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카일의 태도는 조금도 위축된 감이 없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자신만만한 이유가 궁금했다.
“내 약혼자는 어떤 수를 써 두셨길래 이렇게 자신만만하실까.”
「작전명 사랑과 평화라고 하면 미친놈 보듯 하시겠지.」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답을 재촉하자 카일이 입을 열었다.
“준비되는 대로 켈트만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퍼포먼스를 한번 할까 합니다.”
“……퍼포먼스요?”
“어떤 행동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효과를 얻어낼 수 있으니, 곧 누나가 원하는 평화를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자본금이나 물건을 구해 오겠다는 투였다. 나는 카일이 어마어마한 부를 어떻게 이용해 평화를 사올지 나름의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
며칠 후. 황궁에서는 아멜리아 다이앤에게 황실 백합 훈장을 수여하겠노라고 발표했다. 아멜은 그 소식이 적힌 신문을 마차에서 읽게 되었다.
‘사신단의 일정을 다 마치지 못했는데도 훈장을 준다고 할 줄이야.’
차이엘드가 손을 썼거나 카일의 눈치가 보여 훈장을 취소하지 못한 것이리라. 아멜은 양심이 살짝 찔리긴 했지만 켈트만에서 마음졸인 것이 있으니 날름 받기로 했다.
‘무려 하일 제국의 심장인 카일리안 차이엘드를 지켜냈는데 나 아니면 누가 받겠어.’
원래는 양국 간의 외교 정상화를 위해 힘썼다는 명분으로 받을 예정이었지만 사신단의 일정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온 터라 황실에서는 수여 이유를 뭉뚱그려 발표했다.
‘어차피 백합 훈장 수여식 당일이 되면 뭐라도 이유를 찾아내야 할 텐데. 그 일은 황실의 문무대신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지.’
아멜은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곧 마차가 하일 타임스 건물에 도착할 테니 원고를 최종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내가 이걸 다 손으로 분석하는 날이 올 줄이야.’
지난 삶에서는 엑셀이나 계산기로 하던 것을 일일이 계산하려니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아멜의 머리는 배운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머리를 써서 당이 떨어졌나. 단 게 먹고 싶네.’
오늘도 망토를 두르고 장갑을 낀 채 하일 타임스 건물에 들어온 그녀는 곧장 편집장실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프링글스 사장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앤 양! 기다리고 있었네. 일단 시원한 음료 한 잔 마시겠는가? 얼음과 레몬을 넣은 홍차를 준비해두었다네.”
아멜의 것은 물론 그녀의 심부름꾼으로 종종 들르는 바네사의 몫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간식을 먹으며 당을 충전하는 동안 프링글스는 귀하디귀한 칼럼을 조심히 받아 들었다.
환희에 찬 얼굴로 첫 장을 넘긴 그는 곧 인상을 찡그렸다. 웬 그림들이 페이지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앤 양. 이게 다 뭔가?”
“당연히 하일 타임스에 실릴 글이죠. 옆에 있는 그림들은 제가 자 대고 정성껏 그린 그래프고요. 사장님이 모아주신 자료를 그림으로 정리한 거예요.”
내일 자 하일 타임스에 실린 글은 아멜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자료를 바탕으로 켈트만의 현 경제 상황을 분석한 글에 가까웠다.
정확히는 켈트만의 경제 상황에 차이엘드가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글로, 아멜이 삼일 밤낮 동안 공들인 결과물이었다.
“어떤가요?”
“그림이랑 글을 함께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군. 차이엘드 자본이 켈트만에 이렇게나 많이 들어가 있는 줄은 나도 몰랐네.”
“저도 정리하면서 놀랐어요. 특히 켈트만에서 가장 큰 은행에 어마어마하게 큰 돈을 맡겨놨더라고요.”
“과연 사람들이 궁금해할 주제군. 자네도 그래서 이 글을 쓴 것이겠지만.”
물론 켈트만과 차이엘드의 상관관계는 현 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였다. 하지만 아멜은 겨우 인기 주제라는 이유로 이 글을 쓴 건 아니었다.
“사장님. 지금 시점에서 차이엘드가 켈트만 은행에 예금해둔 돈을 찾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뭐…… 사람들이 부러워하겠지. 켈트만과 사이가 어지간히 틀어졌구나 생각할 거고. 그런데 그건 왜 묻나?”
아멜은 가만히 차를 홀짝였다. 그녀가 예상한 카일의 퍼포먼스는 바로 차이엘드가 켈트만 은행에서 돈을 찾는 모습이었다.
“어떠한 근거도 없는 예상이긴 하지만, 차이엘드는 조만간 켈트만 은행에서 돈을 찾을 거예요.”
그리고 아멜은 고작 예금을 인출하는 것뿐인 그 장면이 어떤 폭풍을 가지고 올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전공책에서 이론으로만 배웠던 뱅크런 현상을 실제로 보게 되겠지.’
“생각해 보세요. 차이엘드가 돈을 빼버리면 켈트만 은행이 보유한 현금이 부족해지지 않을까요?”
“하긴. 맡긴 게 한두 푼이 아닐 테지.”
“은행 입장에서는 차이엘드가 엄청난 현금을 빼갔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겠지만 차이엘드 쪽에서는 오히려 더 밝히겠죠.”
“왜지?”
“은행은 고객들이 맡긴 돈을 그대로 서랍에 넣어두지 않으니까요.”
은행은 신용을 바탕으로 사업가나 왕실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이익을 창출하는 기관. 즉, 고객들이 입금한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하는 기관이었다.
돈을 맡긴 사람들이 일시에 우르르 돈을 찾으러 오는 일은 없으니 평소에는 그 많은 돈을 다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차이엘드가 거액을 인출하면 자신이 넣은 돈을 인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켈트만의 예금자들은 앞다투어 돈을 찾을 것이다.
“불안해진 사람들은 돈을 찾으려 할 거예요. 은행은 그들에게 줄 돈이 없고. 입금한 돈을 찾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면 다른 은행들도 마찬가지가 되겠죠.”
“그럼 앤, 자네 말은…….”
“그런 사태가 반복되면 켈트만의 은행들은 파산할 거예요.”
프링글스는 한동안 말없이 아멜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과연 차이엘드의 대략적인 예금액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아직까지 항간에 알려진 차이엘드의 행보는 없었다. 이번에도 눈앞의 여인이 한 예측이 들어맞는다면 하일 타임스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는 셈.
“앤. 자네는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케, 케이크 더 들겠나?”
“그럼 감사하죠. 제 예상은 근거가 없으니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요.”
프링글스는 이미 기대감에 한껏 젖은 얼굴이었다. 아멜은 눈썹을 으쓱하곤 케이크를 한 입 더 먹었다.
‘카일이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이렇게 할 거야.’
게다가 지디마는 광부들의 임금 미지급 건을 해결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 부자들에게 반강제로 팔아넘기고 있다.
급한 불은 끄는 셈이겠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적신호였다. 부자들에게 돈을 꿔야 할 만큼 왕실에 돈이 없다는 소리니.
‘가고일 백작에게 무슨 말을 들었길래 광부들에게 줄 임금을 비축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돈을 완벽하게 떼일 위기에 처한 광부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 지디마의 상황은 퍽 곤란해질 터였다. 고소함을 느낀 아멜은 미소를 머금었다.
‘저 여유는 대체…… 조만간 고료 협상을 다시 하는 게 좋겠군.’
프링글스에게는 그것이 이미 승리를 거둔 자의 여유로 보였다.
***
리엔이 차이엘드 광산 기숙사에 눌러앉아 친 차이엘드 세력의 보호를 받기 시작한 지도 어언 보름이 넘었다.
호전적이고 털털한 성격 덕에 이젠 제법 광부의 아내들과 친해진 리엔은 그녀들과 수다를 떨며 의외의 평화를 즐겼다.
오늘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될 줄 알았던 리엔은 긴장감을 깨끗하게 잊고 정오까지 늦잠을 잤다.
느릿한 동작으로 기지개를 켜니 시녀가 세숫물을 떠 가지고 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수심과 불안감이 가득했다.
“공주님. 오늘은 차이엘드의 간부들이 자리를 비웠으니 특히나 조심하셔야 합니다.”
“차이엘드의 간부들이 자리를 비웠다고?”
“예. 공작의 지령을 받고 수도의 은행으로 향했다 들었습니다.”
리엔은 시녀가 내미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 시국에 차이엘드에서 은행에 사람을 보낸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의 앞에서 괴물이 되기를 자처한 처지이나 괴물 공작의 속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리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늘 하던 대로 식당으로 향했다. 그곳엔 항상 광부의 아내들이 뜨거운 스튜와 빵을 준비해두었는데, 리엔은 그 따뜻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식당이 가까워지자 격앙된 부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엔은 벽에 몸을 숨긴 채 그 대화를 엿들었다.
“뭔가 문제가 있으니 차이엘드에서도 급히 돈을 뺀 거겠죠. 대부호 가문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움직일 리가.”
“부인들, 혹시 엊그제 하일 타임스에 실린 글 보셨어요? 차이엘드가 현금을 죄다 찾아가면 은행에 돈이 부족해진다던데…….”
“은행에 돈이 부족할 수도 있나요? 그럼 우리 집 예금은 어떻게 되는 거죠?”
부인들은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무엇을 걱정하든 함께 있던 아이들은 천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렇게 큰 마차가 여러 대 있는 건 처음 봤어요! 백주께서 행차하실 때에도 그렇게 멋지진 않았는데.”
“말이 움직일 때마다 금화가 바닥에 떨어져서 어떤 아저씨들은 아예 돈을 주우면서 마차 뒤꽁무니를 쫓았다니까요?”
“이사벨네 부모님도 돈을 찾으러 은행에 갔는데 다음에 오라고 했대요. 엄마, 저희도 돈 찾으러 가요?”
부인들이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달랬다. 그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리엔은 자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이 그야말로 쇼를 하셨군.’
그 대부호 가문이 갑자기 해외의 은행에서 돈을 뽑아가야 할 만큼 가난할 리는 없다. 설사 현금이 필요했다고 해도 수표로 찾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으리으리한 마차를 동원해 인출을 과시했다면 그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
‘며칠 전에 본 칼럼은 이런 일을 예상한 건가? 시간의 신이 도왔네.’
게다가 며칠 전 외신인 하일 타임스에서는 관련 주제를 다뤘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외국의 신문도 비교적 많이 읽히는 추세이니 동요는 더 클 것이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미 사람들은 돈을 찾으러 간 것 같고……’
리엔은 소름이 돋아 오르는 팔을 문질렀다. 차이엘드 공작이 일 처리에 빈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마치 미래를 보면서 수를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임금을 떼먹힌 광부들이 예금까지 잃게 생겼다는 걸 알면 어떻게 나올지는 뻔해. 아버지는 어떻게 하실까.’
궁지에 몰리면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저항을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상대가 고양이일 때의 이야기였다.
‘차이엘드는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인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포착한 공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