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큰소리를 떵떵 치며 금광에 친히 방문했던 기자들은 어쨌든 특종이 필요했다. 해서 그들은 금광은 그저 사랑꾼인 차이엘드 공작의 깜짝 선물이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로써 차이엘드가 전쟁을 준비한다는 지디마의 선동은 순식간에 묻혀버리고, 아멜리아 다이앤이 갖게 될 일명 ‘아멜리아 금광’의 값어치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차이엘드의 입장에서는 위기를 넘긴 일이었지만 그 수장인 카일은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계획이 완전히 망가졌군.’
아멜리아 광산은 일전에 그녀가 ‘차이엘드는 금이 아니라 금광이 많다’는 레이디 클레어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자마자 기획한 선물이었다.
약혼식 날에 맞춰 잘 개발된 금광과 그녀에게 금을 캐다 줄 광부들, 아멜리아 광산이라는 명칭이 적힌 증서를 선물하겠다는 생각을 해내곤 얼마나 뿌듯해했던가.
‘누나는 금을 좋아하시니까. 이 선물도 좋아해주셨으면 좋겠는데.’
약혼녀가 선물을 받고 깜짝 놀랄 것을 생각하면 카일은 자다가도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계획을 지디마가 다 망쳐버린 것이다.
‘개자식.’
게다가 그냥 망친 것이 아니다. 지디마는 아멜리아 금광에 전쟁 자금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누나가 싫어하시겠지.’
아멜이 부르짖은 사랑과 평화에 반쯤 세뇌된 카일은 비통함과 분노에 의자 손잡이를 콰득 쥐었다.
취한 아멜에게 붙잡혀 호텔로 끌려갔던 그 순간부터 약혼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소중하게 키워온 사랑에 전쟁이라는 끔찍한 단어를 묻히다니.
“하일드. 거기 있습니까.”
곧바로 돌아온 하일드는 주인의 기세에 눌려 움찔했다. 살기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켈트만에 있는 간부들에게 지령을 전달하십시오. 시간이 날 때마다 가능한 한 많은 예금액을 인출하라고.”
원래는 한 번만 돈을 뽑을 생각이었지만 아멜리아 금광이 까발려진 지금, 카일은 지디마를 응징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리엔 공주에게도 슬슬 준비하라 전하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지디마를 종이호랑이로 만들어야겠습니다.”
“예, 전하.”
하일드는 재빨리 명을 수행하기 위해 집무실에서 빠져나갔다. 인상을 굳힌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일은 문틈 새로 약혼녀를 발견하곤 움찔했다.
“카일. 들어가도 돼요?”
“…….”
누나는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두 글자만 나오면 아연실색하는 사람이니. 아니, 그 전에 돈을 막 쓰면 어떡하냐고 우는소리를 하겠지.
잔소리를 듣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내 돈 내가 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로 일관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약혼녀가 제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아주 작은 사치도 그냥 넘기지 않는 건? 훌륭한 공작 부인의 자질이다.
‘슬슬 차이엘드에 집착하시는 건가.’
차이엘드는 곧 수장인 자신을 뜻했다. 즉 누나가 아멜리아 광산이라는 소소한 선물에 기함하는 건 제게 집착하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나라 잃은 얼굴이던 카일은 급속도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카일. 잠깐 얘기 좀 해요. 신문에 나온 아멜리아 광산 얘기가 진짜예요?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부담스러워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가문의 돈을 그렇게 막 쓰는 건 좀…….”
그녀의 걱정에는 차이엘드의 안주인이라는 자각이 확실했다. 고작 이런 걸로 부담스러워하시다니. 카일은 야금야금 선물을 늘려 그녀의 선물 허용 범위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아몬드보다는 금이 더 활용도가 높을 것 같아서 선물하려고 했던 건데, 계획이 틀어져서 유감입니다.”
진심으로 유감인 얼굴이었다. 아니, 나라를 잃었다고 해도 믿을 시무룩한 얼굴. 아멜은 잘생김에 숨 쉬는 것을 잠시 잊을 뻔했다.
“카일. 그런 건 필요 없어요. 축하할 일이 생기면 작은 파티 한 번만 열어주면 돼요. 금광 같은 무시무시한 선물 말고.”
“……이제 금이 싫으신 겁니까.”
“지디마의 말대로 전쟁 자금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사랑과 평화, 알죠? 선물은 필요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까.”
일평생을 차이엘드의 스케일에 맞춰 자라온 카일은 아멜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호사라니. 아직 차이엘드가 소유한 섬들에 방문해본 적도 없으면서.
“뭘 드려야 기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선물은 됐고, 카일만 있으면 돼요.”
“그래도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사랑받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그의 태도에 아멜의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어휴…… 굳이 비싼 선물 필요 없어요. 금광? 전 그런 것보다 카일이 향수만 뿌리고 조신하게 침대에 누워있는 게 훨씬 좋아요. 저번엔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그런 서프라이즈는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
“……그때 좋았습니까?”
“그럼요. 두말하면 잔소리죠. 제가 선물해준 향수만 달랑 걸치고 탄탄한 품에 안아주는데 안 좋겠어요? 역시 선물은 가슴, 아니, 마음이죠.”
“그런 선물을 좋아하신다니 종종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요. 괜히 돈 들여서 비싼 옷 둘둘 걸치지 마세요. 그런 거 다 사치야. 카일처럼 조각 같은 사람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제일 빛나는 법이라고요.”
카일은 속사포로 쏟아지는 아멜의 말 하나하나를 귀담아들었다. 선물보다 저를 더 원한다는 말은 설탕을 뿌린 듯 달콤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래서 말인데, 제발 아멜리아 금광 일은 없었던 걸로…….”
“이미 서류 작업을 다 마친 후라. 결혼 1주년 선물은 다른 걸 고려해보겠습니다.”
차이엘드 공작의 단호함은 상대를 위축시키는 힘이 있었다. 아멜은 마땅한 대꾸를 하지 못하고 멋쩍게 웃었다.
“누나는 한 달 후에 있을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 준비에만 힘써주십시오. 나머진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머지?”
“제 곁에 있고 싶다 하셨으니 결혼 준비를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멜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눈앞의 연하남에게는 브레이크라는 것이 없었다. 미친 듯이 목표지점을 향해 돌진하는 게 차이엘드였다.
「<제국의 최신 웨딩>과 <그녀가 꿈꾸는 결혼식>책을 열 번씩 읽었으니 준비는 충분해.」
속마음을 들어보니 하루 이틀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아멜은 낯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일전에 탐내신 혼수를 준비하는 중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혼수?”
내가 카일에게 뭘 사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던가. 아멜은 곰곰이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애당초 평범한 물건이었다면 차이엘드가 기다려야 할 리는 없었다.
“올해 안으로 준비될 겁니다.”
카일은 산뜻하게 웃으며 아멜의 왼손에 손가락을 얽었다.
***
얼마 후. 지디마는 차이엘드 간부들이 예금을 인출하지 못하도록 군사들을 보내 차이엘드 광산 주변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 과감한 조치에 국민들의 불안감은 정점을 찍었다.
‘통제하지 않으면 넘길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가.’
‘겨우 하일 제국 공작의 움직임에 이 정도로 휘둘린다고?’
‘결국 은행에 맡긴 돈을 찾지 못했는데…….’
‘백주궁은 외교를 어떻게 하고 있는 거야?’
하일 제국과 차이엘드를 향해 막연히 향하던 분노는 시간이 흐를수록 백주궁으로 향했다. 오죽하면 공주가 친히 광산으로 거처를 옮겼겠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국민들 중 가장 화가 나 있던 건 임금을 떼먹힌 광부들이었는데, 그들은 차이엘드가 광물의 대금을 성실히 지급해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이엘드가 지급한 대금은 어디로 갔지?’
‘백주궁 측은 차이엘드가 금광을 개발해 전쟁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지만……’
‘백주께서는 그 돈을 어디에 쓰신 건가.’
기세를 몰아 차이엘드에서는 다분히 정치적인 담화문을 발표했다.
켈트만의 목재와 광물을 생산해온 일꾼들도 차이엘드의 고용인이나 다름없으니, 백주궁 측에서 원한다면 그들의 임금을 지급할 돈을 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켈트만의 은행들은 파산을 막기 급급해 왕실에 돈을 빌려줄 여력이 없었다. 백주가 꼬리를 내리면 임금을 받을 수 있다니 노동자들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지디마에게는 몇 푼 되지 않는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켈트만 왕실의 콧대가 더 중요했다. 그렇다고 밀린 임금을 더 이상 지불하지 않는다면 광부들이 들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
“메디안. 지금 켈트만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항목이 뭔지 알아오게. 사치스러운 물건이라면 더 좋겠군.”
약 일주일 후. 켈트만 왕실은 당장 다음 달부터 몇 가지 사치품에 특별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공문을 발표했다. 주요 항목은 벽난로와 마차, 모피와 술이었다.
모든 술에 세금이 붙어 값이 오른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광부들은 그야말로 눈이 뒤집혔다.
“이젠 술도 마음대로 못 마시게 한다는 건가?”
“사치를 막는다면서 맥주에는 왜 세금을 붙이는 건지 모르겠군.”
“퇴근 후 한 잔을 못 하게 된다고?”
피로회복제와도 같던 술을 빼앗긴 광부들은 분개하며 운집했다. 새로운 주류세가 신설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마음껏 취하지 못할 바에야 백주의 목을 취하리라.
리엔은 다분히 위험한 그들의 새 슬로건을 듣고 방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기로 했다.
***
이튿날 저녁. 아멜은 카일과 오붓하게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멀리서 느린 음악이 흘러나왔으며 촛불은 부드럽게 일렁였다.
“이런 평화로운 저녁은 오랜만이네요.”
카일은 아멜이 평화라는 두 글자를 발음할 때 짓는 표정을 좋아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저 얼굴을 꼭 지켜주고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를 맛볼 무렵, 하일드와 브루노가 급히 들어와 카일에게 고개를 숙였다. 카일은 기다리던 소식이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전하. 백주궁이 광부들을 주축으로 한 국민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지디마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차이엘드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있다 합니다.”
“그렇습니까?”
“백주는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하께서 베푸신 아량 덕에 곧 평화가 찾아오겠지요.”
유능한 집사장 하일드는 어휘 선택마저 완벽했다. 카일은 칭찬해달라는 듯 아멜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카일.”
“…….”
태연하게 당신이 주문한 평화를 가져왔노라고 말하려던 카일은 그 화사한 웃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일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카일. 기념주라도 한 잔 마실까요? 좋은 일이니 기념하고 싶어요.”
“제 방 발코니에 올라가서 마시는 건 어떻습니까?”
발코니는 아멜리아 호수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물론 침대에서 가까운 곳이기도 했고. 카일이 눈을 반짝이자 아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일드. 공작 부인께 걸칠 것을 드리십시오.”
짧게 명한 카일은 그녀를 이끌고 발코니에 들어섰다. 마침 적당히 가라앉은 해가 호수에 얼비쳐 환상적인 노을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멜이 붉게 물든 호수를 바라보며 벅찬 기분에 휩싸였을 때 바네사가 카디건을 들고 방에 들어왔다. 아멜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바네사, 켈트만 소식 들었어요?”
바네사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리곤 마님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했다.
“네. 들었어요. 어쩜 그럴 수가 있는지…… 광부들이 곡괭이로 백주궁을 반쯤 부쉈다던데. 백주의 주변을 지키던 내관들은 뒈지기 전까지 팼다더라고요. 광부들 풀스윙은 뼈도 부술 텐데.”
“……바네사.”
카일이 다급히 그녀를 막아 세웠지만 한번 트인 바네사의 입은 멈출 줄 모르고 나불거렸다.
“백주가 피를 한 방울도 안 흘렸다길래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술을 빼앗긴 광부들이 백주의 머리채를 잡고 술독에 처박았대요. 숨 쉴 때마다 세금을 걷을 테니 너도 한번 내 봐라, 하면서. 어휴. 아무리 술에 세금 붙은 게 화나도 그렇지…….”
“…….”
“어라? 두 분, 절 왜 그렇게 보세요?”
카일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단번에 불살라버린 바네사를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