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80화 (80/134)

#80

몇 달에 걸쳐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켈트만과 하일의 신경전은 하일 제국 측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지디마는 올해 중으로 친 차이엘드 성향이 강한 아들, 리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두 국가의 신경전이 끝났다는 소식보다 모두의 이목을 끄는 소식은 따로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켈트만의 리엔 공주와 결혼이라니…….”

“정세를 위한 정략결혼이라면 나디아 공주님이 켈트만으로 가실 줄 알았는데 말이죠. 목걸이를 잃어버린 게 하일이잖아요.”

“사신단이 켈트만에 있을 때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던데. 어쩌다 리엔 공주님이 하일에 시집오게 된 걸까요?”

“듣자 하니 리엔 공주님은 무예에 출중하고 고집이 엄청 강하시다던데…….”

하일 제국의 수도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티타임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오늘의 주최자는 레이나 영애였다.

레이나 백작저에 오순도순 모여 앉은 영애들의 대화 주제는 켈트만의 리엔 공주와 하일 황제 베르드의 결혼이었다.

이유를 추측하던 그녀들의 입에 유독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 있었다.

“이번에도 다이앤 영애가 힘을 쓴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황실에서 근무하시는 오라버니께서 귀띔해주셨는데 리엔 공주님은 다이앤 영애와의 교류를 약속받고 결혼을 선택하신 거래요.”

“어머…… 다이앤 영애에게 사람을 홀리는 힘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요?”

별생각 없이 내뱉은 한 영애는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황제보다도 더 위라는 차이엘드 공작이 다이앤 영애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그녀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자제해야 했다.

“사신단에 지원할 걸 그랬어요.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피앙세인 다이앤 영애를 위해 범선을 이용하셨다던데.”

“역시 차이엘드는 스케일이 다르네요. 다이앤 영애는 어떻게 차이엘드 공작 전하와 연을 맺게 된 걸까요?”

사교계의 영원한 미스터리였다.

둘의 첫 만남에 대해 한바탕 열띤 토론을 마친 영애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레이나 영애에게 몰렸다.

“레이나 영애. 뭐 들은 거 없으세요?”

“다이앤 영애와 각별한 사이시잖아요.”

그녀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 사건 때문에 다이앤 영애와 꽤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것을 부러워하는 영애들이 태반이었다.

레이나 영애는 유명인의 친구라는 명예를 충분히 즐기며 거드름을 뺐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그 태도에 영애들이 더 안달을 냈다.

“레이나 영애. 뭐 들은 거 있으시죠?”

“그러고 보니 목걸이 사건 때 같이 계셨던 그레첼 남작 영애는 아예 사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오셨잖아요.”

“얘기해 주세요, 네? 궁금하단 말이에요.”

자고로 원성과 애원만큼 레이나 영애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새침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 뭐…… 저의 절친하고도 각별한 친우인 다이앤 영애와 그레첼 영애는 입이 무거운 편이라서요.”

“그래도 들은 게 있으시죠?”

“음…… 제 생각이지만, 공작 전하께서 다이앤 영애에게 반했을 것 같아요. 제가 남자였다면 충분히 그랬을 테니.”

레이나 영애는 아직도 목걸이 사건 당시의 아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는 엇비슷한데 인생 여러 번 산 것처럼 침착한 데다 지혜롭기까지 했다.

‘다이앤 영애는 공작 전하가 누나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이지.’

영애들 사이에 연하남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고 말이다. 픽 웃은 레이나 영애는 옷자락을 갈무리했다.

“아쉽지만 슬슬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아요. 차이엘드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거든요.”

“어머…….”

영애들은 부러움 반, 시기 반인 탄식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토록 얄미운 레이나 영애가 다이앤 영애의 앞에선 얌전한 애완견처럼 구니, 정말 다이앤 영애에게는 뭔가가 있는 게 확실했다.

***

복작복작한 것은 레이나 백작저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제법 잔디가 잘 정돈된 다이앤 백작저의 앞마당. 네다섯 명의 영랑들이 다이앤 백작에게 검술 교습을 받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평소보다 일찍 마친 만큼 복습을 열심히 해 오시길.”

“다이앤 경, 오후에 일정이 있으십니까?”

“차이엘드 공작저에서 저녁 식사를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오오…….”

영랑들은 차이엘드라는 거룩한 이름에 반응했다. 황가에서 크게 한 줄 잡지 못하는 가문의 자식인 이들은 차이엘드 가문의 마차도 구경해보지 못한 처지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쟁률을 뚫고 페르슈 다이앤의 제자가 된 소년들이었다. 참고로 백작저의 안에서는 다이앤 백작 부인이 어린 영애들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자녀 교육 요청이 쇄도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연대보증으로 쫄딱 망하긴 했지만 페르슈 다이앤은 최연소 총기사단장을 지낸 하일 최고의 기사였고, 그 아내 다이애나는 클레어 차이엘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사교계를 휘어잡던 여인이었다.

물론 교습의 경쟁률이 하늘까지 치솟은 가장 큰 이유는 둘의 외동딸인 아멜리아 다이앤이 차이엘드의 피앙세이기 때문이었다.

아멜이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자. 차이엘드 공작이 그녀에게 미쳐 있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알려졌다.

계산이 빠른 귀족들은 그 사실을 놓치지 않았고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교습을 의뢰했다. 자고로 연줄이란 미리 만들어 둘수록 단단하고 질긴 법이니.

이제는 아멜 몰래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리게 된 부부는 백작저를 정상화하는 데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빚은 아직 산더미만큼 많았지만 이대로라면 갚는 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검을 갈무리한 다이앤 백작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 부인을 찾았다. 그녀는 오늘을 위해 장만한 화사한 살구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부인. 슬슬 출발해야겠소. 마차를 잡으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지.”

눈치 빠른 영애들은 아직 다이앤 백작저에 마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서로 우리 가문의 마차를 이용하라며 아우성을 쳤다.

다이앤 백작 부인은 온화한 음성으로 그녀들을 달랬다.

“걱정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세요. 영애들이 늦게 돌아가면 부모님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네, 부인.”

얌전히 대답한 영애들은 마차에 오르려다 멈칫했다. 멀리서 웬 집채만 한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건…….”

“차, 차이엘드의 문장이잖아?”

“우와…….”

그렇다. 입이 쩍 벌어지는 규모의 마차와 털에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백마들은 차이엘드 공작이 처가에 보낸 것이었다.

마차에서는 웬만한 귀족보다 더 좋은 옷을 입은 마부가 여럿 내렸는데, 그들은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곤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차이엘드 공작부인이 될 다이앤 백작 영애의 양친을 편히 모시고 오라는 공작 전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어서 오르시지요.”

“어머, 고마워라.”

다이앤 백작 부부는 마차에 올랐다. 좌석 시트와 넓은 실내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흔들림이 적어 커튼을 치면 마차가 출발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설레기를 잠시. 다이앤 백작 부인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남편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이건 걱정거리가 있을 때 그녀가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입 모양으로 아주 작게 걱정을 토로했다.

“여보. 차이엘드 공작저에 레이디 클레어가 계시겠죠?”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못 했군.”

아멜은 레이디 클레어가 사교계의 전설이라는 것만 알지, 왜 전설로 군림하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다이앤 백작 부부는 악명 높은 그녀의 행동을 훤히 알고 있었다.

다이애나의 결혼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미혼 영애들은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소리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모 공작가의 영애가 온갖 수를 써 거의 사교계의 정점에 다다른 순간,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던 레이디 클레어가 무도회장에 나타났다.

“그때 부인과 풀숲에 숨어서 엿봤던 공작 영애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는군.”

“우리가 그 장면을 풀숲에 숨어서 봤던가요?”

“그랬지. 그때 부인이 너무 예뻐서…… 큼, 큼.”

아무튼, 공작 영애는 제게 향해야 할 관심을 독차지하는 레이디 클레어가 미워 독설을 퍼붓고야 말았다.

“레이디 클레어. 천한 소생인 당신과 내가 같은 공작 영애라고 불리는 거,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때, 레이디 클레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제왕의 얼굴을 하고 차근차근 상대 공작 영애에게 내뱉었다.

“온실 속 화초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 같은데. 불쌍히 여겨 30초를 줄 테니 내 구두나 핥아.”

순간 기세에 눌린 상대 공작 영애는 그제야 차이엘드라는 가문의 힘을 깨닫게 되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그 레이디 클레어가 아멜의 시누이라니. 게다가 오늘 저녁, 함께 식사를 한다고 했다. 다이앤 백작 부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렸다.

“오, 여보…… 기도해야겠어요.”

“그럽시다. 사랑이 많으신…….”

백작 부부는 손을 꼭 맞잡은 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

차이엘드 공작저 또한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아멜은 오늘 방문할 손님들을 위해 손수 정원에서 꽃을 꺾어다 구석구석에 장식했다.

오늘의 만찬은 ‘축하할 일이 있으면 차라리 소박한 파티를 열어달라’는 아멜의 말을 놓치지 않은 카일의 선물이었다.

금광은 한사코 거절하던 아멜은 지인들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은 활짝 웃으며 받아들었다.

“카일,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건 선물.”

아멜은 꽃이 한 아름 담긴 바구니에서 한 송이를 꺼내 카일의 귀에 꽂아주었다. 꽃에 꽃을 더하니 그 모습이 가히 예술이었다.

“어후…… 카일.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그를 꼭 껴안은 아멜은 다시 꽃을 장식하러 걸음을 재촉했다. 카일은 한참 동안 그 경쾌한 모습을 감상하다, 보고를 듣기 위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편, 클레어는 마라바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한 보고서를 들고 카일의 집무실로 향하다 우뚝 멈춰 섰다. 벽에 걸린 거울 때문이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얼굴을 잠시 조물거리다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람 하나 잡아먹겠군. 다시.’

클레어는 몇 번이고 화사하면서도 친절하고 따뜻한 웃음을 연습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은 안면근육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안 돼.’

클레어는 며칠 전, 신분을 숨긴 채 찾은 서점에서 좋은 시누이가 되는 방법이 적힌 책을 찾아달라고 했다가 면박을 당했다.

“좋은 시누이? 세상에 좋은 시누이는 없어요. 시누이는 없는 게 최고지. 이런 책은 어떠신지?”

서점 주인이 추천해준 책은 <세상에 착한 시누이는 없다>라는 책이었는데, 세상 여자들이 시누이라는 존재를 사탄보다 더 악하게 여긴다는 게 내용의 전부였다.

‘절대 안 돼.’

클레어는 아멜의 지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특히 다이앤 백작 부부에게. 그래야 아멜이 한층 편안하게 자신과 어울릴 게 아닌가.

‘……눈이 안 웃는 게 문제인가.’

클레어는 거울에 들어갈 기세로 얼굴을 가까이한 다음 최대한 선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입꼬리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듯 파르르 떨렸다.

‘이게 무슨…… 음?’

경련하는 입꼬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다 인기척을 느낀 클레어는 휙 돌아 옆을 바라보곤 굳었다.

“……공작 전하.”

“……레이디 클레어.”

머리에 꽃을 꽂은 카일과 거울을 보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던 클레어 사이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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