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두 입술 사이로 농밀하게 달아오른 숨이 뒤섞였다. 아멜은 카일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점점 깊숙이 그를 탐했다.
온갖 뜨거운 단어들로 자신을 원하는 카일의 속마음이 들려와 열감이 더해졌다.
아멜은 작은 협조만 구하곤 그의 머릿속에 있는 나쁜 생각들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내일이 무도회인 거 알죠?”
그녀가 턱으로 벽에 걸린 드레스를 가리켰다. 카일은 드레스의 디자인을 빠르게 스캔했다. 팔과 어깨, 목선이 드러나는 디자인이라.
“자제해야 할 곳이 너무 많은데.”
“자제 못 할 것 같으면 이쯤에서 그만하고.”
“…….”
입술이 닿았다 하면 탄성이 새어 나오는 목 언저리에 키스하는 것은 큰 즐거움 중 하나였으나 오늘만은 꼬리를 내리기로 한 카일이었다.
그는 산뜻한 웃음으로 동의를 표하곤 아멜을 번쩍 안아 들었다. 곧 침대 위에 부채처럼 퍼진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체향이 풍겨왔다.
“왜 웃습니까.”
“좋아서요. 잡아먹게 얼른 이리 와요.”
아멜이 장난스레 말하곤 카일의 셔츠 깃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키스를 이어가면서도 카일의 모양 좋은 넥타이를 풀 수 있었다.
능숙한 손길이 그의 넥타이를 막 풀어헤쳤을 즈음, 사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
“…….”
어딘가 익숙한 상황. 약 3초 동안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아멜과 카일은 총알처럼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멜은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리본을 다시 묶은 뒤 문 쪽으로 향했으며 카일은 앞머리를 휘날리며 커다란 옷장 안으로 달려가 숨었다.
“어머, 나디아 공주님? 이 시간엔 무슨 일로?”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은 나디아 공주였다. 아멜은 옷장 쪽을 힐끗 바라봤다가,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죄송해요, 다이앤 영애. 마음이 혼란해서…… 혹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갈 수 있을까요?”
카일은 검은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남기지 않고 옷장으로 사라졌다. 아멜은 눈길로 양해를 구하고 나디아 공주를 위해 차를 내오라 명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좋지 않은걸요?”
아멜은 마음이 혼란하다며 찾아온 나디아 공주를 적당히 응대하고 내쫓을 만큼 매몰찬 성격이 못 되었다. 약혼자가 애끓는 몸을 옷장 속에서 식히고 있다고 한들, 아멜은 어쩔 수 없었다.
“황실을 대표한답시고 이곳에 온 저인데, 중추 역할은 영애가 다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요.”
“에이, 아니에요. 명색이 하일 제국의 사신단인데 공주님이 안 계셨다면 비웃음만 샀을 거예요.”
두 여인의 대화는 길게 이어졌다.
한편, 카일은 커다란 옷장 속에 숨어 나름의 뿌듯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일전에 다이앤 백작에게 걸렸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재킷까지 완벽히 챙겨 숨었다. 차이엘드의 위대한 학습력은 그의 밀회를 더 완벽한 경지에 올려두었다.
카일은 아멜이 끌러둔 넥타이를 다시 매며 문 틈새로 그녀를 지켜보다 문득 께름칙한 시선을 감지하고 고개를 돌렸다.
“풉…… 아, 죄삼다.”
“…….”
상황이 급박해 미처 확인하지 못한 사실 하나. 옷장에는 이미 바네사 메이브란테가 숨어 있었다. 카일의 표정이 일순간 소태를 씹은 듯 구겨졌다.
“당신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카일은 입모양으로 작게, 그러나 짜증을 가득 담아 물었다. 바네사도 비슷한 톤으로 응답했다.
“내일 마님이 걸치실 모피를 손질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찾아오더니만 분위기가 영 에로틱한 쪽으로 흘러서…… 놀란 마음에 숨었는데 공작 전하가 오신 거였군요.”
“…….”
카일은 말없이 넥타이를 마저 고쳐맸다. 바네사는 폭소를 터트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아레티스트 못지않은 민첩한 움직임으로 옷장에 쳐들어온 것도 우스운데, 그 와중에 재킷을 사수했다고 뿌듯해하기까지 하다니.
‘예전에 다이앤 백작에게 걸린 적이 있다고 했지.’
하여간 차이엘드 공작은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미친 것이 분명했다. 바네사는 미친놈과 길게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카일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그는 챙겨 온 재킷을 다시 걸쳤다. 조심히 옷매무시를 다듬던 그때,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다행히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요란한 소리를 내기 전, 바네사가 날렵히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건 뭐예요? 이상한 약은 아니죠? 마님은 지금도 공작 전하의 체력을 버거워하시는데……”
“…….”
제 옷에서 떨어진 것이 무엇인지 잠시 곱씹던 카일은 곧 그것이 리엔 공주가 피로회복제랍시고 준 물건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피로회복제는 무슨.’
리엔 공주가 이 영약을 어떤 경위로 구했는지, 어떤 생각으로 자신에게 주었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내용물은 뭔지 모르겠지만 마실 생각 없어. 적당한 곳에 흔적을 남기지 말고 버려.”
“알겠어요. 그런데 이거……”
바네사는 실처럼 얇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옷장 틈새에 작은 물병을 거듭 비춰보았다. 왜일까. 은하수를 떠 담은 듯 영롱하게 빛나는 액체가 낯설지 않았다.
‘이거,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
비슷한 시각, 하일 제국의 차이엘드 공작령의 공작저.
별궁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클레어 차이엘드는 신문을 펼치려다가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화사하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을 아멜리아 호수가 거무죽죽했다.
‘며칠째 비가 오는군.’
아멜이 없는 공작저에서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직무를 대리하고 있는 것도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건만 날씨까지 우중충했다.
넓은 공작저의 공기를 쾌활하고 산뜻하게 덥히던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존재가 없으니 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클레어가 무심히 턱을 괴려 할 때였다.
“클레어 님. 보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지금 들라 할까요?”
차이엘드 정보부 소속의 고용인 하나가 머리를 조아리곤 말했다. 보고라면 얼마 전 있었던 그 일에 대한 것이겠지. 심드렁하던 클레어의 얼굴이 냉랭하고 매섭게 바뀌었다.
며칠 전, 클레어는 차이엘드의 정보부와 특수부대를 풀었다. 그들의 표적은 한밤중 아멜의 신변을 위협했던 연금술사, 마라바스 라이델이었다.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선 옛 동료, 바네사의 증언은 그녀가 켈트만으로 향하기 전 미리 확보해두었던 터라 번거롭지 않았다. 임무 또한 간단했다.
클레어가 차이엘드의 잘 길러진 개들을 풀어 명한 것은 딱 하나였다. 마라바스 라이델이라는 연금술사를 목숨만 붙여서 데려올 것.
‘차이엘드도 별 것 없단 말이지.’
그러나 차이엘드 정보부와 특수부대의 협력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하일 제국의 끄트머리에 있던 마라바스의 거처를 확보하고 포위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내부로 침입했을 때, 마라바스는 연금술로 만든 환약과 갖은 스크롤들을 이용해 도주했단다. 이것이 클레어가 대충 들은 임무 실패 경위였다.
“자세한 건 지금부터 듣지. 내가 봐야 할 자료가 있으면 이리 줘.”
“정보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현장 스케치를 준비했습니다.”
“현장은 지금 어떤 상태지?”
“마라바스의 거처 및 주변 기슭은 현재 적법한 절차를 거쳐 매입한 상태입니다. 집안에 놓여 있던 마법 스크롤과 환약들은 분석 중에 있습니다.”
“공작 전하의 신임을 받는 자들이라 하여 기대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 처리가 느리군. 보고나 계속해. 침입 당시에는 어떤 상황이었지?”
차이엘드 정보부의 수장인 브루노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아직도 그 괴이한 광경이 눈앞에 선했다.
“마라바스의 거처는 그리 호화롭지 않은 단층 벽돌집이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공간에 퍼진 환약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방독면을 착용했다면 일순간 전멸이라는 어이없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텐데.”
“물론 방독면을 착용한 채로 진입했으나…… 작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 마라바스가 너희에게 접근해 일일이 방독면을 벗기기라도 했다는 건가?”
브루노는 침을 한번 삼키곤 대답했다. 아직도 그 순간의 느낌을 떠올리면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모두가 방독면을 스스로의 손으로 벗었습니다. 마치 뭔가에 홀린 듯이…… 건물 바깥쪽에 서 있던 요원들이 막으려 했지만, 그들도 건물 안쪽으로 들어오는 순간 스스로 방독면을 벗었습니다.”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는 건가?”
“예. 무어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차이엘드 소속의 정예요원들은 돈을 처바른 방어 장비를 착용한 덕에 마법에 쉽게 당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을 홀린 힘의 정체는…….
“마라바스 라이델이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지 않았나? 정신을 조작하는 아레테 보유자일 확률이 높아.”
“맞습니다. 커다란 메인 보석이 세팅된 목걸이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클레어는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를 뒤적였다. 브루노의 말대로 팔에 보석을 휘감은 마라바스가 스케치되어 있었다.
‘역시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군.’
이로써 확실해졌다. 마라바스는 가고일 백작의 수하를 통해 빼돌린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써서 아레테를 얻은 게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정신계 아레테를.
“상대가 아레테를 부여받았다면 여러모로 성가시긴 했겠군. 다른 특이한 건?”
“마라바스가 도망 직전에 챙긴 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사람?”
보통 일이 터지면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챙기게 되어 있다. 클레어의 경우에도 아레테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고가의 귀걸이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챙길 사람이라면 부인이나 애인?”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니라 뚜렷하게 얼굴을 기억하진 못하지만 분명 여자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습니다.”
“마라바스가 위급한 순간에 챙긴 게 할머니라…….”
클레어는 흠, 하고 한숨을 내쉬며 경우의 수를 헤아렸다. 그 할머니가 유용한 아레테 보유자일지도 모른다.
아레테는 아레테의 결정을 보유한 인간이 어떤 욕망을 가졌는지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타나는 힘. 그에 맞춰 대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어쩌면 나이나 시간에 관련된 힘을 부여받았을지도. 마라바스와 합심해서 이쪽을 노리면 곤란하겠군.’
그게 아니라면 노인은 마라바스의 연구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라바스는 트라이하의 로열 알케미스트 출신이라고 했다.
이미 한차례 시신으로 만든 인형들을 데리고 차이엘드 공작성에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이번엔 살아 있는 할머니를 꼭두각시로 만들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참으로 역겨운 시도일 터. 클레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할머니는 연구 재료였던 건가?”
“확답드리긴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마라바스의 물건들을 차이엘드로 옮겨 분석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실수 없도록 해.”
클레어는 검은 생머리를 한 차례 쓸어올리곤 브루노가 넘겨준 스케치들을 다시 훑어봤다. 비교적 정확하게 묘사된 마라바스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추가로 보고할 것이 생기면 즉시 보고하도록. 그리고 마라바스 라이델을 계속 추격해.”
“추격이라면……”
“공작 전하와 달리 난 온건하지 않다. 목숨과 혀만 붙여 와.”
콰드득.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마라바스의 초상화가 우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