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사형 집행일 새벽,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으로 향했다는 사실은 이미 하일 제국의 국민 대다수가 아는 풍문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일 줄이야.
‘리엔 공주가 말하는 남자는 분명 가고일 백작일 거야. 병풍 뒤라…….’
속마음을 읽는 아레테가 이런 식으로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기껏해야 상대가 나한테 해코지할 것을 미리 파악하고 막는 데 쓰일 줄 알았건만.
‘그나저나 리엔 공주의 아버지라면 백주잖아. 백주가 제 병풍 뒤에 가고일 백작을 숨겼다면……’
문득 젊은 왕이 병풍 뒤 숨겨진 방에 아리따운 여인을 숨겨 놓고 신하들 몰래 이런 짓, 그런 짓을 해댔다는 대하사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지만 일단 이건 패스.
‘가고일 백작이랑 백주가…… 아냐, 그런 관계는 아닐 거야. 착한 생각 하자.’
유력한 것은 역시 가고일 백작이 하일 제국의 내부 사정을 알려주면 백주가 그것을 이용해 하일 제국을 압박할 판을 짜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주 지디마는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
젊은 시절 그가 대단한 무장이었다는 것은 아버지께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 다 늙어서도 야망을 떨칠 줄이야.
가고일 백작을 다른 곳도 아니고 백주궁 한가운데의 병풍에 숨겼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파장이 결코 작지 않으리라.
하일 제국 측에서 알았다간 가고일 백작을 자국으로 데려가려 함은 당연하고, 그를 이용해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씌울 테니.
‘누명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 가고일 백작을 성 한가운데에 감췄다는 건 분명 그만큼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
머릿속에 전쟁, 파멸, 죽음 따위의 단어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형식적인 리액션과 디저트 집어먹기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차이엘드가 사신단의 일원으로 왔잖아. 지디마는 왜 카일을 제 편으로 포섭할 수 있다고 확신…… 설마.’
나는 한 떨기 꽃처럼 화사하고 산뜻하게 꾸민 리엔 공주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사신단을 가장 먼저 맞은 것도 리엔 공주였다.
‘나를 병풍으로 보시나.’
리엔 공주를 약혼녀도 있는 카일에게 떠넘길 생각인 게 분명하다.
리엔 공주가 내 약혼반지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 보면 분명……한데.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지?’
나를 제거해야 할 경쟁자로 점찍어두었어야 마땅할 리엔의 눈빛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저건 찍어눌러야 할 상대를 보는 눈길이 아닌데.
‘리엔 공주는 아버지의 명에 복종하기 싫은 건가?’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죄 없는 마을 몇 개를 쓸어버린 사람이 그런 유한 마음을 가졌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일단은 이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시나리오였다.
***
서로의 교양을 시험하는 듯한 티타임이 길게 이어졌다. 기죽어 아무 말도 못 할지 모른다는 예상과는 달리 나디아 공주도 제법 제 몫을 챙겼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일까.
대화 주제는 켈트만의 전통에서 시작해 하일 제국과의 동맹사를 잠깐 다루었다가 사신단의 일정으로 이어졌다.
모두의 관심은 자연스레 이번 주말에 있을 무도회에 쏠렸다.
“무도회는 귀한 손님들을 모시는 첫 자리이니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냥대회 이후 있을 수렵제보다는 규모가 작겠지만, 그래도 기대해주세요.”
켈트만의 귀부인이 웃으며 설명했다.
수장인 지디마는 하일 제국뿐만 아니라 주변의 다른 강대국과 약소국들에도 사신을 요청했는데, 이번 주말에 있을 무도회는 각국의 사신들이 처음으로 모이는 자리였다.
‘수련회로 치자면 입소식 같은 느낌. 제발 악역들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가고일 백작과 지디마가 무슨 시커먼 생각을 하고 있을지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악역이 더 등장하셨다간 끝장이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타국에서는 어떤 분들이 사신의 역할을 수행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살짝 귀띔해주실 수 있나요?”
“차이엘드의 피앙세께서 궁금해하실만한 사신단이라면 역시 트라이하 쪽이겠지요? 트라이하에서도 귀한 분들이 많이 오셨답니다.”
“귀한 분들이시라면 어떤?”
“듣자 하니 연금술과 주술을 이용해 만든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도 함께 왔다나 봐요. 영애도 시간이 나면 구경해 보세요.”
마법이 깃든 트라이하의 특산품이야 귀하고 비싼 것으로 하일 제국에서도 유명했다.
‘어머니가 주신 팔찌도 트라이하의 특산품이랬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정보는 아니었다.
이후 기나긴 티타임 동안 드라이하의 사신단에 대해 슬쩍슬쩍 떠보았으나 켈트만의 귀부인은 트라이하의 3황자가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
메인 악역께서 갑자기 등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다 들어 티타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인데 티 났던 것일까. 리엔 공주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물었다.
“다이앤 영애, 혹 트라이하에서 사신으로 오길 바라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혹시 남성분?”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아…… 하긴. 차이엘드의 피앙세께서 다른 남성분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겠지요.”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는 게 꼭 파고들 틈을 내 달라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리엔은 내게 살의를 드러내지 않았다.
무엇이 리엔 공주를 이렇게 만드는지는 모를 노릇이었지만 빈틈을 보일 생각은 없었다.
“아, 이 대화는 비밀로 해주시길 바라요. 공작 전하께서 들으신다면 오해하실 것 같아서.”
나는 천연덕스레 웃으며 구두코를 아주 살짝 움직여 켈트만 귀부인들의 속마음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딱 내가 의도한 반응.
「차이엘드 공작이 집착이 심한가? 그렇게 안 보이던데.」
「마차에서 내릴 때도 더 매달리는 쪽은 차이엘드 공작이었지.」
「다이앤 영애…… 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추수 연회 때나 여정 중에 본 것들이 많아서일까. 하일 제국 쪽 참석자들은 카일이 집착이 심하다는 말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나는 침묵으로 긍정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차를 마셨다. 슬쩍 본 리엔 공주의 얼굴은 무척이나 복잡해 보였다.
***
그날 밤.
“리엔 공주님. 백주께서 잠시 들르라 명하셨습니다.”
“……그리하지.”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리엔 공주는 한숨을 쉬며 팔뚝에 앉혔던 매를 날려 보냈다.
불편한 옷, 치렁치렁한 장신구와 함께 고된 일정을 마치고 이제 겨우 바람을 좀 쐬려는데 부르시다니.
‘뭘 물어보실지는 안 가봐도 알겠는데.’
분명 차이엘드의 피앙세에 대해 물을 것이고, 그 자리가 네 것이 되고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될 일인가. 차라리 사냥을 보내시지.’
제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면 뭐든 이뤄낼 자신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었다. 괴물 공작이 변해도 너무 변했기 때문.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게 더욱 답답했다.
리엔은 실수인 척 아버지가 아끼는 분재 화분 하나를 깨버리곤 백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예상대로 지디마는 흥미 반, 걱정 반인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그래. 성과가 있느냐?”
“존경하는 백주시여. 아직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줄로 압니다.”
“차이엘드 공작은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이지 않으냐. 그 시기에는 하룻밤으로도 사랑에 빠지고 말지.”
그 하룻밤은 아무래도 진작 물 건너간 것 같다고 말하려던 리엔은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 아버지가 저를 불렀을 때만 해도 괴물 공작은 다루기 까다로우나 결코 공략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괴물 공작의 기구한 유년기에 대해 곱씹을 때면 리엔은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백주궁 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 백주는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리엔의 전부였다. 그런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길 가던 궁녀들을 붙잡고 사랑을 갈구하게 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니가 영영 사라진 백주궁에서 리엔은 깨달았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새로운 것에 집착하기를 두려워한다. 누군가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면 자신이 파멸로 치달을 것을 알기에 역설적이게도 곁에 누군가를 두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되는 것이다.
제 집착을 받아내는 자가 자신을 떠나면 견디지 못할 것이라 겁먹으며 표면적인 관계만 유지하는 일은 씁쓸했다.
‘차이엘드 공작은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텐데.’
그런 그가 모든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면 그녀를 이기려 드는 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현명했다.
“최선을 다하거라. 네가 차이엘드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계획이 모두 틀어지니 말이다.”
지디마가 병풍 뒤쪽을 힐끗 바라보다 말했다. 리엔은 그 뒤에 누가 있는지를 떠올렸다. 사형 집행일 새벽 기적적으로 도주해온 가고일 백작.
그가 어떻게 이 먼 켈트만의 백주궁까지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는 켈트만의 정보부도 알 수 없었다.
가고일 백작 또한 자신에게 이동 마법 스크롤을 준 것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증언했으니.
‘저자를 끌어들였다는 건…… 아버지는 하일 제국을 노릴 생각이신가.’
그러고 보니 가고일 백작도 차이엘드에게 한 방 먹어서 사형을 언도받은 것이라고 했다. 차이엘드.
순간 리엔은 카일이 아닌 아멜리아 다이앤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체 뭘까? 전설의 기사 페르슈 다이앤과 같은 성을 사용한다는 것만 빼면 그 여자에게는 특별할 만한 게 없었다.
우아하고 관능적인 미인이기는 했지만 상대는 차이엘드 공작. 천하제일미도 질리도록 봐 왔을 것이다.
‘외모가 아닌가? 그렇다면 능력?’
아니, 이것도 아닐 것이다.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보다 더 능력 있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거나…… 역시 핏줄은 못 속이나?’
차를 마시는 척 고개를 숙이고 이맛살을 찌푸리던 리엔은 문득 아멜의 왼손을 기억해냈다.
오랜 시간 무예에 정진한 그녀는 차이엘드의 약혼반지에 박힌 것이 아레테의 결정임을 알고 있었다.
‘다이앤 영애가 아레테 보유자인 것 같긴 한데…… 차이엘드 공작이 고작 아레테 하나 가졌다고 반할 리는 없어.’
차이엘드가 어떤 가문인가. 그들은 아레테의 결정을 성안의 특수한 창고에 쌓아 놓고 독점 매매한 전력까지 있는 가문이었다.
지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독점 매매는 하고 있지 않지만, 그 수장 또한 특별한 힘을 지녔음은 분명하다.
‘그런 남자가 고작 아레테를 지닌 여성이라는 이유로 반했을 리 없…… 잠깐. 혹시 다이앤 영애의 아레테가 그쪽인가?’
리엔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일순간 멍해졌다. 그래. 그렇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지던 차이엘드 공작의 홍조도 이해가 간다.
이성을 유혹하고 정신을 놓게 만드는 미약은 연금술로도 만들 수 있었다. 신이 인간에게 수여한 힘이라는 아레테로도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정신을 조작하는 아레테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어. 다이앤 영애가 차이엘드 공작에게 그런 아레테를 쓴 거라면 앞뒤가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아멜리아 다이앤이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유혹할 방법은 없었다. 작정하고 덮쳤다면 모를까.
‘야밤에 고용인들로 인간탑을 쌓아 창문까지 넘으려고 한 걸 보면…… 아레테에 단단히 얽매인 상태일 거야.’
맨정신으로는 괴물 공작이 그런 미친 일을 벌일 리가 없다. 가정이 착착 들어맞자 리엔은 모종의 희열마저 느꼈다. 그런 그녀를 지디마가 환기했다.
“리엔. 일은 잘되어 가고 있는 것이겠지? 차이엘드의 눈에 띄면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거라.”
“예, 아버지. 이번 무도회에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리엔은 지디마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갔다.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아레테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꼴이라니.
‘그러고 보니 트라이하에서 일시적으로 아레테를 무력화시키는 묘약이 개발되었다고 했지. 이따 가서 물어나 볼까.’
일단 차이엘드 공작이 어떤 상태인지 파악하는 게 현명하리라. 그가 진심이라면 다이앤 영애를 건드리는 건 자살행위였다.
‘진심이 아니라 그저 유혹의 아레테에 홀린 것이라면…….’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차이엘드 공작이 제정신으로 돌아와 약혼녀를 이상한 사람 보듯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무척 재미있을 것이다.
리엔은 눈을 빛내며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강조한 후 백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트라이하에서 온 사신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