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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68화 (68/134)

#68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당황이 앞섰다.

접촉한 상대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사기에 가까운 능력인데, 이젠 아예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니.

왜 갑자기 내 아레테가 진화한 것인지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준 마법이 깃든 팔찌를 끼고 있어서.

바네사를 시켜 트라이하에서 공수해 온 ‘그 물건’을 옷 안에 숨겨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카일을 구해와야 한다는 생각이 그만큼 절실했던 것인지도.

‘일단은 여기에 집중하자. 이건 분명 지디마가 본 장면들이야.’

나는 그의 시야에 들어온 모든 지형물을 빠르게 외웠다. 동굴로 향하는 듯한 입구와 커다란 잣나무. 마른 풀과 커다란 바위들을.

“다이앤 영애. 대답은?”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지디마가 답을 재촉했다. 덕분에 더 이상 그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나는 이 기회를 마련해준 손수건으로 겨우 짜낸 눈물을 톡톡 찍어 닦으며 우는 소리를 냈다.

자고로 ‘주제를 알고 떨어져!’ 같은 막장드라마 대사에는 막장드라마 대사로 응대해야 하는 법.

“그럴 수 없습니다. 소녀는 차이엘드 공작 전하의 약혼녀이자 차이엘드의 일원입니다.”

“허…….”

“저희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입니다. 백주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저희 사람들에게 부탁해 수색하겠습니다.”

가히 신파 드라마의 여주인공스러운 대사였다. 나는 스스로 만족하며 빠르게 물러났다.

“영애. 거기 서게.”

하지만 지디마는 용건을 마친 나를 붙잡았다. 이미 백주를 물 먹일 방안도 생각해뒀겠다, 더 이상은 입안을 일부러 깨물어 질질 짤 필요도 없었다.

“백주께서는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제가 수색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차이엘드의 수장에게 간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시는 겁니다.”

“…….”

“참고로, 제가 백주와 독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일 제국의 사신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물건을 샀으니 트라이하의 사신들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으리라.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는지 지디마는 말이 없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백주께 영광이 있으시길.”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디마의 막사에서 나오자 바네사와 리엔 공주가 보였다.

“마님. 괜찮으세요? 세상에…… 우셨어요?”

“아, 조금. 괜찮아요.”

“아버지께서 다이앤 영애에게 윽박지르셨나요?”

바네사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의 팔찌가 가르쳐준 대로 리엔 공주도 내게 사심을 품은 게 분명했다.

‘이제 수색을 시작해야 하니 쓸 수 있는 인력은 최대한 쓰는 게 좋겠지.’

나는 하일 제국의 사신들이 모여 있는 막사에 들어가기 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하고 리엔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님. 혹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신가요?”

손을 슬쩍 잡는 순간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당연하지. 차이엘드 공작이랑 거래한 게 있는데.」

「게다가 페르슈 다이앤의 딸이니 잘 보여야 해.」

“물론이에요, 영애. 뭘 도와주면 될까요?”

카일이랑 거래라니. 언제, 무슨 거래를 했는진 모르겠지만 리엔 공주는 내게 도움을 주는 게 제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한 상태였다.

‘깊게 파고드는 건 나중에 하고.’

막사로 들어서자 하일드 님이 사냥대회가 이뤄지는 산맥이 묘사된 지도를 펼쳤다. 시간이 짧았는데 다행히도 구해다 주셨다.

“함께 사냥에 나섰던 영랑들과 다른 정보들을 조합해 보았을 때, 이 산을 중심으로 수색하면 될 듯합니다.”

하일드의 손끝이 유독 거대한 산 하나를 가리켰다. 날도 험하고 가시거리도 좁아 이 산을 뒤지는 데만 해도 이틀은 족히 걸릴 터.

“공주님. 이 산에 사냥을 다녀오신 적이 있나요?”

“매사냥을 주로 다녀오는 곳이에요.”

“그럼 지금부터 제가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곳을 골라내주세요.”

나는 지디마의 마음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묘사했다. 리엔은 골똘히 생각하다 몇 군데를 짚어주었다.

“기억나는 건 이 정도. 이 산에는 동굴이 많아서 제가 놓친 곳도 있을 거예요.”

“감사해요. 그럼 공주님이 짚어주신 부분 위주로 수색대를 파견하는 것으로 할게요. 하일드 님. 인원을 적당히 배분해주세요.”

전직 기사단장이시니 나보다 능히 사람들을 지휘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하일드 님의 얼굴이 어째 이상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주변을 둘러보니 리엔 공주도, 나디아 공주도, 그레첼 영애를 비롯한 다른 하일 제국의 사신들도 나를 비슷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존경과 동시에 ‘얘 뭐지?’ 하는 얼굴. 대표로 입을 뗀 건 나디아 공주였다.

“다이앤 영애. 영애가 말한 것과 비슷한 지형에 차이엘드 공작이 있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죠?”

아, 깜빡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가진 아레테의 정체를 모른다. 그렇다고 이 능력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는 없는 노릇.

잠깐 고민한 나는 백치미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무마했다.

“사랑의 힘이죠, 사랑의 힘. 공작 전하와 저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사이거든요.”

“오오, 과연…….”

“역시 두 분은……!”

어째 이 개소리를 다들 믿는 눈치였다.

***

하일 제국의 사신들은 그들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차이엘드 공작의 무사 귀환을 위해 애쓰느라 분주했다.

하일 제국의 인원들이 움직이고 나서 한참 후, 켈트만의 수장 지디마는 눈치가 보였는지 뒤늦게 인력을 더해주었다.

멀지 않은 트라이하의 막사. 이 모든 것을 수정구슬을 통해 보고 있던 이타르의 눈가가 곱게 휘었다.

그는 줄곧 쓰고 있던 갈색 가발도 벗어 던지곤 침전에 누워 수정구슬만 바라봤다.

시종인 베놈은 그 때문에 여간 골치 아픈 것이 아니었다. 수렵제에 참가하고 싶다며 변장까지 하고 온 3황자가 얄미웠다.

“가발은 어느 때든 쓰고 계십시오. 전하께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 들통나면 경을 치는 건 접니다.”

“어차피 다들 황제가 될 형님에게만 관심 있겠지.”

형님이란 트라이하의 1황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베놈은 어딘가 퉁명스러운 그의 태도에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정체를 숨기려 하셨으면 끝까지 숨기셔야지. 아까 그 여시종에게 스크롤은 왜 건네신 겁니까?”

“……그 여자, 다이앤 영애가 보냈다고 했나.”

“예. 아까부터 수정구슬로 지켜보고 계시던 다이앤 영애가 보낸 시녀였습니다.”

“영애는 이미 새로 개발된 스크롤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던데…… 아레테 보유자인가?”

“그것까진 모릅니다. 하지만 일전에도 리엔 공주께서 비약을 구하기 위해 이곳에 들르지 않았습니까. 조심하셔야…….”

“아무도 난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 않았나.”

다소 딱딱하게 답한 이타르는 다시 턱을 괴고 분주히 주변을 수색하는 하일의 사신들을 구경했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이번 일은 분명한 지디마의 실책이었다. 만일 이 자리에 트라이하의 왕실 연금술사들이 왔다면, 그가 집무실에 무엇을 숨기고 있었는지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이 대륙엔 그만큼 연금술이 보급되지 않았다는 소리겠지.’

거대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지라 트라이하와는 꽤 사정이 다른 듯했다.

‘게다가 그 주술을 건 이는 분명 행방이 묘연하던 마라바스 라이델.’

이타르는 수정구슬을 들여다보았다. 이 영애는 그 아이와 닮았다. 무심결에 여동생을 떠올린 그는 카일 쪽으로 슬쩍 시점을 옮겼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차이엘드 공작이 당했군.”

***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켈트만의 수렵제는 최초로 중단되었다. 백주궁과 사냥터 사이가 가까운 편이었기에 타국의 사신들과 백주 일행은 백주궁으로 먼저 귀환했다.

간이 막사에 남은 나는 줄곧 꼿꼿하게 앉아 카일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영상을 본 내가 직접 산에 오르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나디아 공주님에, 나까지 경호하려면 경호 인원이 분산된다. 기사들도 나를 신경 쓰느라 카일을 찾는 데에는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나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이런 상황에서는 괜히 힘쓰려다 민폐가 되기 십상. 양손을 모은 채 카일이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기도를 시작하려 할 때였다.

“마님! 공작 전하께서 무사히 도착하셨다고 해요!”

“정말요?”

“네. 방금 날쌘 말을 타고 기사 한 명이 다녀갔어요.”

“다행이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일이 절벽에 떨어지거나 발을 헛디뎌 산에서 굴러떨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주변에 누가 있지 않던가요?”

바네사는 흠칫 놀라며 어떻게 알았냐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어떻게 알긴. 지디마의 생각을 보고 들었으니 알지.

‘반응을 봐서는 카일과 맞붙고 있었다던 가고일 백작도 데려오는 것 같은데.’

내가 본 영상 속에서 가고일 백작은 명치에 큰 부상을 입은 채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살아 있으리라 기대하긴 힘든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의 몸은 계속 움직였고, 심지어 의문의 힘을 발산하기까지 했다.

‘가고일 백작이 살아 있어야 추궁이 쉬울 텐데. 일단 카일 상태부터…….’

마중을 나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아 나는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디아 공주님. 호위를 붙여드릴 테니 먼저 백주궁에 가 계시겠어요?”

“저도 영애와 이곳에 남겠어요.”

“그럼 호위와 함께 여기 잠시 계세요. 저는 공작 전하의 상태를 직접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나디아 공주님에게 유능한 호위를 두 배 더 붙여준 다음 카일을 맞으러 갔다.

지평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곧 우의를 두른 카일이 말을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분 탓인가. 왜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분명 말고삐를 쥐고 말을 몰고 있는 건 카일인데. 기이한 이질감은 그가 가까워질수록 강해졌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하일드 집사장님의 얼굴도 좋지 않은 걸로 봐선 아무래도 카일에게 정신적으로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단순히 지쳤기 때문일까.

“마님.”

부르기에 돌아본 바네사는 평소와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다. 살기와 냉철함이 공존하는 얼굴. 그녀는 처음으로 진지했다.

“차이엘드 공작, 조금 다른 것 같지 않아요?”

“제 생각에도 그래요. 힘들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산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겠죠.”

나는 일전에 훔쳐본 지디마의 속마음을 바네사에게도 말해주었다. 내 말을 곱씹은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가고일 백작을 움직이는 힘, 마라바스의 거예요.”

“네?”

“어떻게 닿은 연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마라바스의 목소리도 들었다고 하셨으니 확실해요.”

“가만, 마라바스의 주술이라면…….”

“한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 들어가 정신을 지배해 인형처럼 부리죠. 원래는 연금술 영약을 이용하지만, 마라바스라면 아레테가 이쪽으로 개방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 영약을 개발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거든요.”

나는 새삼 바네사가 개그 캐릭터가 아니라 여주인공임을 실감했다. 아레티스트의 차기 보스 포스가 드디어 나오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차이엘드 공작도 마라바스에게 당했을지도 몰라요. 저 단단한 인간에게 나약한 마음이 있다면 말이죠.”

“그건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내가 진지하게 묻자, 바네사는 여상한 진지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확실한 방법이 있죠. 마님, 가서 안겨보세요.”

차기 보스로 보인다는 거 취소.

“안겨보라고요?”

“분명 뭔가 다를 거예요. 마님은 그걸 느끼실 거고.”

진지한 모습을 보니 바네사는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에서 갓 내린 카일에게 다가갔다.

“카일. 괜찮아요?”

그러자 카일은 어딘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다이앤 영애, 저는 괜찮습니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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