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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69화 (69/134)

#69

‘다이앤 영애? 누나나 아멜이 아니고?’

카일이 나를 이렇게 딱딱하게 부른 적이 있었던가. 아니, 단연코 없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게 그 증거였다.

하일드 집사장님을 비롯한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모두 낯선 호칭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하. 많이 피로하신 듯합니다. 우선 막사에서 쉬시고 내일 백주궁으로 이동하시지요.”

“그러지.”

하일드의 제안을 수락하는 카일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나는 경각심을 갖기로 했다.

***

거대하고 어두운 환상 앞에서 카일은 고개를 돌리고 몸을 수그렸다. 나를 발견하곤 입가를 가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보지 않아도 그들이 무슨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의 수군거림은 심장박동만큼이나 익숙했다.

「더러운 차이엘드의 계승자.」

「괴물 공작.」

「살인자의 곁에 다가가는 건 찜찜하지만……」

「자금이 걸린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들에게 달려가 당장이라도 따지고 싶었다. 내가 가족을 죽이는 걸 당신들이 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확신에 차서 지껄이냐고.

형들이 나한테 칼을 겨누는 게 어떤 느낌인지 당신들이 알기나 할까. 그런 상황이 오면 당신들도 가족을 죽일 텐데.

한없이 무서웠다. 믿어본 적도 없던 신에게 무릎을 꿇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두려웠다.

하지만 폭풍이 지나간 뒤,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차이엘드의 수장은 그런 자리였기에.

분노는 체념과 인내로 빠르게 대체되었다.

앞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두 돈을 노리고 오는 것이라 해도 괜찮았다. 자본을 대 주며 관심 없는 척 그들의 곁을 조금씩 차지할 수 있을 테니.

아주 작은 체온을, 아주 잠깐씩이나마 느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괴물이 아니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저 사람들이 내 앞에선 억지로라도 웃는 게 그 증거라고.

‘……내 욕심이었나.’

하지만 모르는 척하기에는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곁눈질과 날로 잔인해지는 소문들 사이에서 홀로 메말라가던 나날.

그 사이에, 장난스레 웃으며 뜨거운 체온을 마음껏 느끼게 해주었던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윽…….”

카일은 작게 신음했다. 두통이 밀려왔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한 머릿속에 가고일 백작에게서 들었던 음성이 겹쳤다.

「차이엘드 공작. 아직도 저항할 수 있다니…… 널 이용했던 자들을 떠올려라. 그래, 하일 제국 황가는 어떤가?」

어둠 속에서, 카일은 그것이 마라바스의 목소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

그날 밤.

“마님. 정말 차이엘드 공작과 함께 주무셔야겠어요?”

“카일이 위험할까요? 바네사가 생각하기엔 어때요?”

“새삼스레 뭘…… 밤의 차이엘드 공작은 마님께 늘 위험한 짐승이었죠.”

나는 때아닌 농담을 건네는 바네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카일의 침전에 들기 전, 바네사는 내 머리를 빗겨 주는 중이었다.

막사에 남은 건 하일의 사신들뿐인지라 이전보단 편해야 했지만, 어째 긴장감은 지금까지 중 최고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밤.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카일의 침전으로 향했다.

입구에 카일의 신변 관련 문제를 총괄하는 하일드 집사장님이 서 계셨다. 표정은 물론 좋지 않았다.

“집사장님. 검진 소견이 나왔나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헌데 전하의 상태가…….”

하일드의 말대로 카일의 상태는 뭔가 이상했다. 마라바스의 주술에 걸렸다니 당연한 일이겠지.

“그런데 왜 문밖에 서 계세요? 절 기다리신 건가요?”

“안에 나디아 공주님이 들어 계십니다. 공작 전하를 위해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손수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나디아 공주님께서 안에 계신다고요?”

왜일까. 순간 바네사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한 사람의 가장 약하고 여린 부분을 파고 들어가 정산을 지배하는 거예요.”

나디아 공주. 카일을 가장 이용해먹었던 황실의 핏줄.

“……!”

나는 들고 있던 물건들을 떨어트린 채 곧장 카일의 침전으로 튀어 들어갔다. 나디아 공주의 시녀들이 막사의 바로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막 너머에서 들려오는 나디아 공주의 비명.

“제가 들어가 볼 테니 다들 나가세요.”

“하지만…….”

나는 강제로 그들을 내보내곤 안으로 들어왔다. 펼쳐진 살벌한 광경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다, 다, 다이앤 영애…….”

바닥에 주저앉은 나디아 공주가 엉덩이 걸음으로 내 발치까지 기어왔다. 그녀가 손수 준비했다던 차는 쏟아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카일. 그거 내려놔요.”

눈에 초점이 없는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단검을 쥐고 있었다. 내가 그를 진정시키려 하자 바네사가 내 앞을 막아섰다.

“물러서세요, 영애. 공작은 지금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어요.”

아까까진 최소한의 이성이 남아 있었는데 갑자기 자제력을 잃고 마라바스의 주술에 넘어갔다면 그 이유를 추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디아 공주를 보고 황실을 떠올려서 이성이 흐트러진 건가. 그래서 마라바스의 주술이 정신을 완전히 지배한 거고.’

카일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그의 속을 가장 적극적으로 썩인 것이 황실이라는 건 잘 알았다.

“비켜.”

카일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위태롭게 말했다.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성이 온전히 마비되었다면 그의 속마음은 지금 황실의 일원인 나디아 공주를 찔러 죽이라 아우성칠 것이다.

“바네사. 비키라고 했을 텐데.”

“어쩐지 선뜻 10배를 부르시더라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계셨나?”

“비키지 않는다면 너부터 처리하지.”

카일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네사는 옷 속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곧장 그의 검을 받아쳤다.

카일은 지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기억나는 첫 만남과 비슷한 얼굴.

극단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기려 하기 전, 제발 자신을 붙잡아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나디아 공주의 어깨를 안아 진정시키며 말했다.

“바네사. 카일의 급소를 쳐서 기절시킬 수 있어요?”

“그건 위험해요. 공작이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리면 마라바스의 주술이 어떻게 발동될지 몰라요.”

어떡하지?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가장 좋은 건 바네사가 카일을 결박하는 것이지만 아레테가 없는 지금, 바네사는 카일과 검술 실력이 엇비슷했다.

둘 다 출중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지라 바네사가 카일을 제압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약혼반지를 잠깐 넘겨줄 수만 있다면…….’

하지만 내 반지는 카일만 뺄 수 있으니 이것도 불가능.

내가 바네사를 돕는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 나디아 공주의 경호에 빈틈이 생겼다.

‘공주님을 먼저 내보내는 방법은 너무 위험해.’

나디아 공주가 ‘차이엘드 공작이 나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어요.’ 하고 말하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랬다간 뒷말이 나오는 건 물론이요, 카일의 적들에게 아주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니.

‘최선의 방법은 마라바스의 주술 자체를 무력화시키는건데…….’

원작에는 지금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장면이 없었다.

작품 후반부에 아레테와 주술을 한 번에 무마시키는 묘약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이타르 드 트라이하만 제조할 수 있으니.

“크윽……!”

내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바네사가 카일의 검에 팔뚝을 내주었다. 피가 그녀의 겉옷에 찬찬히 번졌다.

“바네사!”

“전 괜찮으니 얼른 해결 방법이나 찾아주세요, 마님. 이런 상황 이용하는 거 잘하시잖아요!”

이용. 바네사의 말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주술은 말 그대로 주술. 부실한 컴퓨터 프로그램같은 것이기에 역이용할 수 있는 빈틈이 많았다. 예를 들어…….

“바네사. 마라바스의 능력이 기억의 가장 약하고 여린 부분을 파고 들어가는 거랬죠?”

“네. 사람이 정신이 피폐해지면 어느 게 제 욕망인지 구분하지 못하잖아요. 그런 원리랬어요.”

“욕망?”

“네. 마라바스는 신이 아니니 한 개인에게 없는 생각이 생겨나게 할 수는 없어요. 대신 애써 외면하던 욕망을 타오르게 하는 거죠.”

그래. 이거다.

마라바스의 주술이나 아레테가 가장 큰 욕망에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카일에게 다른 욕망을 일으키면 되는 일.

‘인간이 갖는 원초적인 욕망은 식욕, 수면욕, 그리고…….’

어차피 이 상황에 산해진미를 들이댄다 한들 카일이 반응할 리 없다. 수면욕? 자라고 했다간 되려 내가 영원히 잠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욕망은 하나.

“바네사. 시간 좀 끌어줄 수 있어요?”

“얼마나요?”

“잠깐이면 돼요. 카일이 이쪽 못 보게 해요.”

“알았어요.”

바네사는 움직임의 궤도를 바꾸면서 내 생각을 알아챘는지 경악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님.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전개 아니죠? 이게 무슨 19금 연극도 아니고…….”

“어쩔 수 없잖아요.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말이 되는 것 같긴 한데…… 만에 하나 안 먹히면 어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만 수치스럽고 민망해 죽는 거지. 나는 나디아 공주의 앞에 자세를 낮추고 머리카락을 들어 올렸다.

“공주님. 저 좀 도와주세요.”

“뭐, 뭐든…… 어떻게 하면 될까요?”

“첫째.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은 모두 혼자만 알고 계셔주세요.”

“알았어요.”

대답은 잘하시지.

“둘째. 제가 신호를 보낼 때까지 고개를 돌리고 계세요.”

“알겠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드레스 단추 좀 풀어주세요?”

“네?”

나디아 공주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나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그녀를 재촉했다.

“얼른요. 시간이 없어요. 아예 뜯어버려도 돼요.”

“……알았어요.”

나디아 공주는 아주 터프한 손길로 내 드레스를 반쯤 벗겼다. 얇은 슈미즈 차림은 상당히 추웠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제 고개 돌리시고.”

“아…… 네.”

나는 부디 이 작전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카일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지척에 접근한 것만으로도 동요했다.

‘실패하면 쪽팔려서 죽는다.’

결의를 다진 나는 최대한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하기 위해 머리를 쓸어올리며 농염한 목소리를 냈다.

“카일…… 누나 추운데.”

“……!”

툭.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단검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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