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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67화 (67/134)

#67

가고일 백작은 혀를 잘라내기라도 한 듯 말을 하지 못했다. 몸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모습이 짐승이나 진배없었다.

게다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혼탁하다. 카일은 그 괴이한 모습에 주춤하는 영랑들을 뒤로 물리며 가고일 백작을 훑어봤다.

‘머리카락이나 몸에 화상의 흔적이 있는 걸로 봐선 어디에 숨겨두었다 이리로 빼돌린 것 같은데.’

그런 행동을 하는 속내라면 뻔했다. 엮여 있는 것이 알려졌다간 뒷감당을 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백주가 먼저 꼬리를 자른 것이겠지.

모셔도 자신을 헌신짝 취급하는 주군만 모시는 가고일 백작에게 아주 작은 연민이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일전에 약혼녀를 수렁에 빠트리려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사형선고를 받은 몸이니 지금 이곳에서 죽여도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오히려 지금이라면 그를 제 마음대로 심판할 수 있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레 생각한 카일은 문득 아멜의 얼굴을 떠올리곤 멈칫했다.

왜일까. 그에게 복수하는 것이 그녀의 뜻을 거스르는 일처럼 느껴졌다.

한번 이성을 되찾자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하산길에 널브러진 가고일 백작은 마치 쥐를 잡기 위한 덫 위의 먹음직스러운 치즈 조각 같았다.

‘내가 괴물답게 행동하기를 바라는 건가.’

분명 백주가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뜻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없기에 카일은 살기를 거두었다.

단번에 달려들어 그를 죽일 기세던 차이엘드 공작이 멈칫하자 함께 사냥을 온 하일 제국 사신들이 더 놀랐다. 천하의 괴물 공작이 가고일 백작을 이 자리에서 심판하지 않는다니.

“공작 전하. 저자를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적당히 포박한 다음 하일 제국으로 데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리둥절하기를 잠시. 차이엘드 공작의 눈에 띄고 싶어 안달이 난 사내들은 앞다투어 가고일 백작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이 칼과 밧줄을 빼 드는 순간.

“으, 으윽……!”

가고일 백작이 머리를 싸매고 몸을 뒤틀며 발작했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신음하기도 했다.

“뭐, 뭐야!”

“이게 무슨……!”

“왜 저래?”

가고일 백작은 무언가에 찬찬히 잡아먹히듯 몸을 뒤틀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몸에는 알 수 없는 힘이 흘렀으며 악령이 몸을 점령한 것처럼 행동도 이상했다.

당황한 하일의 사내들은 곧장 물러나려 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곤 그들에게 방어의 아레테를 사용했다.

‘이건 대체…….’

가고일 백작의 몸 어딘가에서 연금술의 마력이 흘러나왔다. 몸의 주인도 당황하는 것을 보아 저도 모르는 새에 주술이 몸에 새겨진 것일 터.

“괜찮습니까?”

“저희는 괜찮습니다, 공작 전…… 크윽!”

일순간이었다. 의문의 일격에 당한 하일의 사내들이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추욱 쳐졌다.

이맛살을 찌푸린 카일은 단번에 가고일 백작에게 달려들어 그의 배에 검을 찔러넣었다. 그런데.

‘……아레테인가.’

분명 치명상을 입고 고통을 호소해야 할 가고일 백작이 고개를 돌리며 키득거렸다. 그가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이군, 공작 전하.」

“마라바스 라이델.”

「공작 전하께서 이름을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스럽군.」

애당초 나이가 제법 있는 가고일 백작이 혼자의 힘으로 탈옥해 켈트만의 수도까지 이동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도왔다고 생각했고 그 ‘누군가’의 후보에는 마라바스 라이델이나 백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성가시게 되었군.’

마라바스 라이델에 대한 정보는 바네사가 넘겨준 것과 레이디 클레어의 보고서가 전부였다.

연금술에 능한 정신계 아레테 보유자.

하르모니아의 목걸이의 현 주인.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가고일 백작을 조종하고 있고, 그의 몸에 닿으면 정신을 잃을 확률이 높다는 것.

그리고 그가 욕망하는 것이,

「아멜리아 다이앤은 여전히 아름다운가?」

자신과 같다는 것.

카일은 이를 으득 갈곤 가고일 백작의 몸에 박아 넣은 칼날을 들쑤셨다. 역린을 건드린 그를 이대로 보낼 생각은 없었다.

가고일 백작의 몸은 뒤틀렸으나 사위에 퍼진 마력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하일 제국의 영랑들이 발작하듯 몸을 들썩였다.

「차이엘드 공작. 궁금하지 않나? 너를 따르던 이 젊은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딴 건 궁금하지도 않아.”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제게 싹싹하게 구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니 새삼 상처받을 것은 없다고 카일은 생각했다.

“으, 으윽…….”

가고일 백작에게서 흘러나온 마라바스의 힘이 하일의 사내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들은 몸을 못 추스르다 이내 흐릿한 눈으로 카일을 쏘아봤다.

“차이엘드,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돈 때문에 따라왔건만…….”

“아버지와 형들을 죽인 괴물.”

“…….”

카일은 자신에게 독설을 퍼붓는 하일의 사신들이 정신을 잃은 상태라는 것을 재차 떠올렸다. 그럼에도 검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허튼수작을 부리는군. 아레테인가?”

「내 아레테는 무의식에 감춰진 욕망을 발현시키지.」

카일은 검을 다잡으며 그들에게 방어의 아레테를 한 번 더 입혀주었다.

왜일까. 미치도록 약혼녀가 보고 싶었다.

***

한편, 지디마는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카일이 가고일 백작과 접전을 벌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이건 애초의 작전과 완전히 동떨어진 그림이었다.

원래 그의 계획은 가고일 백작을 잔인하게 죽이는 차이엘드 공작의 모습을 이용해 하일 제국 사신들을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특히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차이엘드 공작의 잔인한 성정을 슬쩍 흘려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할 요량이었다.

그를 위해 차이엘드 일행의 하산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가고일 백작을 버려두었다. 그런데.

‘가고일 백작은 대체 뭘 숨기고 있었던 거지?’

난데없이 가고일 백작이 주변 사신들을 싹 기절시키곤 차이엘드 공작과 맞붙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게.

‘분명 마비 독을 먹였는데…….’

아무래도 가고일 백작에게 들러붙은 누군가가 그의 몸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차이엘드 공작을 수세에 몰고 있는 것도 배후의 인물이리라.

‘난감하게 됐군.’

지디마는 현실적으로 따져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차이엘드 공작은 자신이 숨겨준 가고일 백작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

그 사실을 들킨다면 손해배상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터. 계산을 마친 지디마는 제 주변의 문무 대신들에게 엄포를 놓았다.

“방관 또한 엄중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 자네들도 이제 나와 한배를 탄 것이네. 차이엘드 공작에게 들러붙어봤자 배신자일 뿐이지.”

“…….”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만 하산하세.”

“하, 하지만 하일의 사신들이 기절해있지 않습니까?”

“괴물 공작이라면 제 곁을 따르는 사내들을 해치고도 남지.”

덤덤하게 말을 마친 지디마는 채비를 서둘렀다. 이대로 가고일 백작이 차이엘드 공작을 죽여버렸으면 했다.

***

카일이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사냥감을 가지고 온 일행이 도착한 게 벌써 두 시간 전인데.’

선발대가 도착한 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듯한 소나기가 몇 차례나 산에 쏟아졌다.

나는 일행의 하산을 도울 사람들을 보내 달라 켈트만 측에 요청했다가 막 거절당하고 돌아온 참이었다.

내가 만난 켈트만의 무장은 침착한 투로 카일을 믿고 기다리자고 말했다. 하지만 애원하는 척 손을 스쳤을 때, 그는 나보다도 더 카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곤란한 일이 생겼는데 카일을 버리고 온 건가. 하긴. 카일이 죽으면 제국은 켈트만의 손아귀에 들어갈 테니.’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나는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탁한 물건은요?”

“구해오긴 했는데…… 트라이하에 이런 물건이 있는 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책에서 봤죠.”

“연금술 책이요? 요즘 공작 전하도 그쪽 사업에 관심이 많으시던데.”

아니. <대부호의 파멸과 그 후>에서. 나는 뒷말을 삼킨 채 바네사가 건네는 물건을 챙겼다. 어딘가로 향하려는 그때, 리엔 공주가 나를 불러세웠다.

“다이앤 영애. 지금 제 아버지께 가시는 거죠?”

“……네, 공주님.”

“같이 가요. 영애 혼자 가면 무슨 핑계를 대고 안 만나줄지 모르니까.”

말투가 조금 호의적으로 바뀐 것 같은데. 아니, 아예 하일 제국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다.

나는 떨떠름한 기분을 철저히 감추며 빠르게 걸었다.

“다이앤 영애가 내겐 무슨 일인가.”

알현하듯 어렵사리 만난 지디마는 태연했다. 마치 내가 자신을 찾아올 일이 전혀 없다는 듯이.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만나주지 않으려던 것도 리엔 공주 찬스를 써서 겨우 들어온 참이었다. 정말 켕기는 게 있지 않고서야 타국의 사신인 나를 이렇게 냉대할 리 없었다.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기신 듯한데, 병력을 지원해 수색을 도와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사냥대회라는 게 원래 다 그렇지. 아직 복귀하지 않은 자들이 꽤 되니 기다리게. 유난 떨어봤자 차이엘드의 명예에 흠만 생길 뿐이야.”

“공작 전하께서는 빗줄기가 굵어지는데도 사냥을 이어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영애는 차이엘드 공작의 안위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쓰는군. 그 이유를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면 보는 이가 껄끄러우니 자중하게.”

욕망이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나를 카일의 사랑으로 먹고사는 애첩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

“백주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주변 지리에 어두운 하일의 사신들이 헤맬 것입니다. 부디 사람을…….”

“다이앤 영애.”

음성에 서린 분위기가 바뀌었다. 험악하다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이다. 지디마는 리엔 공주를 포함한 모두를 막사 바깥으로 내보내곤 나만 남겼다.

“제안을 하나 하지. 영애가 차이엘드 공작의 목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에 따라 거절하든, 승낙하든 상관없네.”

“……말씀하시지요.”

“내가 차이엘드 공작을 데려오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영애는 차이엘드 공작의 곁에서 떨어져 줄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주제를 알고 적당히 떨어지라는 말이네. 원한다면 내 아들들 중 하나에게 영애를 아내로 맞으라 하지. 하지만 차이엘드 공작은 영애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잖나.”

“…….”

나는 입안을 강하게 깨물었다. 작은 고통에 일순간 눈앞이 뿌예지고 얼굴에 열감이 몰렸다. 시야가 출렁거리기를 잠시. 툭 눈물이 떨어졌다.

“영애의 눈물 같은 건 내게 안 통하네. 어서 대답이나 하게.”

지디마는 혀를 츳츳 차면서도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것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를 위한 조치라는 것을 나는 잘 알았다.

계획대로 손수건을 전달받는 그 순간이 내게 다신 없을 기회라는 것 또한.

나는 손수건을 느릿한 동작으로 받았다. 빨리.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읽어내야 했다.

「차이엘드 공작은 지금쯤 가고일 백작과 승부를 봤겠지.」

「이리 찾아와 매달리니 조금 걸리긴 하는군.」

가고일 백작? 승부?

맥락상 지디마가 카일을 어딘가에 버리고 온 것 확실했다. 꽤나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나 그 장소가 어디인지 알 길이 없었다.

‘제발. 주변에 뭐가 있는지만 떠올려도 괜찮으니까…….’

나는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을 읽어내는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순간.

“……!”

아레테를 처음 부여받았을 때처럼 찌릿한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무엇이 변했는지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

속마음뿐만 아니라 지디마가 떠올리고 있는 장면 자체가 영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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