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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70화 (70/134)

#70

욕망 중 욕망은 역시 성욕. 나를 바라보는 카일의 눈동자에 점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옆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바네사의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렸지만 못 본 척하자.

“이제 된 건가? 카일, 괜찮아요?”

“…….”

카일은 제 발치에 떨어진 단검으로 느릿이 시선을 옮겼다가 피가 번진 바네사의 팔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파악하곤 차츰 굳어지기를 잠시. 카일은 나디아 공주 쪽으로도 시선을 옮겼다.

“윽…….”

“카일. 괜찮아요?”

“마님, 물러나세요.”

역시. 카일의 정신을 무너지게 하는 건 황실 핏줄인 나디아 공주의 존재였다. 카일은 그녀를 보자마자 다시 정신을 지배받기 시작했다. 괴로워하며 차츰 정신을 빼앗기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바네사는 카일이 내려둔 검을 발로 차 멀리로 옮기며 내게 말했다.

“마님. 나디아 공주님을 빼돌릴 동안 공작 전하의 주의를 끌어주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요?”

“아까 하셨던 방법이 먹히는 것 같으니 그걸로 쭉…….”

“바네사, 지금 나랑 장난해요?”

“어쩔 수 없잖아요.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째 아까와 입장이 반대가 된 기분. 그러나 바네사의 말대로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엄청난 쪽팔림을 무릅쓰고 요염함이라는 것을 짜내 카일에게 찡긋 추파를 던졌다.

“카일. 덥지 않아요?”

“마님. 아까는 춥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유혹에 일관성이 영……”

“시끄러워요, 바네사. 그런 게 중요해요?”

지금은 황실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카일의 욕망을 크나큰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이번에도 카일은 나디아 공주의 존재를 잠시 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젠장. 효과가 있으니 그만둘 수도 없고.

곁눈질로 힐끔 바라본 나디아 공주는 이미 삶아낸 문어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내 시선의 흐름을 읽은 카일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카, 카일.”

바네사가 막 나디아 공주를 일으키려던 참이었기에 나는 몹시 다급해졌다. 아무 말이나 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난주 밤에 뭐 해 보고 싶은 거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지금 할래요?”

“어후야…….”

‘바네사. 얼른 안 나가요? 거기 멈춰서서 이상한 리액션 할 거예요?!’

나는 눈빛으로 바네사를 꾸짖곤 다시 카일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다른 의미로 위험한 상황이 된 것 같았다.

정신을 반쯤 차린 것 같긴 한데 여전히 이성은 부재중인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디아 공주가 조금씩 뒷걸음치느라 부스럭 소리가 나면 제 영역에 있던 먹잇감이 도망가는 걸 본 맹수처럼 눈빛이 사나워졌다.

나는 나디아 공주에게 향하려는 카일의 앞을 막아섰다. 이러다 카일이 단검을 주워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내가 여기 있는데, 안 안아줄 거예요?”

“…….”

“난 카일이 지금 당장 날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이번 대사는 내가 들어도 낯이 뜨거웠다. 민망해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몸의 일부가 닿아 있어 카일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내가 무슨 짓을……」

「이젠 빼도 박도 못 하게 괴물이 된 건가.」

「그 어둠의 정체는 무엇이지.」

「……누나.」

죄책감, 그리고 두려움. 그간 괴물 소리를 들으며 홀로 짊어져 왔을 혼란과 슬픔이 고스란히 내게도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한참 위에 있는 카일의 뒷머리와 목 언저리를 쓸어주었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황망하던 눈에 조금씩 초점이 돌아왔다. 마라바스 때문에 강제로 떠올리게 된 나쁜 기억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왔다는 신호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제 기억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건 얼마나 무서운 일일까. 나는 찬찬히 그와 거리를 좁히며 속삭였다.

“괜찮아요.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

“카일은 괴물이 아니에요.”

줄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카일은 동요했다. 그의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더니 툭, 눈물을 흘려보냈다.

이렇게 애잔하게 우는 사람을 어떻게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엄지로 그의 뺨을 훑어냈다.

“지금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울고 싶으면 더 울어도 돼요.”

“……누나.”

카일은 이제 괜찮다는 듯 희미한 웃음을 머금으며 익숙한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그에 따라 나도 차츰 긴장을 놓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나디아 공주님이 시야에서 사라진 게 효과가 있…… 응?’

카일은 나를 기둥으로 몰아세웠다. 딱딱한 벽에 머리를 찧지 않도록 손으로는 내 뒷머리를 받친 채였다.

“……카일?”

방금까지만 해도 맑았던 카일의 눈은 욕망에 사로잡혀 절절 끓고 있었다. 마라바스의 주술 때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익숙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적절히 자극한 다른 욕망이 고개를 든 것 같았다.

“카일. 뭘 해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좀…… 읏……”

카일은 한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곤 드러난 목을 깨물었다. 간질거리면서도 뜨거운 감각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또다시 카일의 정신을 지배하는 욕망의 세부사항들을 알아내는 건 쉬웠다.

「……내 이름 불러줬으면 좋겠어.」

「울리고 싶어.」

「날 사랑한다고 해줘. 제발.」

「계속 내 곁에 머무르겠다고 말해.」

울리고 싶다는 것만 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카일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로 했다.

“카일. 사…… 읍.”

무심결에 복수하는 것일까. 카일은 내가 줄곧 써오던 방법으로 내 고백을 차단했다.

***

바네사는 나디아 공주를 데리고 실내온도가 훅훅 치솟는 장막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허. 바깥은 이리도 시원한데…….’

차이엘드 공작과 다이앤 영애가 있는 장막 안은 여름이나 다름없었다. 바네사는 새삼 아멜의 기지에 감탄하며 픽 웃었다.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지?’

욕망을 욕망으로 막다니. 아멜의 비범함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정말 예상치도 못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혈기왕성한 차이엘드 공작의 시커먼 욕망을 마님이 계속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어.’

마라바스의 주술을 완벽히 해제하려면 해제 마법이나 비슷한 효과를 내는 약이 필요했다.

다행히 트라이하의 사신들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도움을 구할 수 있으리라.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디아 공주님. 괜찮으신가요?”

바네사는 따스하고 상냥한 얼굴로 물었다. 말투도 사근사근하기 짝이 없어 언뜻 보면 천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후끈거리는 볼을 손등으로 식히던 나디아는 그 미모에 넋을 잃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여자가 봐도 정신을 놓을 만큼 우아한 모습.

“고, 고마워요. 이름이 뭐라고 했죠?”

“바네사랍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셨는지 궁금하실 듯한데, 주제넘지만 제가 조금 설명드려도 괜찮을까요?”

사근사근. 바네사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고아한 모습으로 물었다. 공주보다 더 공주 같은 그 모습에 나디아는 홀린 듯 주억거렸다.

‘넘어왔군. 이러면 설명하기 더 편하지. 어디 보자, 황실 문제는 조금 뭉뚱그리고…….’

바네사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차이엘드 공작에게 어떤 주술이 걸려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 주술을 해제하기 위해 마님께서 얼마나 용기 있는 행동을 하셨는지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이리도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해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내 고용주들이 그런 쪽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대개 고용인은 고용주의 이미지를 닮는다고 했다. 수족이 되어 수행하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그런 평가는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

“그럼 차이엘드 공작은 내면의 욕망에 따라 행동한 건가요?”

나디아 공주가 물었다. 바네사는 함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차이엘드 공작이 황실에 은근히 쌓인 게 많은 눈치던데.’

차이엘드 공작이 황실의 돈줄 취급받는다는 것은 차이엘드의 고용인이라면 누구나 분개하는 사항이었다.

그렇다고 나디아 공주의 물음에 ‘네. 너희한테 쌓인 게 많아서 이성 잃은 김에 찔러 죽이려고 한 것 같아요.’하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한 후, 바네사는 간접적으로 죄책감을 자극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일개 고용인인지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공작 전하께서는 자신을 물건처럼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렇지. 뭔가 깨닫는 게 있지?

“우울증에 시달리실 때 우연히 만난 게 저희 마님이셔서 두 분은 저렇게…… 큼, 아무튼 그런 거예요.”

졸지에 카일과 아멜의 첫 만남을 정확하게 맞춘 바네사였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디아 공주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을 하는 걸 보니 일도 잘 해결될 것 같았다.

“그럼 공주님, 백주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경호는 다이앤 영애가 붙여 준 다른 기사들이 있으니 바네사는 이만 가보세요.”

“아닙니다. 어찌 감히…….”

“명령입니다. 여기 남아 차이엘드 공작 내외를 돌봐 주세요.”

그럼 나야 고맙지.

바네사는 거슬리는 혹 하나를 떼어낸 마음을 숨기고 그리하겠노라고 은은히 답했다.

더는 방해할 생각이 없는지, 나디아 공주는 호위를 받으며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럼 이제 주술을 해제하는 마법약을 어떻게 구하느냐가 문젠데…….’

바네사는 팔짱을 낀 채 오래전, 마라바스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이 약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아레테가 듣지 않는 몸이 돼. 저주형 아레테나 지속형 아레테는 아예 풀려버리고.”

“대단하다…… 마라바스가 만든 거야?”

“트라이하에 있을 때 개발한 거야. 지속시간동안 복용자도 아레테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흠이지만……”

“근데 되게 예쁘다. 꼭 은하수를 담은 것 같아.”

빙긋 웃으며 평했을 때, 마라바스는 분명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했었다.

‘개자식. 좋아라 할 땐 언제고 나를 배신해? 아레테에 미쳐서…… 가만.’

맹렬히 과거의 동료이자 지금의 원수를 씹어대던 바네사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일전에 장롱에 숨었을 당시 차이엘드 공작이 제게 건넸던 약병. 버린다고 하는 것이 일이 바빠 휴대하고 있었는데, 생김새가 어째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리엔 공주는 이걸 어떻게 구한 거지?’

트라이하 사신들과 리엔 공주가 접촉했다는 이야기는 차이엘드의 정보부에게서 들었다.

차이엘드 공작을 꼬시려 벌인 일인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마님, 제가 갑니다!’

다시 충실한 하인 마인드를 장착한 바네사는 카일과 아멜이 있는 막사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지금 들어가도 되나?’

어째 드리운 장막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찮았다. 그간 질리도록 들어온 마님의 앓는 소리.

“…….”

마라바스의 주술을 해제하지 못하면? 마님이 복상사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들어가면? 차이엘드 공작의 손에 죽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죽지 않는다 한들 월급은 무사하지 못하리라.

‘……마님을 믿어보자. 우리 마님은 할 수 있어.’

잠시 고민한 바네사는 차이엘드 공작 부부의 사생활과 제 월급을 지켜주기로 하고 종이와 펜을 꺼내 끼적이기 시작했다.

***

“카일. 그만, 아…….”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그를 올려다보던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싫은 건 아니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몸이 축 처져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또다시 부드럽게 움직이는 카일에 기함하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을 땐, 웬 약병이 이쪽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저건 바네사 글씨잖아?’

어찌나 정확히 조준을 한 것인지 바네사가 굴린 약병은 정확히 내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일의 몸과 체중 때문에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지만 낑낑거리니 겨우 약병이 손에 닿았다.

‘카일이 이걸 마시게 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카일은 한참 전부터 나 외의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그에게 약을 먹일 방법은 단 하나.

‘왜 자꾸 일이 이런 쪽으로만 해결되는 것 같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약병을 열었다. 그것을 내 입에 털어 넣기 전, 카일에게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리 와서 키스해줘요, 응?”

잠시 후.

“…….”

쿵.

내가 머금고 있던 물약을 죄다 빨아 삼킨 카일이 기절하듯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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