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며칠간 외출하지 않던 카일이 베르드를 만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방을 나섰다.
‘드디어 쥐새끼랑 대면할 때인가.’
차이엘드의 지하실에 있다던 가고일 백작이 오늘내일한다는 소식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대체 마라바스와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려면 일단 가고일 백작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
“바네사. 따라오세요.”
“어디 가시는데요?”
“가고일 백작이 있다는 지하실.”
“쓸모없는 짓일걸요? 병원장이 공작 전하께 보고하는 걸 들었는데, 가고일 백작은 언어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래요. 말은 물론 글로 적는 것도 못 한다나?”
“가고일 백작이랑 대화할 생각 없으니 괜찮아요.”
내 말의 의미를 알아챈 바네사는 기함하며 혀를 내둘렀다.
“마님의 아레테는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인 것 같아요. 닿는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 차이엘드 정보부 요원 백 명보다 마님이 더 유능할 거예요.”
“내가 말 했던가? 이젠 속마음이 들리는 게 아니라 보인다고.”
“와…… 아레티스트에 그 능력이 알려지면 보스는 따놓은 당상일 텐데.”
“내가 거기 보스를 왜 해요. 바네사 같은 사람이나 하는 거지.”
내 말이 의외였는지 바네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대로였다. 나는 내 주변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바네사를 보스로 만들 생각이었다.
“제 경호원 하기 아까운 실력이잖아요.”
“하지만 저는 아레테가 없는걸요?”
“수렵제 경호비를 10배나 받았다면서요. 그거 차곡차곡 모아요. 커다란 아레테의 결정은 비싸지만 둘이 돈을 같이 모으면 모래알만 한 것 정도는 살 수 있겠죠.”
“마님…….”
바네사는 어딘가 감동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수시로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눈이 부신 미모였다.
어떻게 아레테의 결정을 사들일지, 그 가격이 얼마 정도일지 떠들며 지하실의 근처에 다다랐는데 예상치 못한 장벽이 있었다.
“하일드 님?”
“공작 전하의 말씀대로군요. 누나 님께서 이곳에 오실 것 같으니 이곳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젠장. 카일에게 수를 읽힌 기분이었다. 내가 이런 곳에 출입하는 걸 막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나오실 줄이야.
하지만 가고일 백작이 마라바스와 접촉한 게 확실한 지금, 이대로 물러난다면 고급 정보를 놓치는 셈이었다. 나는 능청스레 말했다.
“설마 카일이 제 행동반경을 제한하려는 의도로 말했을 리는 없고.”
“큼, 크흠…….”
맞구나. 우리 남주, 요즘 집착이 조금 뜸하다 했지.
“제 안전을 걱정한 조치였겠죠? 그 문제라면 전직 기사단장 하일드 집사장님이 같이 들어가주시면 해결되겠네요.”
악의 없음을 어필하듯 산뜻하게 웃으니 집사장님의 머뭇거림이 보였다. 잠시 후, 결국 그는 지하실로 향하는 문을 손수 열어주었다.
“감사해요. 잠깐만 보고 나오겠다고 약속할게요.”
그새 아레테의 성능이 좋아졌으니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정보를 캐내는 게 가능했다. 물론 가고일 백작이 살아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나는 등불을 들고 성큼성큼 걷는 하일드 집사장님을 바라봤다. 집사장은 역시 다르다는 것일까. 복잡하고 어두운 지하실을 걷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마님, 손 이리 주세요. 바닥이 우둘투둘해서 넘어지시겠어요.”
“고마워요.”
나는 바네사가 내민 손 위로 왼손을 포갰다. 그러자 곱상한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요?”
“마님 약혼반지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힐끗 왼손 약지를 바라보니 과연 반지의 빛깔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는 가운데에 박힌 커다란 아레테의 결정이 평소보다 형형했다.
“주변의 아레테에 반응하는 겁니다. 이 지하실은 예전에 아레테의 결정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지요. 차이엘드는 한때 아레테의 결정을 독점 매매했습니다.”
“아…….”
하일드 집사장님의 설명에 입이 떡 벌어졌다. 차이엘드는 얼마나 돈이 많기에 세계관 최고가를 자랑하는 보물을 쌓아두고 파나.
한편, 바네사의 눈은 급격히 반짝이고 있었다. 다음 경호비로 아레테의 결정을 요구할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레테의 결정을 매매하지 않으니 기대 거두십시오, 바네사 양.”
“아니, 그 좋은 걸 왜 안 팔아요? 독점 매매하면 부르는 게 값이었을 텐데?!”
“다 왔습니다. 이 방입니다.”
하일드 님은 바네사의 꿍얼거림을 깔끔하게 무시하곤 문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고 우물쭈물한 목소리만 들려왔다.
“누나 님. 노파심에 드리는 말이지만 가고일 백작은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나이도 있고, 워낙…….”
“걱정 마세요. 가고일 백작의 상태가 어떻든 제가 공작 전하를 두려워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시겠지만 저도 가고일 백작에게 당한 게 많거든요.”
망설임이 그득한 동작으로 문이 열리자 가고일 백작보다도 생명을 이어가게 해주는 마도구나 의료 장비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새삼 차이엘드에서 가고일 백작을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뭐, 그건 가고일 백작을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의 얘기겠지.’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지금은 언제 숨을 거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사실 아직까지 여기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랐지만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나 보다.
살가죽과 함께 드러난 앙상한 뼈마디를 바라보다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가고일 백작의 손등에 내 손끝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가고일 백작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흐리멍텅한 눈동자가 내 쪽으로 움직였다.
하일드 님과 바네사가 당장이라도 손목을 잘라낼 기세로 단검을 빼들었다. 나는 손을 들어 둘을 저지시키곤 운을 뗐다.
“기절하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저항할 힘은 없으신가 봐요?”
“…….”
“가고일 백작님. 조금이라도 억울함을 덜고 싶으시면 떠올려보세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마라바스와는 언제 접촉하셨는지.”
내 말을 듣기 싫다는 것일까. 가고일 백작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생각은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없는지 얼마 못 가 내가 엿보려던 장면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건 사형집행일 새벽이잖아?’
매수해둔 자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탈출한 가고일 백작은 그야말로 개고생을 하며 하일과 켈트만의 국경까지 다다랐다.
국경을 어떻게 넘었나 싶었지만 곧 마라바스가 나타나 이동 스크롤을 내밀자 어찌 된 일인지 이해가 갔다.
‘시기상 마라바스는 이미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가지고 있어.’
나는 로열 알케미스트가 아니니 자세한 방법은 모르겠지만, 가고일 백작이 이동 스크롤을 사용하면 그의 몸을 인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주술을 걸어둔 게 분명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날름 이동 스크롤을 쓴 가고일 백작은 아직도 자기가 왜 정신을 잃고 몸을 누군가에게 빼앗겼는지 몰랐다.
‘남은 건 가고일 백작이 무슨 정보를 지디마에게 흘렸냐는 건데…….’
기억을 더 엿보려는 순간이었다.
“쿨럭, 커헉……!”
갑자기 영상이 흐릿해지더니 가고일 백작이 피를 토하며 몸을 펄떡이기 시작했다. 바네사가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내 옷에도 피가 튀었으리라.
“마님. 이제 나가요. 생을 마칠 때가 된 것 같으니.”
“아…….”
나는 바네사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해서 지하실을 나서게 되었다. 공작저의 로비에 들어섰는데도 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여태까지 살아 있던 것이 용할 정도였으니 죽음이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가고일 백작은 나를 곤경에 빠트리려 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일까.
바네사는 나를 의자에 앉히곤 컵을 내밀었다. 따뜻한 물을 마시자 차츰 진정되었다. 고용인들이 로비를 부지런히 쏘다니는 것으로 보아 정말 죽었나 보다.
‘……그래도 편히 쉬시길.’
죽음을 목격한 게 처음이라 가슴이 선득했다. 고작 한 사람이, 그것도 나를 조롱하던 사람이 죽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충격적일 줄이야.
역시 이 세계에 떨어진 건 전쟁을 막으라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할 무렵,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이 바뀌었다.
“누나, 괜찮습니까?”
황실에서 방금 막 돌아온 카일이었다. 이 온순한 눈동자는 절대 전쟁을 일으킬 것 같지 않았지만, 모름지기 사람은 상황이 만드는 법.
‘절대 켈트만이 차이엘드와 물리적으로 정면충돌하는 일이 일어나면 안 돼.’
하지만 두 세력은 이미 척을 진 상황. 물리전을 막으려면 켈트만의 전투 의욕을 꺾는 게 가장 현명했다.
게다가 카일도 생각이 없진 않을 터. 뭔가 수를 써 두고 믿는 게 있으니 일정이 끝나기 전에 하일 제국으로 돌아왔으리라.
‘마침 이걸 오늘 전해주려고 했으니 타이밍이 좋다면 좋은 거겠네.’
나는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는 카일에게 잠시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카일은 당연하다는 듯 침실 쪽으로 향했다.
“카일, 침실 말고 집무실에서.”
“……집무실도 좋습니다.”
눈을 반짝이며 무언가를 기대하던 카일은 집무실에 단둘이 들어서자마자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책상에 앉혔다.
의자를 뒤로 훅 밀어버리곤 내 앞에 마주 서는 그를 보니 직전에 목격한 끔찍한 장면이 벌써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카일. 아까 지하실에 다녀왔어요.”
“…….”
방금까지만 해도 나른하게 관능미를 과시하던 눈이 금세 놀란 토끼처럼 변했다. 나는 갈 곳 잃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시겠지.」
「미움받기 싫은데.」
“카일. 내 아레테가 뭔지 알면서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요. 하지만 가고일 백작에게 정보를 얻는 건 중요하잖아요?”
“위험합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위험이 클수록 얻는 것도 크죠.”
나는 무어라 반박하려는 카일의 입술을 매만지며 내가 훔쳐본 기억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마라바스의 이름이 나오자 카일의 눈빛이 바뀌었다.
“마라바스를 제압하려면 당장 닥친 켈트만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디마가 카일을 해하려 했다는 물증이 있으면 도움이 될까요?”
나는 카일에게 작은 목각인형을 내밀었다. 카일이 사냥대회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 바네사를 시켜 트라이하의 상인들에게 구입한 물건.
복잡한 연금술 영약과 주술들을 결합해 만든 장치였는데, 나는 이 물건이 원작에서 녹음기의 기능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안을 하나 하지. 영애가 차이엘드 공작의 목숨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에 따라 거절하든, 승낙하든 상관없네.”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차이엘드 공작을 데려오는 데 최선을 다한다면, 영애는 차이엘드 공작의 곁에서 떨어져 줄 건가?”
그 대화가 이 목각인형에 담겨 있었다. 카일이 위험에 처했다는 상황을 알면서 그것을 이용해 나와 협상하려는 지디마의 목소리가.
나는 카일에게 자초지종과 이 안에 무슨 음성이 들어있는지를 설명했다. 심각한 어조였는데도 카일의 눈가는 부드럽게 휠 뿐이었다.
“카일이 듣기에는 내용이 조금 거북할 수도 있지만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트라이하 상단에게 구입한 거라 성능에 대한 보증서도 있어요.”
카일은 여전히 큰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행복에 젖어 나를 바라봤다. 뭘까, 이 반응은.
“생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누나. 하지만 그 도구는 제가 개인적으로 갖는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백주에게 윤리적인 타격을 줄 수 있을 거예요. 사신으로 간 카일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알게 되면 하일 제국이 분노할 거라고요.”
“확실히 그렇겠지만 쓰지 않을 겁니다.”
“……그럼 너무 억울하지 않아요? 백주는 모든 문제를 카일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음해하고 깎아내린다면 진실을 밝히고 싶을 테니. 하지만 카일은 괴물 취급쯤이야 괜찮다는 듯 맑게 웃었다.
「누나 목소리도 같이 녹음되어 있겠지. 아깝긴 하지만 사용하면 화살이 누나에게 옮겨갈 확률이 커.」
「……출장 때 누나 목소리 듣고 싶으면 들어야지.」
「그나저나 이런 게 있는 건 언제 알아보신 걸까. 내 약혼녀 똑똑해.」
「차이엘드가 당할까 봐 괜한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그 모든 속마음을 꼭 숨긴 채, 카일은 눈을 맞추고 내 뺨을 쓸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나 남편 될 사람 그렇게 능력 없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