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바사삭 금이 간 자존심에 대한 복수라도 해 달라는 것일까. 셀 수 없이 많은 눈동자가 기대에 차 반짝거렸다.
리엔 공주는 지체 없이 내게 목검을 내밀었다.
“하일 제국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는 걸로 알아요. 친척분께서 검술의 귀재시니 영애도 그렇겠죠?”
“글쎄, 저는 그게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리엔은 내숭 떨지 말라고 말하는 듯 픽 웃었다. 난 아멜리아 다이앤의 친척에 대해서는 정말 아는 게 없는데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구경이나 해볼까.’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도둑맞을 당시에도 느낀 것이지만 내 아레테는 처음 부여받았을 때부터 점점 진화해서 이젠 간접적으로 접촉한 상대의 속마음도 쉬이 읽어낼 수 있었다.
대련을 한다면 필시 리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으리라. 운이 좋다면 저번처럼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못 이기는 척 리엔 공주가 내미는 목검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어차피 백주께서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달라고 하셨으니. 하일 제국은 다이엔 영애만 경계하면 돼.」
‘시간을 끈다고? 뭘 위해서?’
꿍꿍이속을 들추기 위해서는 더더욱 검술 대련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칼자루를 다잡는 순간 어디선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곤 안절부절못하는 바네사와 하일드 집사장님이었다. 그들은 후다닥 내게 다가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나를 뜯어말렸다.
“마님!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시면 어쩌시려고! 저는 경호비를 10배나 챙겼…… 이게 아니지. 아무튼!”
“다이엔 영애께 큰일이라도 나면 차이엘드는…… 저희 공작 전하는 어떻게 될지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보는 사람들이 있어 누나 님이라고 하지 않으시는 것 좀 보게. 나는 바네사에게 머리를 높이 올려 묶어달라고 부탁하곤 어깨를 으쓱했다.
“목검으로 하는 대련이고, 설마 리엔 공주님께서 제게 전력을 다하시겠어요?”
그래도 타국의 사신을 상대하는 것인데 아름답고 따뜻한 그림을 연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 그 연출된 장면조차 내겐 버거울 수 있겠지만.
나는 걱정하는 그들을 적당히 진정시키곤 리엔의 앞에 섰다. 목검을 쥐고 마주한 리엔 공주는 그 위용이 대단했다.
‘……뒷걸음치다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사망하는 그림만 피하자.’
침을 꼴깍 삼키자 출발 전, 어머니가 선물해준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겨우 목검으로 대련하는 주제에 그것에 행운을 비는 내 모습이 어쩐지 우스웠다.
“다이앤 성을 가진 분과 대련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목검이 맑은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서로를 탐색하듯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목검.
「정식으로 검술 교육을 받진 않았다니 살살 해줄까.」
몇 번의 탐색 끝에 알아낸 사실. 리엔은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오늘 아침, 그녀가 아버지에게 전달받은 지령은 영애들의 주의를 끌라는 것이었지 외교 관계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짓누르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리엔은 설렁설렁 움직이며 시간이나 끌 요량으로 검을 제대로 잡지도 않았다. 움직임에도 살의가 없었다.
다만, 조금씩 들려오는 그녀의 속마음이 걸렸다.
「다이앤 영애가 만에 하나 아버지의 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힘을 빼 놔야 하는데……」
「페르슈 다이앤의 사촌이라고 들어서 그런가. 대련이 생각보다 재미있잖아.」
지디마의 계획이라니. 카일이 얽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리엔 공주도 조금씩 움직임에 속도를 냈다.
‘그런데 뭐? 페르슈 다이앤의 사촌? 사촌이 아니라 우리 아빤데?’
아무래도 리엔은 내 가족에 대해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잡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
하지만 지디마의 계획이 무엇일지는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공주님,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마음이 복잡해 보이시네요.”
슬며시 도발하자 리엔이 묘한 얼굴을 했다. 그래. 백주의 계획을 떠올려…… 응?
「이 움직임은 뭐지? 역시 다이앤은 다르다는 건가?」
「이 독특한 가드 자세…… 우리 기사들이 페르슈 다이앤을 따라 했을 때랑 똑같잖아?」
리엔 공주는 오로지 나와 내 아버지의 이름만 톡톡 떠올릴 뿐이었다. 카일이나 지디마, 켈트만의 시커먼 속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
‘그럼 설마, 리엔 공주가 유학길에 올라 스승으로 삼고 싶어 하는 전설의 기사가…….’
99%는 확실하다. 나는 나머지 1%의 확신을 더하기 위해 오그라드는 대사를 흘렸다.
“부친인 페르슈 다이앤께서 저를 잘 가르치셨나 봅니다. 제가 켈트만 공주님과 대련하다니.”
목검은 계속해서 맑은 소리를 내며 엉켰다. 그러나 리엔 공주의 행동은 눈에 띄게 엉성해졌다.
「잠깐, 뭐라고? 부친? 페르슈 다이앤이 사촌이 아니었단 말이야?」
「아버지께서 내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페르슈 다이앤에게 얼마나 검술을 배우고 싶어 하는지 알면서……」
리엔 공주의 잡념이 무서운 속도로 들끓었다. 나는 가볍게 전진하며 그녀의 검을 위로 튕겨냈다.
탁-!
군더더기 없는 동작과 함께 그녀의 목검이 빙글 하늘로 치솟았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리엔은 검을 놓쳐버렸다는 자각도 하지 못한 채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훈훈한 마무리를 위해 악수를 청했다. 그런데.
「아버지께선 내가 다이앤 영애의 가족관계를 알면 흔들릴까 봐 일부러……」
「어째 협조적으로 나오신다 했더니 이런 함정을 파두셨을 줄이야. 믿은 내가 멍청했어.」
「그나저나 페르슈 다이앤의 딸이라면……」
리엔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찬찬히 볼을 붉혔다. 이 반응은 도대체 뭔가. 차오르는 껄끄러움을 숨긴 채 악수를 이어갈 무렵, 손목이 따끔했다.
“너무너무 즐거운 대련이었어요! 영애와 진작 대련을 해 볼 걸 그랬어요. 아버님은 건강하시지요? 어머, 표정이 안 좋으신데…… 저쪽 가서 오붓하게 휴식이나 취할까요? 단둘이?”
“아…….”
어머니가 준 팔찌의 보석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저기요, 공주님. 왜 저한테 음험한 마음을 품으세요?
***
비슷한 시각.
카일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사슴 사냥에 성공했다. 그를 따르던 영랑들과 기사들이 거침없는 환호를 보냈다.
이것저것을 걱정하느라 내내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카일도 조금 표정을 풀었다. 사냥에 성공한 것 때문은 아니었다.
‘사슴의 뿔이 여자한테 좋다고 했지.’
달아오르는 것에 비해 빨리 지치는 누나의 체력은 언제나 걱정거리이자 불만 사항이었다. 고서에서 본 바에 따르면 사슴뿔 달인 물이 효과가 있으리라.
“약제로 쓸 것이니 뿔은 따로 챙기도록.”
“예, 전하.”
한 차례 공중을 빠르게 베어 칼이 머금은 빗물과 피를 털어낸 카일은 비슷할 정도로 붉게 물드는 노을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올 것이면 비만 오고, 노을이 질 것이면 노을만 질 것이지. 시커먼 먹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핏빛 하늘이 얼비쳐 하늘은 지옥도의 한 장면처럼 보였다.
‘해가 저물면 기온이 더 떨어질 것 같으니 이쯤하고 돌아갈까.’
카일은 뒤따르는 자들이 들쳐 매고 있는 자루들을 바라봤다. 충분한 사냥감을 확보했으니 이만 물러가도 좋을 것이다.
문득 기슭으로 말을 몰아올 당시, 아멜이 손을 붕붕 흔들며 배웅해주던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차이엘드 공국의 사냥터도 그만큼 좋아해 주실까.’
산이나 들, 바다라면 넘치도록 소유하고 있었으니 언젠간 사냥을 핑계로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특히 아이를 갖게 된다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방법>과 <내 아이와 친구 되기>에서 아이에게 최고의 교육은 자연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서 가족들과 여유롭고 포근한 일상을 보내는 날이 오기를 바랐다. 카일은 사슴의 뿔을 흐뭇한 얼굴로 보다 말했다.
“사냥감이 젖어 상할까 염려되니 먼저 내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지친 분들은 먼저 내려가 쉬고 계십시오. 저는 주변을 정리한 뒤 따라 내려가겠습니다.”
켈트만식 사냥에서는 식량을 제공해 준 대자연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과정이었는데, 외부인들도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사냥 후 주변을 찬찬히 거닐어야 했다.
카일의 말 한마디에 사내들은 두 개의 조로 분리되었다. 상대적으로 지쳐 있어 휴식이 필요한 영랑들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먼저 하산하게 되었다.
반면 아직 팔팔한 하일의 젊은이들은 차이엘드 공작과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가시죠, 공작 전하.”
“…….”
“전하?”
카일은 누군가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릴 적 형들이 제 목숨을 노릴 때도 이런 시선을 감지하지 않았던가.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주변을 잘 살피면서 이동하십시오.”
산세가 험해지는 곳에 말을 묶어두고 왔기에 얼마간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깊은 산속까지 꼼꼼히 살피고 자연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것이 켈트만의 전통이었으나 카일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직감은 백주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사냥대회라면 함정에 빠트리기 딱 좋은 곳이니 직감이 맞을지도 모른다.
“빗줄기가 굵어질 듯하니 서두르지.”
산등성이를 얼마간 훑다 말을 묶어둔 곳으로 향하던 일행은 흙탕물이 되어버린 도랑을 건넜다. 그러자 거대한 잣나무 아래 무언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다리를 물린 초식동물처럼 널브러져 끊어질 듯한 숨을 이어가는 어떤 생명체. 카일은 그것의 얼굴을 확인하곤 곧장 칼을 빼들었다.
‘사냥대회이니 무엇을 사냥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잣나무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는 사냥감, 아니, 남자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제 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게 아니라 누군가가 이곳에 보란 듯 버려두었다는 방증.
‘예상은 했지만 정말 가차 없이 버리는군. 아니, 이제는 이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거겠지.’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며 억울한 듯 온몸을 뒤트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주가 사냥대회에 맞춰 방출한 인간 사냥감은, 예상대로 가고일 백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