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시야가 온통 흐릿하다. 몸은 화상으로 군데군데가 붉게 얼룩져 있고 고름이 곳곳에서 흐른다. 가고일 백작은 가느다란 호흡을 멈추지 않으려 기를 썼다.
잠시 잊고 있었다.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 거대한 저택쯤은 가볍게 태워버릴 수 있는 게 차이엘드라는 것을.
그리고 그 수장이라 불리는 카일리안 차이엘드. 그는 역대 차이엘드 공작들 중 가장 성정이 잔인하고 냉정했다.
‘아멜리아 다이앤 앞에서는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있다지만……’
가고일 백작은 일주일 전, 백주의 집무실이 불타오르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환영식 겸 무도회가 이뤄진다던 밤. 시궁쥐처럼 작은 단칸방에 숨어 창밖의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는데 어째 불꽃이 가까웠다.
굉음과 폭발음. 뜨거운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가 하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주변의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화마에 산 채로 집어 삼켜졌다고 해도 충분할 상황. 허나 정신을 잃고 화상을 입을 뿐, 생명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그 순간, 켈트만의 수도로 단숨에 갈 수 있는 이동 마법 스크롤을 준 마라바스 라이델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으윽…….”
구사일생하였다고는 하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불 속에서 죽기 살기로 도망친 끝에 백주의 집무실이 아닌 음습한 지하실에 숨어 있어야 하는 노릇.
이제는 복수나 금은보화 같은 것들이 아니라 창창한 햇살 아래 눅눅한 몸을 말리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 되었다.
“그래도 목숨은 건졌으니 다행이네. 이곳은 설계도상으로도 없는 공간이니 차이엘드도 찾지 못할 것이야.”
아련한 눈을 하고 지하실의 입구 쪽을 바라보는 가고일 백작에게 지디마가 말했다. 다행이라고 말하는 그의 낯빛도 영 좋지 않았다.
‘차이엘드 공작이 생각보다 빨리 눈치챘군.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것이지?’
가고일 백작이 켈트만으로 향했다는 소문이 이미 하일 제국에 파다하다는 말은 들었다. 그러나 그 가고일 백작을 백주가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일.
‘……누군가가 변절했다는 말이군.’
지디마는 순간 두 아들보다도 나긋한 웃음을 짓는 리엔을 떠올렸다.
리엔. 어느새 자랄 만큼 자란 그 아이는 원하는 것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점이 차이엘드 공작과 꼭 맞을 텐데.’
물론 변절자는 그녀 하나뿐이 아닐 것이다.
불꽃놀이는 분명 한 달 전부터 계획되어있던 것. 실수를 한 병졸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백주궁에서 무려 30년을 일한 베테랑이었다.
그런 자를 단숨에 매수해낼 수 있는 게 차이엘드였다. 백주가 가고일 백작을 숨겨주었다는 물증을 확보하려 지금도 총력을 가하고 있지 않던가.
가고일 백작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받은 것을 걸리면 끝장이다. 지디마는 그렇게 결론 내리곤 입을 뗐다.
“가고일 백작. 지금 바깥에는 차이엘드의 개들이 돌아다니고 있네.”
“예?”
“불탄 집무실 수리를 돕겠다고 아주 난리를 치는 걸 겨우 막았어. 교대 시간을 알아두었으니 성 밖으로 피신하는 것이 좋겠네.”
“피신이라면 어디로……”
“그리 멀지 않은 산에 깊은 동굴이 있네. 인적이 드문 데다 산세가 험해 나물 캐는 아낙도 꺼리지. 그곳으로 가 후일을 도모하세.”
“그리하겠습니다.”
“내 당장 출발할 수 있도록 짐을 꾸려 두었으니 어서 준비하게. 아, 내 화상에 좋다는 약을 지어 왔으니 쭉 들이켜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탕약을 들이킨 가고일 백작은 지디마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가까워진 지디마의 얼굴이 보였다.
눈썹은 안타깝다는 듯 늘어뜨렸지만 눈동자는 얼른 다급한 일을 처리해버리겠다는 듯 형형했다.
‘이런 얼굴을 언젠가 본 것 같은데.’
가고일 백작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탓하며 지하실을 나섰다.
***
드디어 오늘, 각국의 사신들을 불러모은 표면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켈트만의 수렵제가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정해진 구역을 돌며 사냥해온 사냥감들을 통해 최고의 사냥꾼을 가리고, 사냥감을 요리해 모두가 나눠 먹는 축제.
그러나 먹구름은 언제든지 눈이나 비를 쏟아낼 수 있다는 듯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바람은 창문이 덜컹거릴 정도로 불어 축제의 시작이라고 하기엔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길고 두툼한 방한 망토를 걸쳤다. 안에는 켈트만의 전통 드레스를 입었는데, 당장 전투에 임해도 될 만큼 편안하고 활동성이 높은 디자인이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다음, 켈트만의 전통대로 카일을 위해 밤새 수를 놓은 손수건을 챙겼다. 기회가 닿는다면 직접 전해줄 생각이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해 방을 나섰다. 듣자 하니 카일을 비롯한 사냥대회 참가자들은 이미 산기슭에서 준비를 마쳤다는 것 같았다.
‘다 같이 이동하면 되지 굳이 여자 따로, 남자 따로…….’
시간 낭비, 인력 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별수 없으리라. 나는 안내받은 대로 가장 호화로운 마차에 오르게 되었다.
구름보다 푹신푹신할 의자 생각에 흐뭇해하기를 잠시. 마차에 오르자마자 어색한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 다이앤 영애!”
그레첼 영애가 생명의 은인이라도 본 듯 얼굴을 환히 밝혔다. 이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마차 안에서는 나디아 공주와 리엔 공주가 어색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으니까.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길래 분위기가 이래?’
분명 서로의 심기를 건드리는 대화를 나눴으리라. 나는 슬쩍 그레첼 영애의 마음을 읽어냈다.
「마차 배정을 누가 이렇게 한 거야. 나디아 공주님이랑 리엔 공주님은 왜 다투시는 거고!」
「다이앤 영애가 와서 다행이다……」
「리엔 공주님이 나디아 공주님께 그렇게 직설적이실 줄은 정말 몰랐어. 반박을 하지 못하셔서 더 가슴 아프실 텐데.」
마차가 출발하고도 한참 동안이나 마음을 읽는 데 공을 들인 결과, 내가 타기 전 상황이 꽤나 긴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자리가 비어 있자 리엔이 ‘당연히 다이앤 영애의 자리겠지요? 공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보살펴주시는 것 같던데.’라고 말했단다.
일순간 백작 영애에게 보살핌을 받아야만 1인분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디아는 ‘리엔 공주님께서는 가족분들과 함께 가시는 줄 알았는데.’하고 받아쳤고.
‘……리엔 공주가 가족들에게 얼마나 도구 취급당하는지 알면서 한 소리겠지. 같은 공주이니 눈치껏 알아낸 걸까.’
그야말로 총칼 없는 전쟁터였다. 나는 넉살 좋게 웃으며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해댔지만 두 공주는 나중에 두고 보자는 듯한 얼굴이었다.
***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다른 나라의 사신들과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곧 사냥을 떠날 각국의 남성들은 저 멀리에서 인사를 나누며 찬찬히 각반과 아대를 착용했다.
카일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잠깐 손을 흔들어 인사를 나눈 후, 카일은 대기업 회장님 저리 가라 할 만큼 바쁘게 사람들과 교류했다.
‘사냥대회가 끝날 때까지 카일이랑 마주칠 일은 없겠구나.’
레이디들은 켈트만식 가옥에서 사냥에서 돌아오는 남성을 기다린다고 했으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챙겨온 손수건이 생각났다.
“바네사. 이것 좀 카일에게 전해주고 올래요? 제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서. 불길한 예감이 드니 몸조심하라고도 전해주세요.”
전직 기사단장인 하일드 집사장님을 비롯한 여럿이 카일을 지킬 테니 사냥 중 부상을 입을 일은 거의 없을 터. 그런데도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네사가 재빨리 카일 쪽으로 향하는 것을 잠시간 보고 있는데, 옆에서 툭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나 님. 괜찮으십니까? 낯빛이 좋지 않으시군요.”
“하일드 집사장님? 왜 여기 계세요?”
“공작 전하께서 누나 님을 경호하라 명하셨습니다. 아직 쥐새끼의 시신을 찾지 못했으니 걱정되셨던 모양입니다.”
쥐새끼라 함은 당연히 백주의 집무실에 숨어 있던 가고일 백작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곳의 주인인 지디마가 카일이 지시했을 방화를 ‘안전사고’라 발표한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고일 백작은 지디마가 어디론가 빼돌렸을 것이다.
‘아니면 손잡은 걸 들켜 곤란해지기 전에 깔끔하게 처리했다거나. 건물 재건을 돕겠다는 차이엘드의 제안을 무시하고 임시 집무실로 옮긴 건 아무래도 수상해.’
아직은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긴 했다. 그러나 사냥을 나가는 카일이 여전히 걱정되었다.
“하일드 님. 저는 괜찮으니 가서 카일을 살펴 주시겠어요?”
“역시 미래의 공작부인께서 사양하실 줄 알았습니다. 허나 명을 따를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시지요.”
나를 지켜야만 하는 중대한 사유라도 있는 것일까. 집사장님의 속마음을 읽어 봐도 별 쓸만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레이디 클레어의 보고서를 본 이상, 아레테 보유자인 다이앤 영애를 지키는 게 옳다. 공작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하시는 것이겠지.」
당최 무슨 소리인지. 바네사에 하일드 집사장님까지 나한테 붙는 건 너무 과잉 경호인 것 같은데 말이다.
***
바네사는 아멜이 쥐여준 상자를 소중히 들고 카일에게로 향했다. 사냥대회 준비가 한창인지라 시녀의 출입을 꺼리는 분위기였으나 날렵한 그녀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공작 전하께서 혼자 계셔야 전해드릴 수 있는데……’
바네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카일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낀 카일은 곧 그 정체가 바네사라는 것을 눈치채곤 잠시 외진 곳으로 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어휴, 이 싸가지. 바네사는 차오르는 짜증을 꾹 눌러 담았다.
“……내 약혼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표정 푸는 것 좀 봐라. 바네사는 마님을 위해 참기로 하곤 작은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곧장 그것을 열어 본 카일의 입꼬리는 무지개를 발견한 어린애처럼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귀여운 닭 자수라니. 조잡한 장식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수탉인 것 같았다.
‘나를 생각하면서 자수를 놔주신 건가…….’
일단 한 번 수탉이라고 생각하니 옆에 수놓인 정체 모를 동그라미들이 작은 병아리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이 손수건은 다산을 기원하는 것일까.
바네사는 흐뭇해하는 카일의 얼굴에 대고 아멜이 전하라는 말을 하려 했다. 단어가 정확하게 생각나지 않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님께서 불길한 예감이 드니 허리 조심하라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허리?”
“……허리가 아니라 몸이었던가?”
허리를 조심하라니. 역시 이 자수는 수탉과 병아리가 틀림없었다. 카일은 행복에 젖어 손수건을 보고 또 봤다.
잔뜩 풀어진 차이엘드 공작의 얼굴을 본 바네사는 지금이 기회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척―
그녀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쳐 카일의 앞에 내밀었다.
“뭐지?”
“경호비 5배. 특수 상황 경호니까요.”
5배. 바네사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참으로 날강도 같은 숫자라고 생각했다.
사실 5배는 까일 것을 감안하고 일부러 크게 부른 것이었고, 그녀의 진짜 목표는 경호비를 2배 더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손수건을 바네사에게도 펼쳐 보였다.
“네 눈에는 이 자수가 어떤 그림으로 보이지?”
바네사는 아멜이 무엇을 수놓았는지 알고 있었다. 웅장하게 땅에서 솟아오르는 용이라고 했다. 주변에 수놓인 자그마한 동그라미들은 흙덩이가 튀기는 걸 표현한 것이라던가.
‘하지만 차이엘드 공작은 이걸 보고 미친놈처럼 좋아했어. 그렇다면…….’
차이엘드식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바네사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누가 봐도 수탉과 병아리네요. 다산의 상징인가? 아무튼 화목한 가정을 상징하는 건 틀림없어요.”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이나?”
“아무렴요. 아, 어쩐지 마님이 자수를 놓으면서 그―렇게 행복해하시더라!”
거짓말이었다. 아멜은 자수가 지겨워 죽겠다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러나 바네사는 필살의 너스레를 이어갔고, 마침내 차이엘드 공작이 묘한 눈웃음을 지었다.
“수렵제 기간의 보수는 5배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바네사가 여전히 한 손을 펼친 채로 말했다. 카일은 손수건을 고이 접어 품 안에 감추며 말했다.
“네 손은 하나뿐인가?”
양손. 열 손가락. 경호비 10배.
모범답안을 들은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소소한 답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