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처음 차이엘드가 은행에 돈을 인출하러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디마는 네깟 놈들의 돈이 없어도 당장 켈트만이 망할 일은 없다며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경제 고문인 메디안에게 추가 보고를 듣는 지금,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보라. 은행의 상황이 뭐 어떻다 하였지?”
“그, 그것이…… 예금한 돈을 찾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줄이 벌써 옆 마을까지 닿는다 합니다.”
“은행에 그만한 자금이 있나?”
“없습니다. 은행 측에서는 임시방편으로 한 사람당 찾아갈 수 있는 돈의 액수를 제한하고 있지만 그 조치가 더한 불만을 낳고 있습니다.”
“허…….”
지디마는 보고서를 내려다보곤 재차 한숨을 쉬었다. 차이엘드의 간부들이 은행에 다녀간 지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괴물 공작이 무엇을 노렸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동요를 노리고 있었다. 지디마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차이엘드가 돈을 뽑아간 것을 보고 동요하는 백성들이라니.
“답답해 미치겠군. 다들 일시에 돈을 찾으려 하니 당연히 은행에 돈이 떨어지지! 기다렸다가 필요할 때만 조금씩 인출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 그것이…….”
“그 망할 신문에 실린 글 때문인가? 하일 타임스는 진작 회수하라고 했을 텐데!”
메디안은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한 채 죽여주시옵소서, 하며 고개만 조아렸다. 지금 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냈다간 목이 따일 것이 분명했다.
‘백주시여. 일국의 왕인 당신은 언제든지 원하는 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나 백성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제 몫을 사수하려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돈을 굴리고 불리는 데 도가 튼 차이엘드라면 이미 수 세대에 거쳐 자연히 알고 있을 사실을 눈앞의 백주는 모르고 있었다.
메디안은 가만히 숨죽였다. 그의 순종적인 태도가 지디마의 분노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돈놀이나 하는 가문이 약은 수를 쓰는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나가야겠지.”
“전하께서 묘책을 내실 줄로 압니다.”
“암, 그래야지.”
지디마는 독한 술을 비웠다. 유약이 발려 반짝거리는 검은 잔에 병풍이 비쳐 보였다. 지금이야말로 가고일 백작이 흘린 정보를 이용해 하일 제국을 뒤흔들 때였다.
“메디안, 가서 사람을 불러오게. 하일을 동요하게 할 정보라면 우리에게도 있으니.”
지디마는 가고일 백작이 넘긴 하일의 국가기밀들이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요즘 나는 자존감이 살짝 높아진 상태였다.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켈트만에서 보여줄 장면이 뭔지 예측해낸 건 스스로 생각해도 대단했다.
‘반응이 그렇게 뜨거울 줄이야. 역시 끙끙 앓으면서 그래프를 그린 보람이 있어.’
하일 타임스는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이후로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았다. 돈? 물론 짭짤하게 벌었을 거다.
바네사를 통해 들은 말로는 곧 재정 문제로 중단되었던 프링글스 사장님의 꿈, ‘트라이하 타임스’를 곧 찍어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타 대륙 진출이라. 역시 신문사를 잘 골랐어.’
거기에 더해 예쁜 최애와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까지 준비하고 있으니 하루하루가 자존감 상승의 연속이었다.
“아멜. 무슨 생각을 그렇게 웃으면서 해?”
“언니랑 외출은 처음인데 너무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 줄 알았더라면 진작 같이 걷자고 했을 텐데.”
“아멜. 거리가 마음에 드니?”
“네. 꽃도 예쁘고, 분수랑 가로수도 예쁘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은 밤에 보면 더 아름답겠어요.”
나는 클레어와 차이엘드 공국의 주요 거리를 거닐며 의상실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왜 사람을 부르지 않고 직접 발품을 파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간단하다.
일전에 차이엘드 공작저로 무슈 가르통을 불러 드레스를 맞추었다 무시당했던 기억이 약간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면 내가 먼저 이 세계의 유행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차이엘드 공국의 유행이나 레이디들의 성향을 거의 몰라 이참에 공부해두겠다는 의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바네사. 저번에 말한 매운 파스타 집 이 근처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 저기예요. 스트레스받을 때 먹으면 최고라니까요.”
이 근처에는 바네사가 슬쩍슬쩍 자랑했던 맛집이 많았다. 내가 심부름을 시킬 때마다 차이엘드 돈으로 끼니를 해결하셨단다.
차이엘드의 요리사들은 일류지만 몸에 나쁜 음식은 절대 주지 않는다는 게 흠이었다. 나는 클레어의 손을 꼭 잡고 눈을 반짝였다.
“클레어 언니. 점심 식사 저기서 하면 안 될까요? 네?”
“……보는 사람도 많은데 공작저에 돌아가서 먹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 언니랑 같이 놀러 나온 기분이 안 나잖아요. 네?”
“…….”
클레어는 한숨을 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주변에 포진해 우리를 힐끗거리던 사람들은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하긴. 차이엘드 공국의 거리에 레이디 클레어가 마차를 타고 나타났는데 누군들 안 훔쳐볼까. 철장 안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지만 내겐 매운 파스타를 맛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
방금 문을 연 듯한 가게에 들어서자 사장은 입을 쩍 벌리고 우리를 테이블로 안내했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곧바로 조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류 레스토랑 쉐프처럼 깍듯이 인사하곤 메뉴판을 내미는 모습이 나를 흡족하게 했다. 왠지 음식이 맛있을 것 같았다.
“언니. 안 앉으세요?”
“잠시만…… 너희 여섯은 바깥을 지키고 둘은 옥상에 올라가. 둘은 건너편 가게에서 대기하도록. 마차에는 몇이나 대기하고 있지?”
……이렇게 따라붙은 경비 인원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바네사는 불려 나갈까 봐 걱정되는지 내게 황급히 메뉴판을 내밀었다.
나는 적당히 주문한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물을 홀짝였다. 경비 인력 배치를 마친 클레어는 바네사를 보고도 별말이 없었다.
“큰 마님, 이제 절 내쫓지 않으시네요?”
“기쁘게 생각하지 마. 누가 아멜에게 단검이라도 던지면 대신 맞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그런 거니까.”
“암요, 암요. 제가 대신 맞을게요.”
대화가 조금 살벌하긴 했지만 어쨌든 즐거운 자리였다. 식사 내내 바네사와 클레어는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에 내가 입고 갈 드레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훈장 이름에 백합이 들어가서인지는 몰라도 역대 수여식의 주인공들은 다 흰색 계통의 옷을 입었더라. 아멜도 그렇게 할 거지?”
“그러는 게 좋겠어요. 옷에 뭘 묻히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아까 방문했던 의상실들 중 마음에 드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주문제작해도 될까요?”
“어머…… 그럼.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클레어는 몹시 뿌듯한 얼굴이었다. 속마음 또한 그랬다.
「우리 아멜…… 드디어 드레스를 맞춘다는 말을 하는구나.」
「그런데 특별히 눈에 띄는 디자이너가 있었던가?」
사실 드레스는 유행이라는 게 있어서 재질이나 디테일의 차이가 전부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 거리에 가게를 낼 정도면 실력은 떨어지지 않는다는 소리니.
그래서인지 옷이 눈에 확 띄는 곳은 없었다. 내가 눈여겨본 의상실은 남편을 잃고 부인 혼자서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 곳이었다.
가게가 다른 곳보다 허름해서 기억에 남았는데, 드레스의 가격에 장난질을 치지 않는 정직한 사장님이 인상 깊었다.
‘어차피 어디에서 맞추든 상관없으니까. 내가 다녀가면 홍보 효과도 있겠지.’
때맞춰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방문 목적이었던 매운 파스타를 한입 먹는 순간, 내 기분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해물이 들어가서 그런가? 이거 완전 짬뽕이잖아!’
익숙한 맛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바네사는 맵다며 물을 찾았지만 내 혀는 조금의 거부도 없이 이 매운맛을 받아들였다.
‘미쳤다…… 진짜 맛있어. 매운 음식을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할 즈음이었다. 차이엘드의 정보원인 브루노가 민첩한 동작으로 클레어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긴급한 일이 아니면 식사 후에 듣고 싶은데.”
“클레어 님. 호외입니다. 켈트만에서 차이엘드가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는 낭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툭.
나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트리고야 말았다. 전쟁이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렇게 사랑과 평화를 세뇌했는데 카일이 그럴 리가.
“그, 그 호외 신문, 혹시 가지고 오셨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문제의 호외 신문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디마는 가고일 백작에게 들은 하일의 일급비밀을 터트린 것 같았다.
“켈트만의 후원을 받은 신문사 하나가 광장에 호외 신문을 배포하는 바람에 전쟁설이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습니다. 당장 공작저로 돌아가시지요.”
“공작 전하께서 전쟁이라니. 근거가 있는 주장인가?”
“저, 그것이…… 근거가 있긴 한데…….”
클레어의 다그침에 브루노가 내 눈치를 봤다. 어디선가 진한 파멸의 향기가 풍겨오는 기분이었다. 설마 정말로 카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건가.
지디마는 카일이 묵혀두었던 금광을 비밀리에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가고일 백작에게 들은 정보이리라.
지디마의 주장은 이 금광이 차이엘드의 전쟁 자금이며, 최근 켈트만에서 거액을 인출한 것도 전쟁 자금 확보 및 선전포고를 위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돈을 인출한 건 지디마에게 한 방 먹이려고 한 일일 텐데. 금광은 왜 이 타이밍에……’
시기가 너무 적절해 자칫하면 마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지디마는 금광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차 물었다.
“브루노 님. 백주의 주장이 사실인가요? 공작 전하께서 비밀리에 금광을 개발하신 거 말이에요.”
“저, 누나 님. 그것이…….”
브루노는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
지디마가 일명 ‘차이엘드 전쟁 자금 마련설’을 발표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났을 무렵, 피 끓는 청년 기자들은 팀을 꾸려 문제의 광산으로 향했다.
작은 보석이라면 모를까 금광은 숨길 수도 없었다. 백주의 발표에 정확한 위치까지 나와 있으니 현장을 살피는 일은 어렵지 않으리라.
“차이엘드의 경비병들만 주의하면 되네. 지금이 아니면 언제 특종을 터트리겠나.”
“정말 이 광산을 개발하려 하나 보군. 몇 년 전에 여기 왔을 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는데 지금은 변했어.”
“도망간 가고일 백작이 흘린 제국의 기밀이라니 확실한 특종이지.”
“내가 경비병들의 주의를 끌 테니 자네들이 들어가 현장을 살피게. 금광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는 물증을 확보하면 더 좋고.”
청년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미끼 역할을 도맡은 두 명이 탄광 쪽으로 맹렬히 돌격했다.
차이엘드의 경비병들은 그 저돌적인 행동에 일순간 당황했다. 시선이 미끼에게 몰리는 순간 남은 청년들은 재빨리 광산 옆의 가건물로 들어갔다.
“공작의 명을 받은 간부들은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명을 전달했을 테니 뭐든 나오겠지.”
“시간이 없네.”
청년들은 빠르게 서랍과 책꽂이를 뒤졌다. 과연 가건물인지라 복잡한 잠금장치 따위는 없었다.
경비병과 미끼의 실랑이가 거의 마무리되어갈 무렵, 누군가가 긴박한 손길로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개발 기획서를 찾았네!”
특종은 확정이다. 모두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어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그들은 재빨리 가건물에서 나와 근처의 풀숲에 숨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전쟁설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쯤에서 펼쳐보지.”
“그래. 내 생각에도 그게 좋겠네.”
“특종도 이런 특종이…… 어서!”
한 사내가 품 안에서 광산의 개발 기획서를 꺼냈다. 질 좋은 종이에는 무려 차이엘드 공작의 친필 서명까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광산 개발 목적이 정리된 장이 나왔다. 청년들은 마른침을 삼키곤 한 줄 한 줄을 꼼꼼히 읽어나갔다. 그런데.
이 금광은 아멜리아 다이앤이 차이엘드의 피앙세가 된 지 1년이 되는 날 줄 깜짝 선물이므로 비밀을 유지한다. 생산된 금은 장신구나 장식품을 만들기 적합하게 가공한다. 또한 그 이름을 아멜리아 금광이라 짓고, 부지와 생산물을 온전히 그녀의 몫으로 한다.
“…….”
“금, 금광을 선물로 준다고? 이런 게 가능해?”
“가고일 백작은 이딴 것도 국가기밀이라고…….”
“차이엘드는 대체…….”
금광의 정체는 카일의 소소한 약혼식 1주년 기념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