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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75화 (75/134)

#75

한편, 켈트만의 리엔 공주는 지금 광부들의 숙소 한가운데에 피신 중이었다.

‘지도로 봤을 땐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광산이랑 가깝네.’

본래 이 기숙사의 역할은 출퇴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 철광석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의도와 달리 꽤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리엔은 힐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광산의 앞에서 광부들이 곡괭이로 바닥을 내리찍으며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약속한 기한이 지났는데 슬슬 백주궁에 행동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니오?”

“듣자 하니 차이엘드 공작이 철광석 산업에서 손을 뗀다던데……”

“그럼 못 받은 돈은?”

“백주께서는 채권을 발행해 임금 문제를 해결해주신다더군.”

“그래도 그쪽에서 입 씻으면 떼이는 거지, 뭐. 그렇게 되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는 거고.”

한껏 목청 높여 의견을 주고받던 광부들이 일제히 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리엔 공주는 그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느끼곤 조금 머쓱해졌다.

‘하긴. 백주궁의 공주가 여기 있으니 저들도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하지만 리엔이라고 이곳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생전 연고도 없는 광산 노동자들의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는 건 다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뜻이었다.

‘보호해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그야말로 뜻밖의 비호였다. 지금 광산 노동자들은 백주궁의 임금체불로 인해 몹시 화가 난 상태.

차이엘드가 협조는커녕 아예 자본금을 철수하고 철광석 산업에서 손을 뗀다면 이들은 길거리로 나 앉는 신세였다.

하일 제국의 사신들이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한 지금, 험악해진 양국 간의 분위기에 광부들은 무력시위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친 차이엘드 파는 죄다 광산 근처 별장으로 이동했다는 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리엔은 입을 꼭 다문 채 아버지가 둘 수 있는 수를 예상해보았다. 어떤 묘수를 두든 승자는 정해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

며칠 후. 카일은 공식적으로 켈트만 측에 유감을 표했다. 백주궁의 긴장감은 극에 달하는 것은 당연지사.

‘영악한 놈.’

지디마는 따끈따끈한 성명을 재차 훑어보며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차이엘드는 켈트만에 유감을 표하는바? 허…….’

차이엘드 공작은 누가 우위인지 똑바로 파악하라는 듯 오만을 떨고 있었다. 너희쯤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듯한 태도에는 이가 갈렸다.

게다가 저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조항이 하나 있었다. 오로지 리엔 공주를 통해서만 켈트만 측의 반박이나 입장 전달을 받겠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차이엘드 공작이 리엔 공주를 마음에 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빗발쳤다. 하지만 지디마의 생각은 달랐다.

‘그 요망한 것이 그새…….’

사냥대회 당일은 날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하일의 기사들이나 영랑들은 카일을 너무도 빨리 찾아냈다.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조를 짜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지역만을 우선으로 수색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가고일 백작을 풀어둔 위치에 대해 미리 알린 셈.

‘리엔. 그 새에 머리를 굴렸구나.’

아멜리아 다이앤이 그토록 존경하는 기사, 페르슈 다이앤의 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아니, 리엔이라면 그저 켈트만을 떠나기 위해 공작과 거래를 튼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배신은 정황이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이 마신 해독제를 미리 트라이하의 사신들에게 사간 게 입수한 게 그 애라고 했지.’

결국 가고일 백작이 내뿜던 이상한 힘에 죽을 수도 있던 차이엘드 공작은 리엔이 넘겨준 약 때문에 살아난 셈이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불러오라 한지 얼마나 지났는데 왜 리엔이 오지 않는 것이야!”

백주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시종 하나가 쪼르르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리엔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냐!”

“그, 그것이……”

“백주궁이 저잣거리도 아니고, 왜 리엔을 잡아 오는 데 이리 시간이 걸리느냔 말이다!”

“송구하옵니다! 사람을 시켜 알아본바, 공주님은 지금 백주궁에 계시지 않습니다.”

지디마는 의외의 답에 어이가 없어 잠시간 멍해졌다. 공주가 궁이 아닌 곳에 있다고?

“다 큰 여인이 가출이라도 했단 말이냐? 튀어봤자 벼룩이지. 병사들을 풀어 어서 잡아 오라.”

“그리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사이에 국경이라도 넘었단 말이냐? 대체 어디에 있기에!”

“그것이…… 공주께선 지금 시녀들을 거느리고 차이엘드 탄광에 가 계시답니다.”

지디마는 귀를 의심했다. 차이엘드 탄광은 백주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산으로, 철광석 매장량이 풍부한 곳이었다.

개발에 자금을 댄 차이엘드의 이름을 따 이름을 지었으며 차이엘드의 간부들이 득실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탄광 노동자들의 임금 미지급과 관련된 시위가 벌어지는 곳으로 가장 유명했다.

“왕실의 일원인 공주가 죽으려고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그곳에 갔을 리 없지 않나.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 사람을 보내 리엔 공주님이 탄광 근처의 저택에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광산 간부들의 비호를 받고 있답니다.”

“허…….”

어쩐지 차이엘드 공작이 답지 않게 무리수를 둔다 했다.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차이엘드는 지는 수를 둘 줄 모르는 가문.

자세한 작전은 알 수 없었으나, 지디마는 그의 목적이 켈트만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수를 쓰는 수밖에.’

***

“이른 아침부터 심부름꾼을 보내지 마십시오. 해가 떨어진 후에는 연락을 삼가시고.”

베르드는 거리낌 없이 불만 사항을 쏟아 놓는 카일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예전엔 새벽에도 깨어 있지 않았던가. 이제 침실 혼자 쓰는 처지가 아니라 이건가? 게다가 공작은 벌써 며칠째 내 부름을 무시했잖나.”

“바빴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황제가 부르는데…….”

“송구합니다.”

“전혀 송구하지 않은 표정과 말투로 송구하다고 하지 말게.”

카일은 픽 웃었다. 며칠 모른 척 심부름꾼을 돌려보냈더니 베르드는 아주 애가 탄 얼굴이었다.

“오늘 아침 신문에 낸 성명을 봤네. 제발 그런 건 황제인 내게 승인받고 발표하면 안 되겠나?”

“보고서를 올렸는데 혹 보지 못하신 겁니까?”

“보고서를 봤으니 자네를 그리 애타게 부른 거지. 신문 연재소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절묘하게 끊었더군. 가고일 백작을 데려온 게 정말인가?”

“예. 일단 숨이 붙어 있기에 데려오긴 했지만 언어 능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증언은커녕 필담을 나누는 것도 무리일 듯합니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가고일 백작에 관한 일이라면 카일도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병원장 폴도 그의 상태는 소생 불가라 평했으니.

“쓸모없는 패이니 적당히 처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이 사태를 해결할 묘책을 내게도 좀 말해 주게. 자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준 덕에 내 피가 바짝 마르고 있다는 건 알겠지.”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해 대화를 나누려 했으나 그간 바빴습니다. 송구합니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베르드는 카일이 왜 바빴는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물론 일도 했겠지. 질러놓은 것들을 수습하려 노력하긴 했을 거다.

그러나 카일이 황제에게 대면 보고를 차일피일 미룬 가장 큰 이유는 다이앤 영애이리라.

“너무하는군. 내가 공작 때문에 혈압이 올라 오래 못 살겠어. 약혼까지 한 자네는 약혼녀를 닮은 아이들을 낳고 대대손손 잘 살겠지만, 난 뭔가?”

카일은 더 해보라는 듯 눈썹을 으쓱할 뿐이었다.

“……난 혼자란 말이야!”

“반려가 필요하신 겁니까?”

“자네가 날 황제 취급 안 해주는 데 내가 어떻게 결혼을 하겠나. 응? 안 그래도 자네 약혼녀가 일전에 날 걷어찼던 것 때문에 자신감이 지하까지 떨어진 마당에!”

아멜의 ‘하일 황실의 미래 끝내버리기 사건’만 나오면 조개처럼 입을 다물던 카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조금 달랐다.

“먼저 물꼬를 트셨으니 하는 말이지만, 내년 중으로 결혼식이 있을 겁니다.”

“알아. 자네가 곧 결혼할 건 자네 얼굴에 써 있네. 그렇지 못하면 자네는 상사병이 나 죽겠지. 천하의 차이엘드 공작이 상사병에 앓다 죽는 꼴이라…… 웃기지도 않겠군.”

“상대는 리엔 공주입니다.”

베르드는 머금고 있던 차를 푸흡 뿜을 뻔했다.

“캑, 뭐? 리엔 공주?”

“예.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현 시국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결혼이라 생각합니다.”

“다이앤 영애는 어쩌고? 자네 얼굴과 몸이 특출나게 절륜한 것은 나도 아네만, 그렇게 쓰레기처럼 이 여자, 저 여자…….”

카일의 인상이 무섭게 구겨졌기에 베르드는 입을 헙 다물었다. 대신 말을 돌리기로 한 그였다.

“리엔 공주라. 켈트만에서 가장 아름답고 그만큼이나 강하다 들었네. 축하하네.”

카일은 빙긋 웃었다. 그제야 베르드는 그가 무언가를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잠깐, 자네 지금……”

“제 결혼식은 내년이 아니라 올해 중으로 이뤄질 겁니다. 혼수를 마련하는 대로 식을 올릴 생각입니다.”

“그럼 리엔 공주의 신랑은……”

“결혼 축하드립니다, 폐하.”

“…….”

베르드는 그대로 한참이나 굳어버렸다. 어찌나 어이가 없어 하는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든 것처럼 허, 허, 하고 몸만 들썩일 뿐이었다.

카일은 정신이 나가버린 황제를 잠시 뒤로하고 리엔과 나누었던 밀담을 떠올렸다.

사건의 발단이자 결말은 모두 무도회 날, 한 곡의 왈츠가 흘러나오는 동인 이루어졌다.

“차이엘드 공작. 돌려 말할 생각 없습니다. 저를 켈트만에서 꺼내 주세요.”

“제가 당신을 새장에서 꺼내 드려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꺼내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더 큰 새장으로 옮겨달라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공주의 배신을 도우면 제게 무슨 득이 있습니까.”

부드러운 동작으로 한 바퀴를 빙글 돈 리엔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즐거움을 드릴 수 있겠지요. 당신을 괴물이라 부르던 제가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청하는데.”

“조국과 스스로를 저울질하시는 걸 보니, 공주께선 이미 괴물이 되신 것 같은데.”

“…….”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거래 조건이었습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왈츠곡이 끝나는 순간 거래도 끝났다. 리엔 공주를 확보한 이상 켈트만과 하일의 관계는 파국까지 치달아도 봉합할 수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 자네 정말…… 내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나도 감정과 호불호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은 것이냐고!”

베르드가 소리쳤으나 카일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알 수 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감정과 호불호라. 돈을 끌어다 쓸 때 그런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제가 거절하니 제 사랑을 위험에 끌어들인 폐하가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제가 폐하께 사랑을 허락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

“폐하께서는 괴물에게 달라붙는 걸 즐기지 않으십니까. 이번 괴물도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공작은 개의 의사나 기호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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