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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71화 (71/134)

#71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조금 무거운 것만 빼면 컨디션이 좋았다. 카일은 잠결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 좋은 악몽이라는 게 존재한다니.’

마라바스의 저주 탓일까. 방어의 아레테를 남발했기 때문일까. 한동안 잊고 지내던 악몽을 꿨다.

제 손으로 아버지와 형제들 모두를 절벽 아래로 밀어내는 꿈. 등에서 손을 뗄 때의 감각이 너무도 선명해 꿈속에서는 절대 그것이 꿈인 줄 모르던 환상.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꿈속에서 늘 그러했던 대로 장검을 쥐고 둘째 형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저를 꼭 끌어안았다.

배에 두른 팔에 기분 좋을 정도로만 힘을 주며 살인을 저지르려는 제 몸을 막았다.

꿈이었지만 관능적인 체향과 따뜻한 체온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카일. 아직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 괜찮아요.’

‘남들이 원하는 대로 스스로를 괴물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아멜리아 다이앤.

지독하고 단단한 악몽의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와 구원을 선사하는 연인.

‘카일. 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가.

그녀의 따스함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을 때, 곤히 자고 있는 그녀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다.

“……누나.”

카일은 작게 아멜을 불러보았다. 그녀는 지친 듯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악몽을 꾸기를 바라진 않지만, 만약 당신이 악몽에서 헤맨다면 구원자는 나였으면 좋겠다. 카일은 아멜을 더 바짝 끌어안았다.

‘그건 그렇고.’

찬찬히 곱씹어본바, 자고 일어나니 개운해진 것은 머리뿐이었다. 상황은 그리 개운하지 않았다.

마라바스의 주술에 걸린 가고일 백작과 전투를 시작하자마자 정신이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가 맞붙는 검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부여받은 아레테가 방어 계열이 아니었다면 어떤 난리를 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도 살육을 참아내는 것뿐, 주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군.’

마라바스의 주술은 집요했다. 정신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기억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이젠 그만 눈을 감으라 종용했다.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나디아 공주를 보자 갑자기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해 온 것들이 사실은 앙금으로 쌓여 있던 것일까.

“…….”

꽤나 야릇하고 위험한 방법이긴 했지만 이번에도 자신을 구한 건 아멜리아 다이앤이었다.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카일은 자신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았다.

첫째. 나디아 공주와 바네사를 만나 유감을 표하고 사과한다.

둘째. 지디마를 끌어내린다.

셋째. 마라바스를 죽여 버린다.

‘레이디 클레어의 공격을 받은 마라바스는 도망했겠군.’

고국인 트라이하로 향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트라이하가 로열 알케미스트였던 그를 싸고돌 수도 있다. 만일 그럴 경우……

‘전쟁이다.’

자금도 꽤 있었다. 게다가 트라이하와 전쟁을 할 경우 특수를 확보하는 건 차이엘드 쪽이었다.

카일은 산뜻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파멸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한편,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던 아멜은 선득한 기운을 느끼곤 눈을 반짝 떴다.

코앞에서 파멸 남주가 산뜻한 웃음을 머금으며 재앙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걸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왜 이래? 마라바스한테 당한 것 때문에 다 쓸어버리려는 건가?!’

이떻게 막은 파멸인데 이럴 수는 없다. 아멜은 카일의 얼굴을 감싸곤 다급하게 물었다.

“카일. 무슨 생각 해요?”

“그냥 기분 좋은 생각.”

마침 어제 바네사가 구해다 준 약효가 다 떨어졌는지 카일의 속마음이 영상으로 보였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포탄과 화살이 날아다니는 그림. 아, 저기 날아가는 머리는 마라바스의 것이었다.

“러브 앤 피스. 사랑과 평화. 잊지 않았죠?”

“……물론.”

얼굴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하는 것 좀 보게.

“전쟁은 절대 안 돼요. 그들이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지 말아요.”

“꿈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신 것 같은데.”

“제가 카일 꿈에 나왔어요?”

“거의 항상.”

부드럽게 웃은 카일은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고 이불을 추켜올려주었다.

“졸리신 것 같은데 조금 더 주무십시오. 채비가 끝나면 깨우겠습니다.”

“마차에서 자면 되는데…….”

피곤하긴 했는지 아멜은 웅얼거리다 금방 잠들었다. 백주궁으로 돌아가자는 소리로 알아들었나 보다.

‘사랑과 평화라.’

두 단어가 모두 당신을 지칭하는 것 같다.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아멜의 이마에 길게 입 맞췄다.

사신단의 일정은 2주 정도가 남았으나, 하일 제국의 사신들은 오늘 중으로 켈트만을 뜰 작정이었다.

***

“분부하신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차질이 없도록 서두르십시오. 나디아 공주께는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예, 전하.”

하일드는 카일이 내린 상당한 양의 명을 받들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사신들이 귀국하려면 표면상 가장 신분이 높은 나디아 공주의 승인이 필요했다.

수하를 시켜 의견만 빠르게 교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테지만 카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놀라셨을 테니.’

나디아 공주는 베르드가 즉위하기 전까지 공주 취급도 못 받았는데 괜한 데에 화풀이를 한 기분이었다.

황실이 차이엘드의 돈을 끌어다 쓰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뗄 즈음이었다.

“어머. 오늘은 괜찮으세요?”

“…….”

바네사 메이브란테였다. 보아하니 아멜에게 향하는 길인 듯했다. 카일에겐 그녀의 손에 들린 트레이보다도 왼팔이 더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정신을 반쯤 놓은 자신이 베어버린 왼팔이.

“……팔은 괜찮습니까.”

“아, 뭐…… 네.”

바네사는 속으로 경악했다. 걱정도 해줘? 차이엘드 공작이? 경호비를 10배나 받아 처먹었는데?

게다가 엄청난 자괴감과 자책감에 시달리는 얼굴이었다. 바네사는 되려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더 팼는데…….’

어젯밤 차이엘드 공작은 마라바스의 주술에 넘어가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 말인즉, 그를 상대하는 척 요령껏 패도 고용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상황.

‘한 대는 맞아준다.’

바네사는 왼팔을 슬쩍 내주곤 카일의 몸을 야무지게 두들겼다. 그동안 그가 얄밉게 군 것들이 하필 그때 우르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나한테 맞은 건 기억 못 하나?’

얼굴은 피하길 잘했다. 바네사는 아무 문제 없다는 듯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이런 상처는 상처도 아니니까. 혹시 사과하실 생각이라면 그것도 괜찮아요. 저는 마님을 경호한다는 제 일을 한 것뿐이에요.”

게다가 사과를 들으면 정말 미안해 죽을 것 같거든.

바네사는 씁쓸한 얼굴을 하는 카일을 뒤로하고 아멜에게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차이엘드 공작은 괴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해서 당장 하일 제국으로 돌아가 정세를 살피는 것이 앞으로의 전략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아…… 그런가요.”

나디아 공주는 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의식하지 못한 채 카일의 제안에 귀를 기울였다.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 어젯밤 보았던 울 것 같은 얼굴이 떠올라서.

물론 다이앤 영애를 잡아먹을 듯 덮치는 차이엘드 공작이 더 강렬하게 떠올랐지만, 나디아가 충격을 받은 건 역시 차이엘드 공작이 어제 보였던 살의였다.

‘바네사가 한 말이 정말이라면.’

베르드와 특히나 사이가 좋은 나디아는 황실의 자금이 어떻게 마련되는지를 비교적 잘 알고 있었다.

추가 예산도, 1년 경비도, 사치비나 기타 자금도 다 비슷한 방법으로 마련되었다.

황실의 일원이기 이전에 한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어젯밤 이성을 잃은 차이엘드 공작이 황실 핏줄인 자신을 죽이려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도 망설였어. 게다가……’

방금 전. 차이엘드 공작은 자신을 보자마자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괴물 공작이 고개를 숙인 것만으로도 놀라운 상황.

“어젯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황실과 공주님께 위협을 가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헌데 차이엘드 공작은 그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는 듯 깔끔하게 사과했다. 나디아는 의문이 들었다.

왜 차이엘드 공작은 화내지 않는가.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기에.

경제적인 계산을 마치고 황실의 일원인 자신을 존중하는 척하는 게 더 이득이라 판단하여 사과했을지도 모른다.

차이엘드 공작이 무언가를 하면 늘 사람들은 계산 후 득이 되는 대로 행동한 것이라고 떠들었으니.

하지만 나디아가 느끼기엔, 그는 그저 유감이라고 느끼는 일에 사과한 것뿐이었다.

‘바네사는 차이엘드 공작이 상처받았다고 했지.’

들을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이해가 갔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사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 점을 악용해 기생해오던 게 하일의 황실이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오히려 이쪽인데.’

켈트만이라는 낯선 공간에 떨어져 있으니 하일의 황실이 얼마나 무능력하고 의존적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민망하고 화가 나 할 수 있다면 어디론가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나디아 공주님.”

“아, 네.”

“괜찮으시다면 지금 답변해주시길 원합니다.”

카일리안 차이엘드는 지금 채비가 되는 대로 하일 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결정은 켈트만을 향한 일종의 시위이리라.

“지금 당장 떠난다면 켈트만과 사이가 틀어질 거예요. 사신단의 목적과 전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디아의 염려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간수하지 못해 먼저 동맹의 신의를 저버린 것이 하일인 이상, 우위는 켈트만이 점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 켈트만과 동등한 위치에 서겠다는 하일의 목표는 이루지 못하겠지요.”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켈트만과 동등한 위치에 서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 왜……”

나디아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냐고.

“앞으로 켈트만과 동등한 위치에 설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

“하일이 우위를 점할 겁니다. 공주님께서는 켈트만의 보복을 걱정하시는 듯하지만, 염려하시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차이엘드의 명예를 걸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강력한 보장이 있을까. 나디아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른침을 삼키곤 답했다.

“알았어요. 차이엘드 공작의 판단을 믿겠어요. 대신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왜 하일을 위해서 차이엘드의 명예까지 거는 거죠? 공작에게는 별로 득이 되는 판단이 아닌 것 같은데. 애국심인가요?”

“애국심이라…….”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다. 애당초 차이엘드에게 부와 명예를 제외한 다른 것은 무가치했다.

차이엘드의 시스템을 유지해줄 국가라면 얼마든지 있었고, 아예 새 국가를 세우는 일도 가능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모든 자원을 들여 복잡하고 완곡하게 돌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

“제 연인이 혼수품으로 평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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