하일드 집사장이랑 나란히 앉아 야릇한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얼마나 민망한지 알아요? 서로 눈이라도 마주치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고요.”

민망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초호화 호텔 뺨치는 객실을 함께 썼던 배 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마차로 이동할 때에도 카일은 나와 찰싹 붙어 있으려 애를 썼으니.

나는 방을 둘러보는 척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투덜거린 바네사는 이해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 영애가 잘못한 건 아니긴 하죠. 혈기왕성한 공작 전하께선 놔달라는 말도 더 가까이 와 달라는 말로 이해하니.”

“바네사, 누가 듣겠어요. 정말!”

“키스하다가 영애 발목을 들어 올릴 때는 어휴…… 종교도 없는 제가 제발 진도 더 나가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했네요.”

“알았어요. 내가 미안해요. 침대에서 실컷 뒹굴거리다 나와요. 짐 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도저히 저 나불거리는 입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나는 슈트케이스에서 드레스를 꺼내 옷장에 걸었다. 묵묵히 짐을 정리하고 있으니 바네사가 다가와 함께 짐을 풀었다.

“우리 마님은 천성이 부지런하시지.”

“더 쉬어도 돼요. 저 때문에 좀…… 피곤하긴 했을 것 같으니.”

“알아주시니 다행이네요.”

기다렸다는 듯 냉큼 옷을 내려놓은 바네사는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훑었다. 이젠 제법 체계적으로 스케줄 관리까지 하나 보다.

“켈트만에 한 달은 머무를 터라 자세한 일정이 잡히진 않았어요. 굵직한 것만 말해드릴게요.”

“그래 줄래요?”

“이번 주에는 무도회가 있어요. 둘째 주에는 사냥대회가 있고, 셋째 주에는 사냥감을 가지고 수렵제를 벌이겠죠. 공식 일정은 이게 다예요.”

사이사이에 리엔 공주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자잘한 약속이 잡힐 테니 일정은 그리 여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사전에 백주궁이나 이곳의 풍습에 대해 공부해둔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 일정에 벼락치기까지 했으면 죽어났으리라.

“무도회에는 누가 참석하죠?”

“무도회는 켈트만에 초대받은 각국의 사신들이 다 참석할 거예요. 켈트만의 귀족들도 참여하겠죠. 어쩌면 트라이하의 3황자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리던 나는 ‘트라이하의 3황자’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다. 바다 건너 트라이하 제국의 3황자라면 마라바스와 함께 원작의 메인 악역이 아니신가.

하일 제국이 거대한 규모의 사신단을 파견한다고 공포한 이후로 트라이하 제국에서도 켈트만에 사신을 보낸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황자가 걸음한다는 건 처음 들었다.

“트라이하에서 파견한 사신단에 3황자 분이 계신다고요?”

“아뇨. 표면상으로는 그저 중상급 귀족들인데…… 영애는 트라이하의 3황자에 대한 소문도 몰라요?”

알 리가 있나. 책에도 그런 건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뭔데요?”

“트라이하의 3황자는 엄청난 바람둥이래요. 동복 여동생이 죽고 난 후로부터는 아랫도리를 망나니처럼 놀린다던데. 그래서 파티가 열리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나타난대요.”

“그냥 소문일 뿐이겠죠?”

내가 거의 애원하듯 묻자 바네사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사실 아레티스트에서 귀부인 경호 일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3황자를 봤어요. 국경은 대체 어떻게 넘었는지 모르겠지만 남작가의 파티에 떡하니 참석하던걸요?”

가슴이 철렁했다. 이타르 드 트라이하. 트라이하 제국의 3황자. 원작에서 카일이 하일 제국을 파멸시킨 후 바네사와 맺어지자마자 등장하는 악역이다.

이타르가 나오는 장면은 분위기가 심각하게 어두워져서 페이지를 뭉텅이로 넘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정도로 막돼먹은 악역은 처음이었지.’

원작의 이타르는 트라이하 제국의 황태자 선별 과정에서 간계에 의해 여동생을 잃는다. 황태자라는 자리도 결국 1황자에게 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미친놈이 되었지.’

연금술을 기반으로 강력한 힘을 축적한 이타르는 무리를 끌고 반역을 일으켜 황태자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무언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파괴하고 죽이는 냉혹한 성격이 된 그는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건설을 업으로 삼게 되는데, 하일 제국도 그 대상이었다.

‘후반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 차이엘드 공국과 길길이 날뛰는 이타르 얘기가 전부였지.’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이타르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싫어했다.

자신에게 툭하면 반기를 드는 트라이하의 귀족들이 차이엘드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어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일단 카일이랑은 절대 만나게 하면 안 돼. 안 그래도 경계할 놈이 하나 더 있는데.’

마라바스 라이델.

나는 아직도 그가 나를 볼 때 보였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내 목을 겨누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할 수 있었을까.

원래대로라면 마라바스가 먼저 등장하고, 카일이 마라바스를 처리한 후 이타르가 등장하는 식이었다.

‘타임라인이 꼬여서 악역 둘을 동시에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게다가 마라바스는 이타르를 알 거야. 둘이 합심하기라도 하면 폭망이다.’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세계관 최강자인 바네사가 경호원으로 붙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영애, 도와줄까요?”

“아니에요, 바네사. 누워서 푹 쉬어요. 거기 놓여 있는 과자도 좀 집어 먹고.”

“뭐야. 갑자기 왜 이래요?”

나는 엉덩이 걸음으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바네사의 옆에 벌렁 누워버렸다.

“바네사가 같이 와줘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요.”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세요? 낯간지럽게…….”

이때는 몰랐다. 징그러운 소리 말라며 진절머리를 치던 바네사가 나 대신 칼에 베일 상황이 생길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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