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한편, 카일은 아멜과 다른 이유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차에서 내릴 때부터 손님을 접견하는 지금까지 줄곧 험악했다.
‘백주궁은 눈치가 없나? 방이 남아돌아?’
그간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대륙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아멜리아 다이앤이 차이엘드의 피앙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켈트만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하지만 아무도 둘에게 한 방을 준다는 기특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점수를 따고 싶어 선물을 싸 들고 만남을 청하는 자들이 줄을 섰지만 그뿐이었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이는 저희 백작가에서 보이는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저, 저희 영지에서만 나는 벌꿀도 부디 받아주시지요.”
카일은 영업용 미소를 머금은 채 적당한 인사말을 건네곤 그들을 돌려보냈다.
숙소에 도착한 손님에게는 쉴 시간을 주는 것이 도리이건만, 켈트만의 귀족들은 1초가 멀다 하고 알현을 청했다.
‘그만큼 켈트만의 정세가 불안하다는 건가. 대체 백주가 무슨 일을 벌였기에.’
짐작해 알고 있긴 했지만 광부 임금 미지급 건이 심각한 듯했다.
‘무리해 각국의 사신들을 초대한 것도 협상의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겠지.’
이렇게 제 호의를 원하는 자들이 많은데 약혼녀와 다른 방을 쓰게 되다니. 농락도 이런 농락이 없었다.
손님을 모두 돌려보낸 카일은 소파에 느른히 기댔다. 약혼녀가 보고 싶어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쯤이면 중증은 중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쑥 방에 찾아갈 수는 없었다. 한가한 사람 취급을 당할 생각은 없다.
카일은 붉은 눈동자로 방을 샅샅이 훑었다. 짐을 풀던 자들의 손길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곧 그의 유능한 집사인 하일드가 산삼이라도 캔 것처럼 소리쳤다.
“전하! 누나 님의 장갑입니다! 마차에 두고 내리신 것 같습니다.”
“그럼 돌려 드리러 가야겠군.”
움직일 명분이 생겼다.
카일은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장갑을 챙겼다. 약혼녀가 어디에 짐을 풀었는지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두꺼운 검은 망토를 두른 카일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몇 번 와 보지 않은 백주궁의 구조가 머릿속에 훤했다.
“전하. 복도에는 켈트만의 경비들이 많다 합니다.”
그들에게 약혼녀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는 한가한 공작 이미지를 심어주는 건 별로 좋지 않은 방법일 터.
‘……창문이 성인 남자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크군.’
막상 창문 앞에 다다르니 고민이 많았다. 아멜의 방은 2층이었는데, 카일도 귀족인지라 체통이라는 것이 있었다.
물론 보는 이가 없었다면 넝쿨을 줴뜯으며 단숨에 벽을 타기 시작했을 테지만 이곳은 켈트만. 공작의 체면은 살려야 했다.
카일이 미간에 주름까지 만들어 가며 고민할 즈음, 창밖을 바라보던 아멜이 그를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연갈색 머리카락이 젖어 있다. 향기로운 꽃 냄새가 제 몸을 숨긴 관목 사이사이까지 닿았다.
약혼녀는 방금 씻고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창문 넘는다.’
눈빛에 드러나는 주인의 의지를 읽어낸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인간탑을 쌓기 시작했다.
카일이 가장 낮은 곳에 있던 무릎을 밟으려 할 때였다.
“공작 전하?”
카일은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휘어잡았던 넝쿨을 슬며시 놓았다. 리엔 공주. 그녀는 오늘따라 자신을 방해했다.
차이엘드의 인간탑이 언제 존재했냐는 듯 허물어졌다. 카일은 특유의 차가운 얼굴을 하고 말했다.
“우연한 기회에 또 뵙습니다.”
“…….”
리엔은 풋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여인들의 숙소에 찾아와 하인들을 밟고 창문까지 넘으려 했던 주제에 공작의 태도는 뻔뻔했다.
경비들에게 알린다면 작은 소동이 일겠지만 그리할 생각은 없었다.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체면 구기는 짓 하는 것을 목격한 것만 해도 재미가 쏠쏠했으니.
“창문을 넘어 약혼녀의 방으로 가시려 했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약혼녀가 두고 간 물건이 있어서 전해줄까 하고 들른 것뿐.”
“제게 주십시오. 다이앤 영애와는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니.”
“제가 직접 전해줄 생각입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
감사한다고 말하는 카일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랑에 빠진 뭇 사내들처럼 활활 타오르던 감정이 없었다.
이렇게 단단히 빠져 있는 남자를 어떻게 유혹하란 말인가. 리엔은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아버지의 요구를 상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쯤 되는 남자가 창문을 넘는 건 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공작인 줄 알았는데 꽤나 혈기왕성한 것 같았다.
아까의 그 불타던 눈빛이 나를 향한 것이었다면 진작 아버지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곰곰이 제 처지를 생각해 보던 리엔은 여러 활로를 뚫어두기로 했다.
“잠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이야기이길 바랍니다.”
카일이 턱짓하자 수하들이 물러났다. 리엔은 기둥의 그림자에 들어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부왕께서 그대를 유혹하라 했습니다. 하지만 창문까지 넘으시려는 걸 보니 부질없는 짓 같군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차이엘드에서 약혼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째 제대로 유혹하기도 전에 차인 기분. 리엔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저도 내키지 않았다는 말씀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이었지만 너무 터무니없었지요.”
“대화 즐거웠습니다.”
“잠, 잠깐! 할 말은 이제부터예요.”
리엔은 칼 같이 돌아서려던 카일을 겨우 붙잡았다.
“차이엘드 공작. 당신은 내 정보를 제값에 사줄 생각이 있나요?”
“차이엘드는 희소한 것에 항상 배의 값을 치릅니다. 공주께서 가진 정보가 귀한 것인지 아닌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아버지가 최근에 정체 모를 조언자를 들였습니다. 그자와 함께 거사를 꾸미고 있고. 더 자세한 걸 들으시려거든 제 방으로 가시지요.”
매혹적인 손짓이었으나 카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대답했다.
“스스로 귀한 정보라 칭하시기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유감입니다. 그 정보는 차이엘드 측에서도 미리 파악하고 있던 것입니다. 하일 제국에서는 이미 유명한 소문이기도 하고.”
“……”
“백주께서 최근 들어 영리한 방법으로 하일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도 그 조언자, 아니, 가고일 백작의 도움이 컸겠지요. 공주의 정보는 헐값에 지나지 않습니다.”
켈트만으로 떠나기 전, 이미 차이엘드의 정보부는 완전 가동 상태였다.
백주궁의 찬밥 신세이던 리엔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누나 방에 쳐들어가긴 그른 것 같고.’
발길을 돌리려던 카일은 리엔이 이를 부득 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께서 주신 정보는 헐값에 불과하지만 저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살고 싶으면 제 약혼녀에게 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제 흥미를 끌 만한 더 큰 거래를 제안하시든지.”
“…….”
“차이엘드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는 것도 기억하시고.”
카일은 아멜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던 창문을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리엔 공주가 저런 반응을 보인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가고일 백작이 백주궁 안에 있는 게 확실하군.’
***
표면적으로 하일 제국에서 온 사신들에게는 크게 주어진 업무랄 것이 없었다.
그저 켈트만의 영역에서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 ‘우리 사이 아직 좋아요’를 과시하는 것뿐.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오늘의 일정인 티타임은 사신 역할을 시작하는 첫걸음이라 할 수 있었다.
“바네사, 저 오늘 어때요?”
“마님이야 늘 예쁘죠. 왜 새삼? 제가 차이엘드 남매처럼 구구절절 찬사를 늘어놓기를 바라시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 켈트만의 티타임에 참석하기 괜찮아 보이나 묻는 거예요. 여긴 하일 제국이 아니잖아요.”
책에 빙의해 살고 있는 입장인지라 하일 제국의 티타임도 편안한 것은 아니었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참석하는 티타임은 긴장이 더했다.
‘켈트만의 예법을 구사하는 데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
어찌 되었든 베르드에게 큰소리 떵떵 치고 왔으니 역할은 해야 했다. 괜히 나 때문에 사신단 여성들의 평판이 상하는 일이 발생했다간 얼굴도 못 들고 다니리라.
‘내 돈과 명예에 손상이 올 수도 있고. 절대 안 돼.’
나는 약속받은 황실 백합 훈장을 떠올리며 다시 한번 복장을 점검했다. 모피 장식과 가죽 부츠, 긴 꼬리깃 장식이 눈에 띄는 켈트만 식 차림이었다.
‘활동적이고 편하긴 하네.’
의상은 이쯤 하면 되었다. 남은 건 대화나 예법. 예법은 클레어와 특별 훈련을 거쳐 완벽하게 익혀 두었으니 패스.
대화에서 크게 실수하지 않으면 괜찮으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갈까요, 바네사?”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티타임 장소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그레첼 영애나 나디아 공주님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이앤 영애, 그레첼 영애. 혹 리엔 공주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나디아가 무척 걱정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들어봤다마다. 어젯밤 차이엘드의 다른 고용인들과 수다를 떨다 들어온 정보통 바네사가 얼마나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마님. 리엔 공주 말인데요. 성격이랑 실력이 장난 아니래요. 검술에 환장했다던가? 아버지인 백주랑은 사이가 별로 안 좋은가 보던데.”
“그래요?”
“네. 성격도 특이해서 한 번 뭐에 꽂히면 돌아버린다나봐요. 아무튼 조심하세요.”
사실 리엔 공주의 특이한 성정은 원작에도 잠깐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녀는 활발하고 전투에 능한 전형적인 ‘진취적 공주님’ 유형이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입체적인 캐릭터시지.’
잠깐 언급되었던 그녀의 행적은 이렇다. 카일이 켈트만에게 파멸을 주문한 후, 지디마는 인구 밀집 지역을 짚으며 ‘누구든 이 지역들을 섬멸하면 원하는 것을 이뤄 주겠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그 지역의 생명체들을 싹 쓸어버린 게 리엔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한 지역의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다는 묘사는 특히 소름이 끼쳤다.
이렇게 만날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자세히 읽어두는 건데.
‘소원으로는 무예에 정진하고 싶으니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던 것 같아. 목적지 같은 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꽤 간절했겠지.’
어쨌든 리엔 공주는 실력을 가감 없이 발휘해 켈트만을 떠나 다른 곳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하던 기사는 이미 죽은 후였다나.
그것으로 작중 언급은 끝. 그러니 자세한 성정을 알 리가 없다.
“어머, 저기 계시네요.”
그레첼 영애가 내 주의를 환기했다.
그녀의 말대로 저 멀리에는 인형처럼 꾸미고 얌전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는 리엔 공주와 켈트만의 귀부인들이 보였다.
“자연의 기운이 충만한 오후를 함께 보내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일 제국 여러분.”
리엔 공주는 원작에서 언급된 것과 달리 고아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느릿하고 우아한 몸가짐으로 일어나 손수 우리 측 사람들 하나하나와 악수를 나누었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다이앤 영애. 검술에도 조예가 깊으시다고 들었는데 추후 시간이 되면 보여주시지요.”
“과찬이십니다. 리엔 공주님의 앞에서 보이기엔 부끄러울 뿐입니다.”
나는 적당히 답하며 도통 드러나지 않는 리엔 공주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그런데……
「저 손에 있는 게 차이엘드의 약혼반지…… 저걸 차지해야 한다니.」
「아냐. 그 괴물 공작이 야밤에 창문을 넘으려 했을 정도면 나한테 승산이 없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그 남자가 아버지의 병풍 뒤에 있는 한, 내게는 여길 떠나는 게 최선일 테니.」
‘그 사람’이라.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단번에 감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