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사신단 중 그 누구보다 바빴다. 불안한 정세에 대비하려 그를 몰래 만나기를 청하는 켈트만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제대로 쉬지 못해 여독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다. 응접을 일체 관두고 쉬어도 아무도 반박하지 못할 상황.
그러나 카일은 발 디딘 이곳이 켈트만의 한가운데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혼자 온 것도 아니고, 무려 약혼녀가 함께 온 것이었다. 그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 중 쓸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 정보를 이용해 약혼녀의 안전을 확보해야 옳았다.
‘마라바스 놈도 걸리고, 가고일 백작의 소재도 더 정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겠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비밀 보고서들을 검토했다. 켈트만에 도착한 지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셀 수 없을 만큼의 은밀한 계획들이 체결되었다.
졸음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카일은 서류 검토를 서둘렀다. 오늘은 무려 켈트만에 도착한 지 6일 만에 아멜과 만찬이 있는 날이니까.
‘진작 이런 자리를 마련할 것이지…….’
백주는 무도회 전, 하일 제국 사신단의 주요 인물들을 초청해 놓고 간단한 만찬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간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멜을 보지 못했던 카일은 오늘만을 기다려 왔다.
‘어떻게 그동안 하루도 안 마주칠 수가 있지?’
아무리 숙소가 떨어져 있다지만 이건 조금 심했다. 어떻게 이렇게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는지.
자신이 심야까지 아멜의 숙소를 기웃거리는 점을 감안할 때, 일부러 아멜이 피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일부러?’
자신이 한 생각에 카일은 잠시 멈칫했다. 일부러 피한다고? 누나가 나를? 그럴 리 없다. 켈트만으로 향하는 여정 내내 그렇게 꼭 붙어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켈트만으로 향하는 범선에서도, 별장에서도, 마차에서도 먼저 달라붙는 건 자신이었다.
아멜은 늘 책을 읽거나 지도를 펴 놓고 켈트만의 지리적 특성들을 외우기 바빴다.
“…….”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피로가 싹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긴장과 이름 모를 조급한 감정들이 차올랐다.
카일은 굳은 얼굴로 만찬 참석 준비를 돕는 고용인들을 재촉했다.
***
만찬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참석자들은 넓은 원탁에 둘러앉아 켈트만식 디저트를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러나 카일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내 자리가 왜 여긴지 도저히 모르겠군.’
무슨 기준으로 좌석을 배정한 것인지 카일은 리엔 공주와 지디마 사이에 앉게 되었다. 아멜은 저 멀리에 나디아 공주, 그레첼 영애를 양옆에 끼고 앉았다.
불만이라고는 전혀 없는 화사한 얼굴로. 흰 깃털을 장식하고 모피를 두른 약혼녀의 모습은 카일을 힘들게 했다.
아니, 사실 그런 것들만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짜증 나는 건 끈질기게 말을 붙이는 백주였다.
“차이엘드 공작. 제 수하가 연하의 여성과 교제하는데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합니다. 무릇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그렇습니까.”
같잖은 말들을 늘어놓는 걸 보니 노망이 났나보다, 하고 넘어가려 했건만 지디마의 수다는 어딘가 일관적이었다. 한 줄로 요약할 수도 있을 만큼 간결하기까지.
남자는 연상, 여자는 연하.
지디마가 몇 마디를 하면 자리에 참석한 자들은 그에 대한 예를 갖춰 동의를 표했다. 그러면 지디마는 또 신이 나 몇 마디를 더했다.
“어린 여인과 경험 많은 남성만큼 완벽한 조화가 또 있을까요.”
아멜도 다른 참석자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카일의 이마에 작게 힘줄이 솟았다.
‘남자는 연상? 리엔 공주가 누나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넘어갈 일도 없고 어울려줄 일도 없다고 간단히 생각하고 넘어갔다간 나중에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낯선 이성이 급작스레 끼어들어 생성되는 삼각관계는 얼마 전 정독한 <관계가 박살 나는 순간 Best 100>에서 특별히 주의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멜과 단둘이 만나는 즉시 자신의 마음은 변치 않으며, 켈트만 측에서 작은 술수를 벌이고 있으나 휘둘릴 마음이 없으니 쭉 편안히 지내라고 말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얼굴 보기 힘든 약혼녀는 ‘남자는 연상 여자는 연하’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가.
‘……내가 안 보이나.’
그것도 건너편에 연하 약혼자가 떡하니 앉아 있는데.
무척 심기가 불편해진 카일은 차이엘드 특유의 비즈니스적 태도만을 내보이며 와인을 마셨지만 취하지 못했다.
이번 무도회는 가면무도회라는 것, 어쩌면 새로운 인연을 만들 기회라는 것, 각국 사신단들이 교류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다들 편히 쉬시고, 내일 무도회장에서 뵙겠습니다.”
마침내 지디마가 일어나 퇴장했다. 곧장 아멜을 쫓던 카일의 시선은 잠시 후, 충격적인 장면이라도 본 것처럼 황망해졌다.
“공주님, 처소로 드시지요.”
눈을 마주한 아멜이 그저 살짝 눈웃음만 지어준 후 나디아 공주에게 시선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눈맞춤은 1초가 전부였다.
“…….”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한동안 말없이 자리를 뜨는 아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바로 옆자리에 있던 리엔은 괴물 공작의 씁쓰름한 얼굴을 보며 다소 어이가 없어졌다.
‘분명 와인을 다 마셨는데…….’
공작의 와인에는 어젯밤 트라이하의 사신들에게 거금을 주고 입수한 영약이 상당량 섞여 있었다.
그들의 설명대로라면 공작은 정신계 아레테에서 헤어나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혼란스러워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그저 약혼녀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할 뿐이었다.
‘……뭐지? 괴물 공작은 다이앤 영애에게 정말 진심인가? 트라이하 놈들, 나한테 불량품을 준 건 아니겠지?’
영약을 반병만 마셨기 때문에 약효가 나지 않는 것일까. 리엔은 카일의 앞에 작고 영롱한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뭡니까.”
“피로하신 듯하여. 켈트만에서 널리 쓰이는 피로회복제입니다. 며칠 동안 격무에 시달리셨다 들었습니다. 잠을 못 주무시는 것입니까?”
리엔은 곧 자신의 행동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카일이 병을 따 들이켜는 대신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며 영약을 챙겼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에는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서.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제겐 경계 어린 시선을 내비친 공작이 쪼르르 다이앤 영애의 숙소 쪽으로 향한다. 리엔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백주께서는 차이엘드 공작의 상태를 모르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약혼녀에게 반쯤 미쳐 허덕이는 남자를 꼬드기라는 명을 내릴 리 없었다. 리엔은 자신이 차이엘드의 피앙세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난다면 백주께 좋은 소리는 못 듣겠지.’
어쩌면 앞으로의 생활이 몹시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잠시 고민하던 리엔은 작전을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은 그녀의 특기였다.
***
늦은 밤. 내일 있을 무도회 준비를 최종 점검하던 아멜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하필 가면무도회냐…….’
모두가 가면을 쓴다면 이타르 드 트라이하가 사신으로 참석한다고 해도 눈치채기 힘들 것이다. 안 그래도 실제로 만난 적이 없어 생김새를 잘 모르는데.
‘금발에 청안이라는 것만 가지고 어떻게 사람을 구분해. 한둘이 아닐 텐데. 제발 얼굴 보는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그뿐일까. 복잡한 무도회는 사람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기 딱 좋은 자리였다. 괜히 무도회가 암살 사건의 단골 배경인 게 아니리라.
요즘 아멜은 이타르와 마라바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오늘도 짜증과 한숨을 반복하다 잠에 들겠구나 할 무렵,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멜은 조심스레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곤 문을 열어주었다. 방문객은 그녀가 전혀 경계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카일?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일단 들어와요.”
카일은 무척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찬 이후에도 쉬지 못했는지 옷차림도 그대로. 어디서 끙끙 앓다 온 모습이었다.
아멜의 머릿속에는 켈트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부정적인 일들일 좌르륵 지나갔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켈트만이 광산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 때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예요?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요. 응?”
“…….”
카일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아멜은 더 큰 일이 일어났구나 싶어 머리를 굴리다 번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진작 말했어야 하는데 틈이 안 나서 이제야 말하네요. 티타임 때 리엔 공주의 속마음을 읽은 적이 있는데, 백주의 집무실 뒤 병풍에 누군가를 숨겨두었다고 했어요.”
“……병풍 뒤, 말입니까.”
백주가 은밀한 장소에 누군가를 숨겼다면 그건 분명 가고일 백작일 터였다.
카일은 잠시 하일드에게 백주의 집무실을 몰래 캐볼 것을 명하곤 다시 돌아왔다.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아멜의 아레테는 정보수집에 특히 유용했다. 그런 아레테를 가지고 있으면서 왜 정작 제 마음은 몰라주는지.
“제게 하고 싶은 말은 병풍 뒤의 첩자에 관한 게 전부입니까.”
이전보다 더 건조한 얼굴. 아멜은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으로 맞받아치려다 풋 웃고야 말았다. 이젠 닿지 않아도 카일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카일. 어디 가서 지금처럼 울 것 같은 얼굴 하지 말아요. 끝까지 모르는 척해서 확 울리고 싶어지니까.”
“…….”
“공작 전하께서 제 방에 몰래 찾아오실 일이라면…… 나 보고 싶었어요?”
“이야기를 못 나눈 지 일주일이나 지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아멜의 곁에는 항상 다른 영애들이나 나디아 공주가 꼭 붙어 있었다. 마치 그녀가 없으면 사신단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듯이.
카일은 아멜과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는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그녀의 곁을 누군가에게 뺏기는 게 끔찍이 싫었다.
“간간이 일정이 겹쳐서 얼굴 봤잖아요. 그걸로는 성에 안 찼어요?”
“그 정도로 만족 못 한다는 거, 이미 아시잖습니까.”
애처럼 굴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라도 찾아오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내일 있을 무도회에서 그녀는 가면을 쓰고 접근하는 수많은 남자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아멜리아 다이앤이 그중에서 오직 자신만을 골라내줄지 카일은 확신할 수 없었다.
“……내일은 무도회이니 제 곁에만 있겠다고 해주십시오. 저를 못 알아보신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카일의 음성은 어딘가 간절했지만 아멜은 다른 포인트에서 발끈했다.
“세상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가 고작 가면 하나 썼다고 카일을 못 알아볼 거라니. 이 미모가 가면 따위에 가려진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에요.”
잘 모르겠다는 듯한 카일의 얼굴은 오늘도 아멜의 자제력을 날려버렸다.
“카일. 잘 들어요. 카일이 가면을 쓰고 그 위에 종이봉투를 다섯 개쯤 뒤집어쓴다고 해도 이 미모는 못 가려요. 마법이라도 써서 얼굴을 완벽하게 가린다? 그럼 몸은 어떡할 거예요? 전 전속력으로 뛰어가면서 상체만, 아니, 복근만 살짝 봐도 저게 카일 몸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단 말이에요.”
“…….”
“제가 카일을 못 알아보는 일은 없어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총동원해서 찾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아주 조금 집착이 서린 목소리였다. 카일은 퐁퐁 샘솟는 뿌듯함과 묘한 감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표정을 풀었다.
아멜은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느낌을 받곤 침을 꼴깍 삼켰다. 정신을 차려보니 카일은 벽에 몰려 있었다.
그를 벽까지 몰아간 건? 역시나 자신이었다.
아멜의 못된 손이 카일의 얼굴과 귓가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의 키가 한참이나 커 까치발을 들고 몸을 밀착한 채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 야심한 밤에 누나 방에 왔으면 이런 걸 기대하고 온 거 아닌가?”
“…….”
무언으로 긍정한 카일이 몸을 숙여 찬찬히 입술을 겹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