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74화 (74/134)

#74

내가 모르는 척하려야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엘드 공작저는 빠르게 돌아갔다. 이름 모를 정보원들이 카일의 집무실에 드나드는 빈도 또한 잦아졌다.

‘하르모니아의 목걸이가 사라졌을 때보다 긴장감이 더하네.’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켈트만의 백주가 위급 상황에 빠진 카일을 버리고 입을 씻었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뭐? 카일이랑 헤어지면 수색을 돕겠다고?’

하일드 집사장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발견 당시 카일은 기절 직전이었다고 했다.

내내 아레테를 써서 마라바스의 주술을 방어하느라 체력도, 체온도 상당히 떨어졌었고, 그 위험한 산에서 몸도 가누지 못했단다.

‘카일이 살아 돌아온 게 용하지.’

지디마를 엿 먹이고 싶은 마음은 나도 카일 못지않았다. 클레어의 말대로 지금 확실히 제압하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문제가 생기리라.

켈트만에서는 하일 제국이 엄청난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반면 하일의 신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켈트만의 광산 노동자 임금 미지급 건에 대한 시위가 과격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차이엘드에서 손을 썼구나.’

카일이 대충 어떤 식으로 우위를 점할지 그려졌다.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바네사. 오랜만에 둘이 오붓하게 외출이나 할까요?”

“어디 가시게요?”

“귀국했으니 교류하던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망토 가져올게요.”

바네사는 말하지 않아도 내 행선지를 눈치챈 듯했다.

***

신문사들은 하일 제국과 켈트만의 우호 관계에 대해 연일 기사를 쏟아냈다. 고급 정보를 캐낸 신문사가 없기에 내용은 재탕, 또 재탕이었다.

‘이런 때에 특종을 하나 따내면 우리 신문사의 위상이 달라질 텐데…….’

하일 타임스의 프링글스 샤르테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힐 겸 창문을 열었다.

사옥 앞 광장에서 ‘새로운 것 좀 내 봐라!’하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링글스라고 해서 비슷한 자료를 짜깁기해 계속 유사한 기사를 찍어내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였기에 대부분의 일은 비밀리에 부쳐졌다. 다른 때라면 내부자에게 촌지를 쥐여주고 정보를 요구하겠지만 상대는 대부호 차이엘드 공작가.

잘못 얽혔다가는 타 대륙 진출이라는 오랜 꿈을 이루기도 전에 신문사가 사라질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지면 다행이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 되니 딱 하나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앤 스미스. 하르모니아 사건 때 하일 타임스의 위상을 하늘까지 치솟게 한 장본인.

‘그러고 보니 앤 양은 켈트만에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지. 그전까지는 연락이 닿지 않을 텐데.’

프링글스는 그녀를 거액의 봉급으로 잡아둔 것이 생에는 다시 없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재차 생각했다.

말투나 몸짓을 보면 귀족 영애나 부잣집 딸내미가 틀림없으나 두르고 있는 망토는 더 이상 알아내려 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 또한 ‘당분간은 칼럼 일을 쉴 생각이니 찾지 마시오’하는 내용이지 않았던가.

‘앤 양의 정체가 뭐든, 다시 한 번만 우리 신문사에 모실 수 있다면…….’

프링글스는 자리에 앉아 사활을 거는 마음으로 편지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지급하던 보수의 세 배를 줄 테니 켈트만과 관련된 고견을 들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앤 양. 당신이라면 특별할 것 없는 자료로도 특별한 글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편지를 무어라 마무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비서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사장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오늘은 일정이 없었다. 프링글스는 어서 쓰고 있던 편지나 마무리하기로 했다.

“지금은 급한 일이 있으니 부디 약속을 잡고 다음 기회에 만나자고 공손히 전해 주시게.”

차분하게 답한 뒤 다시 펜촉에 잉크를 적시던 프링글스는 문득 등골이 오싹했다.

“잠깐. 귀한 걸음을 해주신 손님의 이름은?”

“앤이라고 하던데요? 워낙 흔한 이름이라…… 사, 사장님?”

왈칵―

잉크병이 엎어져 책상이 엉망이 되었으나, 프링글스의 얼굴은 최근 들어 가장 환희에 차 있었다.

***

“앤 양. 어서 들게. 케이크는 입에 맞나? 연락을 하고 왔다면 더 좋은 것을 준비했을 텐데 말이야.”

“맛있는걸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라니. 나야말로 이리 와 주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네.”

안 그래도 후덕한 인상인지라 사람이 좋아 보이던 프링글스 사장은 지금, 살인을 저질러도 용서해줄 것처럼 자애로운 얼굴이었다.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냉큼 ‘자네가 와서 그렇네’하고 대답하려던 프링글스는 자제력을 발휘했다.

어쩌면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를 찾듯 편하게 들른 것일지도 모르는데, 괜히 부담을 줬다가 ‘안 써요.’ 하는 확답을 듣기라도 했다간 재기할 수 없으리라.

이럴 때는 역시 추억팔이가 최고였다.

“기분 좋은 일은 무슨. 요즘 시국은 앤 양도 알 것 아닌가. 그저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그렇지. 새삼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일이 떠오르는군.”

“벌써 그게 반년 전이네요.”

“앤 양이 그때 특종을 연달아 물어다 준 덕에 우리 신문이 어마어마하게 성장했지. 오면서 봤겠지만 말이야.”

“과찬이세요.”

“과찬이라니! 올라오면서 젊은 아가씨를 한 명쯤은 마주했을 것이라 생각되네. 그 여인들은 모두 앤 양을 동경해 일을 배우러 온 거야.”

“……정말요?”

“그래. 요즘 상인들 사이에서는 딸아이에게도 글쓰기와 경제학을 가르치는 게 유행이라더군. 자넨 하일 제국 언론의 전설이라니까.”

아멜은 낯이 뜨겁고 민망해 멋쩍게 웃었다. 원래도 과대평가 해주시긴 했지만 이렇게 띄워주실 줄이야.

슬슬 본론을 꺼내도 좋을 것 같았다.

“사장님, 켈트만을 여행할 때, 보고 들은 게 있어서요.”

정확히는 그 중심축에 있었지. 하지만 그 모든 걸 까발릴 마음은 없었다.

“보고 들은 것? 하일 타임스는 앤 양의 여행 칼럼도 환영하는 바이네.”

“에이. 아시잖아요. 그쪽 글보다 이쪽 글 더 잘 쓰는 거.”

“그 말은…….”

올해로 쉰을 넘긴 프링글스 샤르테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젊은 시절, 막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이만큼 가슴이 뛰지 않았다.

“제게 필요한 것들을 사장님이 제공해주실 수 있다면요.”

“뭐든 말만 하게. 물건이든, 약속이든 앤 양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네.”

“그렇게 배려해주신다니 마음 다잡고 켈트만 특집을 써 봐야겠는걸요?”

“정, 정말인가? 우리 하일 타임스에?”

아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프링글스는 주먹을 불끈 쥐고 쾌재를 불렀다. 전설의 귀환이었다.

***

며칠 후, 바네사가 크라프트지에 쌓인 두툼한 무언가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벌써 준비되었다고요?”

“이 많은 자료를 며칠 만에 준비하는 걸 보니 프링글스 사장이 마님 기고를 엄청나게 기다리나 봐요.”

“풀린 정보가 없으니 답답할 만하겠죠.”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서는 큰일이 터졌다 하면 인터넷에 관련 루머나 카더라가 주르륵 올라왔다.

거짓이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정보를 구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하일 제국과 켈트만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은 대부분이 베일에 감춰져 있었다.

‘당분간은 신문만 들여다보게 생겼네.’

어느 책에선가 사람들은 먼저 접하는 정보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정보의 질도 중요하지만, 정보를 대중에게 선보이는 타이밍도 만만찮게 중요했다.

‘켈트만은 카일이 어떤 정보를 터트리는지 보고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지.’

위험한 상황에 처한 카일을 버리고 온 지디마의 오판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하일 타임스에 먼저 켈트만의 잘못을 간접적으로 암시해 켈트만을 향한 반감 여론을 조성할 생각이었다.

차이엘드는 황실뿐만 아니라 하일 제국의 밥줄이었다. 차이엘드가 직간접적으로 경영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헤아리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많았다.

‘사람들은 자국을 먹여 살리는 대표 기업이 다른 나라의 횡포에 당하는 꼴을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아.’

대한민국에서도 흔히 보던 풍경이었다. 한국의 대표 기업이라 불리는 기업체들이 외국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국민들은 ‘그래도 그 기업은 우리나라의 자존심인데……’하고 품어주었다.

‘차이엘드라면 보호받고도 남지.’

그 과정에서 차이엘드에게 불리한 정보를 흘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지디마가 일순간 카일의 죽음을 바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니.

“글 쓰실 거예요? 잠깐 자리 비워드릴까요?”

“아니에요. 그 전에 확인할 게 하나 있어서.”

“켈트만에 관련된 정보가 이렇게나 많은데 또 뭘 확인하시려고요?”

바네사의 말대로 자료는 충분했다. 정황도 확실하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아, 저번에 트라이하에서 구입한 물건을 드디어 활용할 땐가요? 저도 구경하게 해 주세요. 정말 음질이 소문만큼 좋을까요? 비싼 값 해야 할 텐데.”

나는 그저 웃었다. 물증은 이미 확보했으니 급할 게 없었다. 당장 급한 것은……

“그건 나중에요. 일단 쥐새끼 살아 있나 확인부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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