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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63화 (63/134)

#63

이른 새벽의 햇살이 눈두덩이에 내려앉았다. 조금 더 잘지, 말지 고민하며 몸을 뒤척이던 아멜은 단단한 팔이 자신을 찬찬히 그러안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자는 척 장난스레 감은 두 눈. 살짝 올라가 있는 탐스러운 입꼬리와 날렵한 콧날. 잠결에 봐도 참 잘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언제 일어나 씻고 몸단장을 한 것인지 카일은 당장이라도 외출할 수 있을 만큼 정갈한 상태였다. 아멜은 시간을 다시 확인하곤 웅얼거렸다.

“카일, 갈 거예요?”

“사람들이 깨기 전에 제 방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있다 가지.”

“우리가 부부였다면 불필요한 이동은 필요 없었을 텐데.”

다시금 각방을 준 켈트만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카일은 그저 산뜻한 웃음만 지어 보였다. 무도회가 오늘 저녁이니 그때까지는 참을 수 있으리라.

“그럼, 사람들 깨기 전에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미 깨어 있을 사람은 다 깼을 텐데 뭘……”

아무래도 일이 많은가 보다. 아멜은 이마에 짧게 키스하고 방을 나서는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잠시 멈춰서 말했다.

“오늘 저녁 무도회에는 불꽃놀이가 있을 예정이라던데. 곁을 비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불꽃놀이를 보자고 청하는 것치곤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는 말투였다.

***

“마님. 그래서 어제 나디아 공주님은 대체 왜 찾아온 거래요?”

무도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바네사가 내 머리를 만져주며 물었다. 나는 어젯밤 나디아 공주와 나누었던 대화를 잠시 회상했다.

“딱히 용건이 있다기보다는 타국에 와 사신 역할을 수행하는 게 혼란하신가 봐요. 나디아 공주님은 분명 황실의 일원이시지만, 공식적인 역할을 수행하시는 게 처음이시잖아요.”

“마님께 의지하고 있는 걸까요?”

“경계하는 것보다 의지하는 게 낫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바네사의 손길이 점점 느릿해졌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 그녀의 속마음을 읽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야심한 밤에 찾아오냐…… 마님께 잘 보여서 차이엘드에 한 다리 걸치려고 하는 거 아냐?」

「하긴. 차이엘드 공작이 옷장에 숨어서 이를 갈고 있다곤 생각도 못 했겠지.」

「왜 하필 그때 찾아와서 미움을 샀을까…… 쯧쯧.」

바네사와 카일이 옷장에 나란히 수그리고 있는 그림을 생각하니 픽 웃음이 났다. 둘이 서로를 너무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한 소리를 하지 않기로 한 나는 치장을 돕는 손길에 몸을 내맡기며 거울을 보았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은 오늘도 민첩한 손길로 내 얼굴에 붓을 가져다 대고 은은한 향수를 흩뿌렸다.

“누나 님은 역시 머리를 땋아 올리는 것보다 늘어뜨리는 게 어울리세요.”

“어제 드레스 고르면서 머리는 업스타일로 하자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곤란한 듯 시선을 피하는 고용인들 사이, 바네사의 담백한 속마음이 들려왔다.

「망할 차이엘드 공작…… 우리 마님 목덜미에 꿀이라도 발라 놨나? 이게 뭐야!」

아무래도 모피를 꽁꽁 두르고 있어야 할 것 같다.

***

무도회장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베르드와 약속한 대로 나디아 공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타르 드 트라이하가 켈트만에 왔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

‘하필 가면무도회여서는.’

고용인들이나 하일드 집사장님께 물어봤을 땐 불참이라는 대답만 나왔지만 감이 좋지 않았다.

파티광이라면 오늘 자리를 빼놓지 않을 테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빠르리라.

켈트만이 자신한 대로 각국의 사신들이 홀에 모여 샴페인을 나눠 마시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라별로 드레스코드가 조금씩 달랐기에 눈으로도 참석자들의 국적을 알 수 있었다.

“마님. 누구 찾으세요?”

나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조용히 말했다.

“바네사. 일전에 트라이하의 3황자를 본 적이 있다고 했죠? 얼굴, 기억해요?”

“저는 한 번 본 사람들은 다 기억해요. 가면이 거슬리긴 할 테지만, 찾아봐 드려요?”

“호위를 게을리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할게요.”

“저를 뭘로 보시고.”

찡긋 웃은 바네사가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는 동안 저 멀리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백주와 두 아들, 그리고 리엔 공주였다.

그중 리엔 공주의 모습이 가장 눈에 띄었다. 원래도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던 리엔 공주는 작정하고 단장한 듯 나이에 맞지 않는 고혹적인 매력이 덧대어진 상태였다.

‘……카일을 노리는 거겠지.’

넘겨줄 생각은 없다. 하지만 리엔 공주가 무예를 갈고닦기 위한 유학을 얼마나 강렬히 열망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백주궁에 햇살이 가득하시길.”

각국의 사신들은 켈트만 식으로 예를 갖추며 적당히 고개를 조아렸다. 나도 그들처럼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살짝 인사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 백주 일행이 다가와 있다는 것만이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었다. 백주는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내게 말했다.

“다이앤 영애. 백주궁에서 본 얼마 안 되는 모습 중 오늘이 가장 평안해 보이는군.”

“……감사합니다.”

“자고로 사람은 제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있을 때 가장 편안하지. 누추한 자가 너무 좋은 옷을 입으면 결국 망가지는 품에 체면만 구길 뿐이라네. 비단 옷과 주인만 그런 것은 아니지.”

나는 굳은 얼굴을 하는 대신 우아하고 얌전한 웃음을 머금었다. 속에서 천불이 난다고 해서 티 내는 건 현명하지 않은 행동이니 말이다.

하지만 당연히 기분이 상했다. 어떻게 열을 안 받을 수 있을까. 카일과 함께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가 더 낫다는 말을 넌지시 해오는데. 게다가 뭐? 맞지 않는 옷?

“결국 옷은 소유자의 품격을 드러낸다는 말씀이지요?”

“그래.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할 테지.”

“옷은 전적으로 주인의 소유라고 생각하는지라 맞지 않으면 수선을 하면 된다 생각해왔는데, 과연 백주께서는 옷 한 벌을 보면서도 사유가 남다르십니다.”

“수선?”

“도움을 받아 조금씩 고쳐나간다면 세상에 못 입을 옷이란 없지요. 옷 입는 자가 누구라고 하든지.”

나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 사교용 은은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차피 지디마는 나를 남자 잘 만나 돈줄 잡은 여자로 생각하고 있을 터.

굳이 그에게 이건 이렇게 된 거고, 저건 저렇게 된 거라고 이해해달라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고.

“무슨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까?”

게다가 지금,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슬쩍 감싼 건 내 어깨지 지디마의 우람한 팔뚝이 아니었다.

즉, 지디마가 원하는 옷은 내가 입고 있는 셈.

“백주께서 작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공작 전하께서도 들으셨다면 좋을 텐데.”

“제게도 한 수 가르쳐주시겠습니까?”

카일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지디마는 별로 와닿지 않는 이유들을 대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차이엘드의 위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두 왕자와 리엔 공주가 남았다. 리엔 공주는 카일에게 무언의 언질을 주듯 길게 눈을 맞추었다. 뭐랄까. 거래를 트는 사업가의 눈빛이었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앞에 웬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다이앤 영애. 나는 백주 지디마의 차남 리진입니다. 사신단의 일원인 그대와 한 곡 추고 싶습니다. 하일과 켈트만을 위해서, 어떤가요?”

내게 춤을 청하는데 왜 카일의 눈치를 더 보고 있는 것일까. 공개적인 요구인지라 거절하기 어려웠다.

눈을 슥 돌리니 카일도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불쑥 튀어나온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엔도 카일에게 춤을 청한 것이다.

“차이엘드 공작. 한 곡 추시겠어요?”

“제 약혼녀가 기다리지 않도록 곡은 간결한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왜일까. 카일의 눈빛도 거래에 임할 때처럼 바뀌었다.

***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국적을 초월한 인맥들을 두루 만나고 나니 무도회는 어느덧 파국이었다. 그가 잠시 샴페인을 가지러 간 사이, 나는 바네사에게 물었다.

“바네사. 혹시 찾았어요?”

“아뇨…… 슬쩍 봤을 땐 없는 것 같아요. 나디아 공주님에게 접근하는 놈들을 경계하느라 사람 찾는 데 집중 못 하기도 했고요.”

“나디아 공주님한테 누가 접근해요?”

“웬 아저씨들이 많이 접근하네요. 정작 나디아 공주님은 불안해하고 있는데 말이죠.”

“좀 돌봐드리세요. 저는 카일이나 하일드 님이 있어서 괜찮으니까.”

멀리서 카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네사는 내 손을 꼭 잡으며 유언을 남기듯 말했다.

“알았으니까 마님도 몸에 좋은 음식들 좀 챙겨 드세요. 다이어트니 뭐니 하면서 굶지 마시고요. 운동량이 많이 느셨잖아요.”

“응?”

바네사는 그저 웃었다. 속마음이 들려온다는 게 문제였지만.

「오늘 차이엘드 공작은 작정한 것 같으니까.」

「난 절대로 혈기왕성한 연하는 피한다. 체력이 대체……」

샴페인을 가져온 카일이 내 옆자리에 당도하자 바네사는 자리를 피해주었다. 홀의 발코니에 우리 둘만 남게 되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배경음악처럼 뭉개졌다. 켈트만에 사신으로 온 이후부터 줄곧 긴장 상태여서일까, 이런 평화로움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게다가 가고일 백작이 백주궁의 중심부에 숨어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으니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것도 당연했다.

나는 비스듬히 서서 나를 반쯤 안고 있는 카일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곧 사신단을 환영하기 위해 백주가 특별히 준비했다던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들과 제법 로맨틱한 분위기. 나는 샴페인을 홀짝이다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얼른 묘책을 떠올려 가고일 백작을 잡아들였으면 좋겠어요. 그럼 남은 여정을 이렇게 보낼 수 있을 텐데.”

카일은 긴 대답 대신 웃음으로 화답했다. 마치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듯이. 그 태연함에 불안감을 느낀 내가 무언가를 되물으려 할 때였다.

펑-!

요란한 소리가 사위에 울려 퍼졌으나 왜인지 하늘에 불꽃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꽃은 멀지 않은 백주궁의 중앙부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사람들의 격한 웅성거림.

“불, 불이……!”

“백주의 집무실 쪽이다! 어서 사람을 보내 불을 끄도록!”

“좋은 날에 이런 사고라니……”

우연일까. 켈트만의 병사가 쏘아 올린 불꽃이 실수로 백주의 집무실에 떨어졌다고 한다. 가고일 백작이 숨어 있다던 그곳에.

나는 정색을 하고 카일을 바라봤다.

“……카일.”

“……공식적으로는 인명피해가 없을 테니 다행입니다.”

예상대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살그미 옆으로 비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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