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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65화 (65/134)

#65

수렵제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사냥대회는 켈트만의 전통 사냥방식을 따랐다.

방어구를 착용한 채 말 위에 올라 활과 칼, 창 등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무리를 지어 사냥감을 몰아 와 포위망을 좁히며 일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사냥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일주일 동안 진행되지만 안전과 경쟁상의 재미를 위해 1박 2일을 기한으로 한다는 켈트만 측의 설명이 있었다.

그에 따라 사냥 시작을 앞둔 각국의 사내들은 말에 올라타 자세를 가다듬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금방 카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차이엘드 공국이 자랑하는 품종 좋은 백마를 탄 카일은 단연 눈에 띄었다.

늘 제복이나 정장 차림, 목욕가운이나 허리에 수건 한 장을 두른 것만 봐 와서 그런진 몰라도 무장을 한 카일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지척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앞머리가 흩날릴 때면 곧게 뻗은 짙은 눈썹이나 그 아래 핏방울처럼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탐스러웠다.

약간 긴장한 것일까. 입을 굳게 다문 채 전방을 주시할 때면 주변 영애들의 시선이 그의 입술에 가 있으리라는 게 안 봐도 뻔했다.

칼을 허리에 차고 표정을 굳히자 날 때부터 장군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위압적이었다. 역시 남자주인공은 뭐든 화보처럼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일까.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바네사가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내 손수건도 전해줬다니 이제 남은 건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곧 장엄한 북소리가 지척에 울렸다. 그에 맞춰 진한 먹구름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가느다란 빗줄기가 바닥의 흙먼지를 가라앉힐 즈음.

“어머, 출발했어요!”

“어린 영랑들이 말을 제법 잘 타는데요?”

“켈트만은 달리는 말 위에서도 활을 쏠 수 있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비가 와도 정말 사냥을 계속한다니, 위험하지 않을까요?”

흥분 섞인 환호성과 함께 사냥대회가 시작되었다. 말발굽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어찌나 우람한지 소름이 다 돋았다.

말들은 경마의 한 장면처럼 산의 기슭으로 질주했다. 나는 그들의 목적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켈트만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산과 기암지대였다. 백주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도 산맥이 하나 있었는데, 사냥대회는 굽이져 이어진 산들이 그 배경이었다.

물론 모든 산에서 사냥해도 좋다고 했다가는 그다지 긴장감이 없으니 가장 높은 봉우리 다섯 개를 정해 그곳에서만 움직이는 것이 규칙이었다.

‘무슨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멀리 점이 되어버린 카일과 백마를 바라보았다.

***

카일은 적당한 속도로 주변 지형을 파악하며 말의 컨디션을 살폈다. 이 근처에 매 두는 게 좋을 듯했다.

말을 타고 빨리 주변을 훑는다면 사냥감을 먼저 발견할 수 있겠지만 그건 곧 위험에도 먼저 노출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승리보다 신중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직 가고일 백작의 소재도 모르고. 걸리는 게 많군.’

무엇보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 가고 싶지 않았다.

하일드를 붙였지만 아멜이 걱정되었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최대한 빨리 돌아갈 수 있을 만큼의 거리만 벌리고 싶었다.

‘하지만…….’

카일은 어느샌가 주변을 맴도는 켈트만의 말들을 바라보았다. 지디마는 자신이 적당히 사냥하는 시늉을 하며 노닥거리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공작 전하. 혹 사냥이 재미없으십니까?”

“무장하고 말을 타는 것이 오랜만이라 아직은 속도를 내고 싶지 않습니다. 시간도 충분하고.”

카일은 무덤덤했다. 다양한 사업을 경영하다 보면 듣도 보도 못한 산전수전을 겪기 마련.

게다가 차이엘드식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동안 이미 카일의 인내력은 설익은 도발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지디마의 도발은 그 격이 달랐다.

“허허. 그리 나오셔야지요. 차이엘드는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가문이지 않습니까. 선대 차이엘드 공작과 요절하신 차이엘드의 장남께서는 곰을 사냥해 켈트만의 모두를 놀라게 했지요.”

가족을 제 손으로 쓸어버리고 공작 자리에 올랐다며 줄곧 괴물 소리를 들어왔다. 그런 카일의 앞에서 그의 형제나 부모 이야기를 꺼내는 건 명백한 금기였다.

하지만 지디마는 실수했다는 듯 멋쩍게 웃음을 연출할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도발하고 심기를 건드리는 것인가. 카일은 건조한 얼굴을 하곤 말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차이엘드의 명예에 먹칠하지 않도록 슬슬 움직여야겠습니다.”

“같이 움직이시겠습니까? 두 제국의 수장이 함께 사냥에 나서 성과를 거둔다면 양국의 우호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겠지요.”

의미심장한 문장. 카일은 지디마의 속내를 읽어보려 시선을 그의 눈으로 옮겼다.

“배려는 감사하나, 그래서는 사냥대회의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백주의 혼탁한 눈동자를 숨겨주듯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토독토독 빗방울이 바닥을 물들였다. 슬슬 배웅도 마쳤겠다, 나를 포함한 레이디들은 가죽을 엮어 만든 거대한 천막 아래로 몸을 피했다.

특수 처리를 해 빗물을 넉넉히 막아내는 이 가죽 천막은 우리를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넓었다. 거대한 강당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안에는 목검이나 책, 체스판 따위가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어 사냥 간 사내들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 딱이었다.

“1박 2일 동안 머무르실 공간은 모두 천막으로 이어져 있답니다. 비를 맞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지요.”

리엔 공주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설명했다. 과연 처음 이용해보는 이동식 가옥은 상당히 아늑하고 포근했다.

시녀들이 곳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데운 우유와 차를 나르기 시작하니 색다른 분위기의 다과회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창밖의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 것만 제외한다면 참 평안했을 분위기. 북부는 안 그래도 기온이 낮은데 비까지 맞았다가 동상을 입는 것은 아닐까.

미간을 찌푸리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누군가가 살며시 다가와 뜨거운 차를 권했다. 하일드 집사장님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집중하시지요. 사교 활동은 귀부인의 주요 역할 중 하나입니다.”

괜찮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차를 받아 마셨다. 따뜻한 것이 들어오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몸이 노곤해지자 주변의 상황이 들어왔다. 하일드 님의 말대로 이곳은 사교의 장 그 자체였다. 파티 호스트는 리엔 공주라 할 수 있겠다.

리엔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권태로움을 느끼는 좌중을 바라보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레이디들께서는 검에 흥미가 있으신가요?”

“검……?”

레이디들은 눈동자에 흥미를 내비치면서도 섣불리 긍정하지 못했다. 무예를 숭상하는 켈트만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검은 사내들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일 테니.

그렇다고 아예 관심이 없다거나, 그런 건 천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린 영애가 여기사로 전직해 가문을 세우고 나라를 구하는 여기사 낭만 소설은 이 세계에서도 절찬리에 판매 중이니 말이다.

리엔 공주는 그녀들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곤 빙긋 웃었다.

“켈트만은 레이디들이 검을 잡아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죠. 원하신다면 대련을 보여드릴 수도 있답니다.”

리엔의 전략은 잘 먹혔다. 어린 영애들이나 검을 잡아보고 싶어 했던 레이디들은 목검을 쥐어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천막 아래에 있는 사람들 중 무예에 가장 뛰어나기에 그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 리엔 공주는 자연스레 우위를 점했다.

심지어 나디아 공주나 그레첼 영애도 천이 감긴 목검의 자루를 쥐며 환희에 가득 찬 얼굴을 했다.

‘리엔 공주는 사람도 다룰 줄 아는구나.’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다 불살라버리는 캐릭터라고만 생각했는데 지략도 뛰어났다. 모 제국의 개그 캐릭터 황제와는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어쨌든 영애들은 흔히 해볼 수 없는 경험에 행복해했다. 마음만 먹으면 아버지와 진검으로 검술 대련도 할 수 있는 나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런데 왜 리엔 공주가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시선이 마주한 그때, 그녀는 내게도 다가와 목검을 권했다.

“다이앤 영애. 검술에는 흥미가 없으신가 봐요?”

“날이 추워서 그런지 몸이 좋지 않네요. 부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영애가 목검을 쥐는 걸 보고 싶었는데. 사촌 중에 대단한 기사분이 계시잖아요.”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하자 리엔 공주는 웬일로 순순히 자리를 피해주었다. 그나저나 누구일까. 내 사촌 중에 대단한 기사가 있다니.

다이앤이 기사 집안인 건 알고 있지만 총기사단장직을 지낸 우리 아버지가 제일 잘난 기사인 줄 알았다.

켈트만은 분명 내 가족사에 대해 사전 조사를 했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다이앤은 대대로 손이 귀해 친척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딱히 없었다.

‘그렇게 유명한 기사라면 누구든 한 번쯤은 언급했을 텐데.’

리엔 공주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는 짐작 가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해오던 대로 나디아 공주의 신변이나 살피기로 했다. 그런데.

“……공주님?”

저 멀리 보이는 나디아는 리엔에게 개인 교습을 받고 있었다. 나디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슨 생각인지 리엔은 나디아를 살살 약 올리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고, 나디아는 분하지만 맞는 말이기에 딱히 화를 내지 못하고 뭐 씹은 얼굴만 하고 있었다.

리엔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쉬워요. 켈트만에는 수렵제 때 검을 겨누면 평생의 우정을 나눈다는 전설이 있거든요. 나디아 공주님과 제가 검을 겨누면 양국의 관계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일 텐데.”

‘하지만 네가 약하니 어쩔 수 없지 뭐.’

닿지 않아도 리엔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어머. 켈트만에 그런 전설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네요.”

“하일 제국의 여인들이 무예와 거리가 먼 것이 아쉽습니다.”

나디아 공주는 이번에도 입을 꾹 다물고 참……지 않고 나를 흘끗 바라봤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요.”

그럼 그렇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마을 하나쯤은 가볍게 불사르는 사이코패스 리엔 공주께서 목표를 그냥 꺾을 리 없었다.

나디아 공주는 대놓고 나를 바라봤고, 원하는 바를 이룬 리엔 공주는 흥미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다이엔 영애. 목검을 쥐어보시겠어요?”

“아…….”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예상대로, 하일 제국 출신의 사신들이 모두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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