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켈트만에서 각국의 사신들을 위해 공식적으로 준비한 일정은 한 달을 꽉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렵제를 명목으로 끌어모은 각국의 사신들이 겨우 2주 만에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늘 아침, 차이엘드 공작을 필두로 한 하일 제국의 사신단이 준비되는 대로 귀국하겠다고 통보했기 때문이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제국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약소국의 경우, 차이엘드라는 방어막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도 슬슬 눈치를 보며 귀국하려 하니 별생각 없이 일정을 끝마치려던 타국의 사신들도 동요했다.
사냥대회 후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던 수렵제는 이미 파장. 하지만 지디마의 걱정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차이엘드 공작…….’
지디마는 책상을 쿵 내리쳤다. 그를 짓누르는 무게감만큼이나 묵직한 소리가 백주의 집무실에 가득 찼다.
차이엘드 공작이라면 가고일 백작이 왜 그때 그곳에 있었는지, 누가 그를 그곳에 두었는지 금방 알 수 있으리라.
타국의 사형수를 숨겨준 것은 분명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독대한 다이앤 영애를 울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차이엘드 공작이 알았다간 눈이 뒤집어지겠군.’
분명 차이엘드 공작이 문제 삼을 만한 사항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터졌다간 백주의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귀국길에 군대를 파견해 방해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차이엘드의 경호원 숫자가 너무 많았다.
육로를 이용해 돌아간다면 살수들을 보내 암살을 노려보겠으나 차이엘드는 범선을 이용해 물길로 돌아간다고 했다.
‘배 위에서 살수가 잡히면 약점을 잡히는 셈.’
묘책을 떠올릴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귀국을 서두르니 지디마는 냉수만 벌컥벌컥 비웠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귀신이라도 들린 것 같던 가고일 백작의 생명이 위독하다는 사실이었다.
‘늙은이가 증언을 하지 못할 테니 일단 안심이군.’
찬물을 마신 탓일까, 머릿속이 차츰 정리되었다. 자세히 따져 보면 지금 상황은 차이엘드 공작에게도 그리 좋지 않았다.
‘가고일 백작에게 당한 영랑들이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했지.’
차이엘드 공작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해친 것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하일 제국의 몇이나 그 말을 믿어줄지는 의문이었다.
아니, 겉으로는 모두 공작을 믿는 척하리라.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하지만 공작의 주장에는 물증이 없었다.
게다가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도 하일 제국, 일정을 마치기도 전에 귀국을 택한 것도 하일 제국이었다.
‘외교상 결례를 두 번이나 저지르다니.’
차이엘드 공작과 돈으로 겨루는 건 자살행위였으나 상황을 읽고 수를 쓰는 일이라면 오랜 재위 기간 동안 단련해온 것이었다.
일단은 국채를 발행해 국내의 자산가들의 힘을 빌려 당장 급한 재정 문제를 끈 다음, 하일과 본격적인 싸움을 해도 늦지 않으리라.
‘아무리 날고 기는 차이엘드 공작이라 할지라도 연륜 앞에서는 맥을 못 출 터.’
지디마는 그간 자신이 이뤄온 외교적 성과들을 곱씹으며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았다.
적군에게 타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비장의 무기가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그였다.
***
만능인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이 나서자 하일 측의 귀국 준비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차이엘드가 켈트만에도 재산이 상당하다는 게 사실인가 보네.’
아멜은 카일의 호출 한 번에 불려 나온 수많은 마차들을 보며 기함했다. 21세기로 치자면 차이엘드는 다국적 기업이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별장과 마차가 있었으며 당연히 차이엘드에 몸담는 자들이 존재했다.
‘하긴. 켈트만의 국영사업에도 깊게 관여하고 있다고 했으니 민영사업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차이엘의 재력과 권력은 매번 놀랄 정도였다. 아멜은 생각하기를 포기하곤 준비된 마차에 오르려 했다.
“다이앤 영애!”
그런 아멜을 리엔 공주가 불러세웠다. 얼굴에 아쉬움이 그득 묻어나는 것이, 차이엘드의 사신들을 떠나보내기 싫은 눈치였다.
아멜도 조금은 그녀와 정 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리엔 공주님. 그간 친절히 대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영애. 부디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아버님께도 꼭 안부 전해주시고요.”
“기회가 된다면 다이앤 백작저에 들러주세요. 부친과 함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내뱉는 순간 아멜은 지디마가 리엔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철렁했다.
어쨌든 리엔은 차이엘드의 피앙세 자리를 차지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달성하지 못한 셈. 갑자기 그녀의 신상이 걱정되었다.
뒤따라 마차에 오르려던 카일은 아멜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를 단번에 눈치챘다. 연인은 정이 많아 탈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리엔 공주님과는 곧 재회할 겁니다.”
어딘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발언이었으나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아멜은 리엔 공주와 다시 한번 작별의 인사를 나누곤 마차에 올랐다.
카일이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자 마부가 고삐를 쥐고 말을 몰았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머물렀던 백주궁도 점점 작아졌다.
“카일. 곧 재회할 거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누나가 좋아하는 사랑과 평화.”
파멸 남주가 말하니 그토록 부르짖던 사랑과 평화도 어째 작전명처럼 들렸다.
‘그러고 보니 리엔은 카일과 뭔가를 거래한 것 같았어.’
대체 뭘까. 아멜은 카일의 정신에 ‘사랑과 평화’를 한 번 더 세뇌했다.
***
비슷한 시각, 하일 제국의 황궁.
베르드는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시종이 나이프로 신문을 개봉했다.
붙어 있던 신문지가 낱장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신문의 헤드라인이 드러났다.
[사신단 파견 2주차… 그간의 성과는?]
오늘도 특별할 것 없는, 지극히 평화로운 헤드라인이었다. 시종이 따라주는 홍차를 몹시 흡족하게 음미한 베르드는 거드름을 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 황제가 되어 깨달은 것이 있네.”
‘뭐? 갑자기?’
베테랑 시종은 당황을 티 내지 않고 그러셨구나, 하는 태도로 응수했다.
“짐의 자식 같은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칠 만한 일이 생기면 신문의 헤드라인이 먼저 뒤바뀌더군.”
홀짝. 베르드는 여유롭게 홍차를 입에서 굴리다 말을 이었다.
“짐의 일은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지 않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무척 중요하지.”
베르드는 스콘에 살구 잼을 바르라 명하며 뜬금없는 신문 예찬을 이어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 있어 신문은 믿을 만한 정치적 지표였다.
뭔가 일이 터지면 항상 헤드라인에 드러난다. 그러니 헤드라인이 평범하도록 유지한다면 황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드는 그렇게 확신하며 스콘을 와작 베어 물었다. 기분 좋은 단맛이 입안에 퍼질 즈음.
“폐, 폐하! 지금 켈트만의 사신들이 귀국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의 확신이 와장창 깨졌다.
“뭐? 일정은 아직 한참 남지 않았나!”
“자세한 것은 전보에 적혀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대형 사고가 생긴 모양입니다”
“대, 대형 사고?”
툭. 그가 들고 있던 스콘은 잼을 바른 면을 아래로 추락했다. 소생 불가였다.
“나디아는?”
“공주님께서는 안전히 귀국하시고 있는 듯합니다만…… 듣자 하니 차이엘드 공작이 지시한 귀국이라고 합니다.”
“허…….”
카일의 어마어마한 인내력을 가장 잘 아는 베르드였다. 그런데 공작이 못 참고 귀국을 선언하다니. 아무래도 대형 사고가 터진 것이 분명했다.
“이거 저리 치우게.”
죄 없는 신문만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
예상보다 일찍 하일의 항구에 도착한 우리는 곧장 마차로 갈아타 차이엘드 공작저로 향했다.
범선도 눈물이 날 정도로 편안했건만 마차는 더했다. 벨벳 시트의 보드라운 감촉을 느끼던 내게 카일이 쿠션을 내밀었다.
“여정이 피곤하셨을 테니 주무십시오.”
“자야 하는 건 카일이죠. 저는 여정 내내 잘만 잤는걸요?”
나는 괜찮다며 사양하는 카일을 휙 잡아채 내 무릎을 베게 했다. 막상 누워보니 괜찮은지 카일은 저항하지 않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얼른 자요. 공작저에 도착하면 깨워줄게요.”
“……이대로 있는 게 더 좋습니다.”
카일은 눈을 마주한 채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조심스러운 손길을 타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보였다.
마라바스가 가고일 백작을 통해 아레테를 사용했을 당시 하일 제국의 영랑들이 카일을 노려보며 독설을 퍼붓던 장면이었다.
정신을 잃은지라 상한 물고기처럼 생기 없는 눈과 달리 그들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카일은 그 가시에 찔려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였으면 지나가던 사람 소매라도 붙잡고 엉엉 울었을 텐데.’
오히려 이런 고통쯤이야 심장박동처럼 익숙하다는 듯 굴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누나.”
“누가 이렇게 예쁜 내 약혼자를 욕했나, 하는 생각.”
시공간이 오그라드는 내 말을 들은 카일의 눈가가 곱게 휘었다. 뒷좌석에서 난데없는 기침 소리가 들려온 것만 빼면 완벽한 분위기였다.
“캑, 캑…… 아, 죄삼다. 사레들려서.”
“…….”
나는 민망함에 시선을 피했다. 평소대로라면 바네사를 죽일 듯 노려봤을 카일도 이번엔 별말 하지 않았다.
「저 여자한테는 빚진 게 있으니까.」
「리엔 공주가 준 약을 때맞춰 사용해주지 않았더라면……」
나중에 바네사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 그녀가 내게 준 아레테를 해제하는 묘약은 카일에게 받은 것이라고 했다.
카일의 지금 생각을 보니 그 약을 준 건 리엔 공주인 것 같은데. 리엔 공주는 트라이하의 특산품을 어떻게 구한 건가.
“카일. 그때 마셨던 약을 차이엘드 공작저에 조금 구비해두는 게 어떨까요?”
“갖고 싶으십니까?”
약을 갖고 싶냐니. 물론 연금술로 만든 약인지라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 예쁘긴 했다. 꼭 별을 퍼담은 것 같았으니.
“유사시를 대비해두면 든든하잖아요. 안심도 되고.”
“알겠습니다. 거래가 가능한지 비공식 노선으로 연락을 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비공식 노선? 그거 트라이하의 상단이 파는 거 아니었어요?”
내 질문에 카일과 바네사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왜 원작을 읽은 내가 가장 정보력이 떨어지는 건가.
‘원작에서 저 물약을 쓴 건 마라바스나 이타르였는데…… 잠깐.’
불길한 기분이 온몸을 훑었다.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 애써 웃으며 물었다.
“리엔 공주님에게 그 약을 넘긴 사람이 누구…… 일까요?”
제발, 제발 아니어라. 하지만 기도한 보람도 없이 카일과 바네사는 단번에 대답했다.
“이타르 드 트라이하. 트라이하의 3황자입니다.”
젠장. 왜 자꾸 악역이랑 접점이 생기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