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하일과 켈트만을 둘러싼 정세가 날로 급변했다. 그 중심인 차이엘드에 이목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왜 백주의 수렵제가 파투났는지 실마리라도 건져 보려는 풋내기 기자들은 차이엘드 공작성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연륜 있는 기자들은 진작 포기하곤 차이엘드에서 언젠가 할 공식적인 발표를 기다렸다. 오늘은 사신단이 귀국할 예정이니 뭐라도 건지기를 바라며.
그러나 정작 폭풍의 중심인 차이엘드 공작저는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고용인들은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며 청소에 열을 냈고, 주방장은 만찬을 준비했다.
침구를 볕에 널고 팡팡 털던 고용인 하나가 소리쳤다.
“저기 마차가 들어옵니다!”
쾌활한 외침에 공작성의 고용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집무실에 있던 클레어 또한 그 목소리를 듣고 펜을 내려놓았다.
‘아멜이 돌아왔다고?’
정보원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 듣고 ‘어떻게 하면 켈트만을 훌륭하게 조질 수 있을까?’ 하고 골몰하느라 요즘은 짜증만 가득했다.
마라바스 추격에도 영 속도가 붙지 않아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었는데 이런 희소식이라니.
클레어는 답지 않은 빠른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저 멀리서 아멜의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레이디 클레어!”
“…….”
“오랜만이라 그냥 이렇게 불러 봤어요. 언니, 잘 지내셨어요?”
“왔니?”
호칭에 일순간 서운했던 클레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빙긋 웃으며 아멜을 맞았다.
고용인들 또한 우르르 달려 나와 아멜의 겉옷과 장갑을 받아내었다. 아멜은 켈트만과 달리 평화로운 차이엘드의 분위기에 금방 심취했다.
“특별 만찬을 준비하라고 지시해 두었으니 기대해도 좋아.”
“와, 정말요?”
“그럼.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 위주로 준비하라고 했어. 아, 여독이 있을 테니 올라가서 쉴래?”
안 그래도 약간의 피로를 느끼고 있던 아멜이었다. 카일도 가담해 그녀에게 휴식을 권유했다.
“마차에서도 내내 뒤척이지 않으셨습니까. 들어가서 잠시 주무십시오.”
“카일은 안 피곤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하일드. 사람을 시켜 목욕 준비를 서두르십시오.”
그래. 이런 곳이 풍요롭고 따스한 차이엘드 공작가였다. 아멜은 소르르 차오르는 행복감에 내내 미소를 머금었다.
클레어도, 카일도, 그 주변에 서 있던 고용인들도 그녀를 따라 훈훈하게 웃었다.
잠시 후.
“누나 님.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카일, 정말 미안해요. 먼저 올라가 볼게요.”
아멜은 꽃잎이 넘실거리는 욕탕을 향해 떠났다.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차이엘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레이디 클레어. 부탁드린 자료는 확보했습니까?”
“집무실에 보고를 준비시켜 두었습니다. 마라바스는 아직 추격 중입니다.”
“그의 행적이라면 짚이는 곳이 있습니다.”
언제 서로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냐는 듯 클레어와 카일은 무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멜이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일순간 사라지다니. 짐을 챙기느라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던 바네사는 속으로 읊조렸다.
‘하여간 차이엘드 놈들은 마님한테 미쳤어…….’
***
두 차이엘드가 사업상의 이야기를 나누려 자리를 비우자 고용인들은 한층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정 자체도 길었거니와 켈트만은 하일 제국보다 날이 추워 정리해야 할 옷가지가 산더미였다.
하일드는 곧장 제 역할을 찾아 움직이는 고용인들을 보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걸 들었다. 차이엘드 정보부 소속 요원, 브루노였다.
“하일드 님. 공작 전하께서 지시하신 일을 처리하려 하는데 잠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브루노가 주변에 널린 고용인들 대신 제게 부탁하는 것이라면 분명 중요하고도 긴밀한 일일 터. 하일드는 그를 따라 움직였다.
“무엇을 지시하셨나?”
“가고일 백작 말입니다. 긴급한 치료를 마쳤으니 지하실에 가두라고 하셨습니다.”
“지하실 말인가…….”
하일드의 표정이 씁쓰름해졌으나 브루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혹시, 설마, 지하실에 귀신이라도 나오는 것일까.
“하일드 님. 혹 지하실을 꺼리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브루노. 자네가 차이엘드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공작 전하께서 저를 거두어 주신 건 올해로 15년째입니다. 헌데 갑자기 그건 왜…… 설마, 제가 모르는 괴담이라도 있는 겁니까?”
하일드는 그저 수염을 매만졌다. 괴담이라. 어찌 보면 괴담이 맞았다. 그 장면을 본 고용인들이 대거 겁을 먹고 차이엘드를 떠났으니.
대개 돈 때문에 일하는 고용인들이 다른 저택의 몇 배나 되는 보수를 주는 차이엘드를 떠났다는 건 그만큼 그때의 사건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브루노는 그 사건에 대해 아예 모르는 건가. 정말 시간이 약이로군.’
지금 차이엘드 공작저에 남은 사람들 중 당시의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건 거미처럼 구석에 자리 잡고 공작저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던 레이디 클레어뿐이었다.
“도망간 사형수가 초주검이 되어 그곳에 있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겠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 하일드는 브루노와 함께 가고일 백작을 지하실로 옮겼다.
혹 차이엘드에 유리한 패로 쓸 수 있을까 싶어 주군이 돈과 의술을 총동원해 살려낸 가고일 백작은 며칠 내로 숨을 거둘 듯했다.
‘지금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지.’
언어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인지라 차이엘드 측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아쉽지는 않았다.
“브루노. 열쇠가 있나? 문을 열게.”
“하일드 님, 조심하십시오. 웬 이끼가 이렇게 많은지…… 예전엔 귀하디귀한 아레테의 결정을 보관하던 창고였다고 들었는데,”
“원래 이곳은 습했다네. 주기적으로 관리해주지 않으면 천장에서 물이 똑똑 샜지.”
“역시 하일드님이십니다. 공작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브루노는 존경을 담아 말하곤 가고일 백작을 누추한 방에 눕혔다. 이곳에서 이 남자가 죽어가리라 생각하니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가면…… 하일드 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네. 나가지.”
브루노는 하일드가 멍하니 바라보던 문을 살폈다. 손잡이의 세공이 화려했으나 딱히 특별한 건 없었다.
“놀리지 마십시오. 귀신은 무섭단 말입니다.”
“자네는 정보부 소속 특공요원이 귀신을 무서워하면 어쩌나?”
“귀신도 잡는다는 기사단장이셨던 하일드 님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으시겠지만…….”
하일드는 픽 웃으며 문제의 문을 힐끗 눈에 담았다. 오래전 저 문을 지키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았다.
***
하일 제국의 황궁도 사신들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평소보다 조금 들떠 있었다.
사신들이 본래 일정대로 귀국했더라면 귀국 환영 연회를 베풀어야 마땅했지만, 성과 없는 이른 귀국에는 그와 같은 환대가 이뤄지지 않았다.
오늘 황궁이 기다리는 건 나디아 공주와 그녀를 보필하러 함께 성을 나섰던 시종들이 전부였다.
베르드는 누구보다도 나디아를 기다렸다. 비단 그녀가 가장 아끼는 여동생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르드는 누이동생이 켈트만에서 겪은 일들을 듣고자 했다.
“황제 폐하를 뵙니다. 여정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게 네 탓은 아니지. 어서 들어와 차를 함께 들지.”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과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디아는 신중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켈트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베르드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가고일 백작이 지금 차이엘드 공작저에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셔요, 오라버니. 아직 공식적인 일은 아니지만 확실히 그러합니다.”
베르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가고일 백작이 정말로 켈트만에 머물렀다면 이미 하일 제국의 내부 정세는 다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주는 이미 공식으로 발표된다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될 군사적 정보나 황실의 재정 문제도 알고 있을 터.
전쟁이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입이 바싹 말랐다.
‘가고일 백작은 다이앤 영애를 건드린 적이 있으니 차이엘드 공작이 알아서 하겠지.’
일단은 보고서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공작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를 데려오진 않았겠지. 백주와 차이엘드 공작 사이는 어땠나?”
“사냥대회에서 무슨 일이 생긴 듯하나 자세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둘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냥대회에서 일이 터졌단 말이지……”
카일은 참을성이 좋았다. 그런 그가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면 보통 문제는 아니었을 터.
“차이엘드 공작과 켈트만이 척을 졌다면 일단 황실은 안전하다는 소리군.”
공국 차원에서 켈트만을 상대해도 승산이 있겠지만 카일은 하일 제국의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베르드가 언제 카일과 만남을 가질지 일정을 헤아리던 그때, 나디아는 밤에 불쑥 찾아가 아멜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사신의 역할을 모두 다이앤 영애가 수행하는 것 같다고 우는소리를 했을 때, 다이앤 영애는 어쩐지 연륜이 묻어나는 답을 주었다.
“나디아 공주님. 저는 각자가 할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고 생각해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듯, 공주님은 공주라는 지위를 이용해 제가 못 하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으실 테죠.”
“……정말 그럴까요?”
“공주님이 제가 되려고 한다면 한없이 불행해지실 거예요. 공주님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으셔야 행복할 수 있어요.”
잠시 잊고 있던 대화를 상기한 지금, 나디아 공주는 황실의 일원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오라버니. 이 짧은 대화에서 차이엘드 공작을 몇 번이나 거론하셨는지 혹 자각하고 계십니까?”
“……어?”
“켈트만에 있을 때 확실한 자각이 들었습니다. 하일 제국의 황실은 차이엘드에 과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야…….”
베르드는 눈을 슬쩍 피했다. 당연히 그래왔던 것을 새삼스레 지적받으니 할 말이 없었다. 차이엘드는 몇 대 동안이나 황실의 자금 마련책이었으니까.
“그것이 네가 사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깨달은 것이냐?”
“차이엘드가 피앙세를 무척 존중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땅히 조심하고 존중해야 할 만한 존재라는 것도.”
“그리고?”
나디아는 대답 대신 차를 음미했다. 켈트만에서 깨달은 사실, 그 마지막은 역시……
‘남자는 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