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하일 제국의 동쪽, 트라이하 제국의 수도.
그곳에선 한참 전 켈트만의 수렵제에서 돌아온 이타르와 부황 레오시스 2세, 제국의 황태자인 이녹이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래. 이리 모이니 얼마나 좋으냐.”
레오시스 2세가 말했다. 이타르는 온화한 미소로 긍정하는 황태자가 거슬려 인상을 찌푸렸다. 부황의 앞이라고 얌전을 떨다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입안의 혀처럼 구는 게 현명하긴 하겠군.’
이타르는 이녹의 처지를 평하며 비소를 흘렸다. 이복여동생까지 죽여가며 얻은 황태자 자리를 소중히 사수하는 꼴이 같잖았다.
명백히 저를 향한 비웃음을 감지한 이녹은 그저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티푸드는 입에 대지도 않았건만 입안이 깔깔했다.
“이타르. 켈트만으로 향하는 사신들의 틈에 섞여 무엇을 보고 왔지? 보고서를 올려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황태자의 음성은 언제나 온화했다. 이타르는 듣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그 목소리가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이아나를 죽음으로 몰아갈 때도 이런 목소리였겠지. 한결같이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 순진한 아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을 것이다.
“배운 것은 딱히 없고. 켈트만의 왕실이 아무리 차이엘드에게 뒤흔들린다고 한들 지금의 트라이하만큼 불안하진 않을 겁니다.”
“……이타르.”
“누가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손수 정벌한 식민지에서 은을 무한대로 퍼오는 트라이하가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두 아들이 온기라곤 없는 눈빛을 주고받기 시작하자 황제는 당겨오는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이녹은 이만 가보고 이타르, 너는 잠시 남거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말씨는 공손했으나 존중의 기운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황제는 쓴웃음을 내비쳤다. 이녹과 마찬가지로 온화하던 이타르가 이리도 쌀쌀맞아진 것은 모두 그때부터였다.
“아직도 이아나를 그리워하느냐.”
“……아직도, 라는 말이 왜 붙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반응을 원하시는 겁니까.”
“이미 사고로 죽은 아이다. 언제까지 누이동생의 죽음에서 허우적댈 것이냐.”
이타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부황의 말을 곱씹었다. 사고로 죽은 아이라. 그건 당신들이 원하는 사인이겠지. 더 이상 대화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이타르, 아직 내 말은……”
“쾌차하시기를 바랍니다, 폐하.”
갑작스레 터지는 부황의 기침을 들으며 이타르는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처소에 들어와서도 그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직도 잊지 못했냐는 물음은 이아나를 빨리 떨쳐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 더욱 불쾌했다.
“오라버니! 저, 그 사람한테 이 꽃을 선물 받았어요. 예쁘죠?”
사랑하는 이에게 받았다며 백합 다발을 안고 환하게 웃던 아이가 어느 날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조사를 하지 않던 황실과 1황자의 측근들.
일순간 수도에서 모습을 감춘 그 아이가 사랑하던 남자와 그 가문.
그리고, 독약을 마신 사람처럼 유달리 푸르던 유리관 속 이아나의 입술. 이타르는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다이앤 영애가 생각나는지 모르겠군.’
먼발치에서 구경한 다이앤 영애는 이아나와 눈동자 색깔도, 머리카락 색도 달랐다. 그러나 그녀가 웃을 때마다 움푹 패던 보조개는 둘을 닮다 못해 같은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트라이하의 신문물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이야.’
왜인지 한번 시작하자 그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딴생각에 푹 빠진 이타르를 멀리서 달려온 그의 수하가 불러세웠다.
“이타르 님. 기다리시던 분이 오셨습니다.”
베놈의 말을 들은 이타르의 눈가에 웃음이 서렸다. 차이엘드의 추격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고 하더니만, 늦은 걸 보니 정말인 것 같았다.
“들여보내도록.”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누더기가 된 신분 위장용 망토를 쓴 남자가 맥없는 걸음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남자는 천천히 망토를 벗었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오랫동안 씻지 못해 추레한 몰골과 쇠붙이로 된 팔이 눈에 띄었다.
“마라바스 라이델. 오랜만이군. 그 꼴로 이곳에 돌아온 걸 보니 꽤 힘든 상황인가 본데.”
“이제 이타르 님께서 보호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타르는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내가 널 왜? 하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마라바스는 자신감이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룬 연구 성과를 보시면 그리되실 겁니다.”
***
한편,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음에도 카일과 클레어는 이렇다 할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방금 보았던 서로의 낯선 모습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미친 것도 아니고 머리에 웬 꽃을?’
‘왜 거울을 보고 실성한 사람처럼……’
둘은 서로를 향한 당혹감을 감추지 않으려 애썼다.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값을 주고 서로를 이용하는 사이인지라 이런 낯선 모습을 보이는 건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둘은 선반에 놓인 고급스러운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곧 저녁식사를 위해 초대된 아멜의 지인들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미친 게 아니라 거울을 보며 표정을 풀고 있었던 겁니다.”
클레어가 카일에게 보고서를 들이밀며 말했다.
카일은 티 내지 않았지만 의외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아무런 언급도 없이 넘어갈 줄 알았는데 변명이라니.
‘그만큼 누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건가.’
그 마음이라면 저도 마찬가지였다. 카일도 보고서를 훑어보며 조용히 대꾸했다.
“약혼녀가 꽂아준 겁니다. 머리에 장식품을 다는 취미는 없습니다.”
“아멜이 그랬다면야. 취향은 존중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논의할 것이나 어서 논의했으면 하는데.”
카일은 상기된 얼굴을 감추려 보고서를 눈높이로 들었다.
클레어의 보고서에는 마라바스의 행적과 최근 트라이하 제국의 분위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트라이하의 1황자 이녹은 황태자가 된 후로부터 황실과 제국의 부를 위해 식민지를 건설했는데, 기술의 발달로 신형 선박이 보급된 지금 그의 노력은 하나둘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트라이하 황실의 깃발을 건 대형 선박들이 머나먼 식민지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은과 향신료를 실어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양이 트라이하의 고질적인 문제인 노숙자와 부랑자 문제를 싸그리 해결하고도 남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 한 셈.
“듣자 하니 1황자를 황태자로 옹립한 세력이 재미를 보고 있다던데. 트라이하의 황실은 3황자 세력이 연합해 반역을 꾀할 것을 염려하고 있을 겁니다.”
“본래 계승 전쟁의 패배자들은 연합하기 마련이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마라바스 라이델도 3황자 측에 가담할 듯합니다.”
이것이 두 차이엘드가 모인 이유였다. 정보부를 갈아 넣은 끝에 마라바스가 트라이하의 황궁, 그것도 3황자의 근처를 배회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른 건물도 아니고 황궁인지라 자칫 외교 분쟁으로 번질 수도 있기에 클레어는 감시원을 붙여두는 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녀는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물가 문제도 있으니 트라이하에 직접 가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경매 시즌이니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여행이나 유학 때 만들어둔 지인들이 도움이 될 겁니다. 공작 전하께서는 차이엘드 공작 부인의 곁을 지키십시오.”
당당한 말투와 달리 클레어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났다.
아멜의 안전을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렇게 하면 그녀의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에 참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선뜻 맡기라고 말하려던 클레어는 화사한 흰 드레스와 백합 장식을 하고 웃을 아멜을 떠올리곤 아쉬움에 젖었다.
“……대신 아멜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주십시오.”
어느 때보다 우울한 목소리로 그녀가 부탁했다.
***
“오랜만이에요, 다이앤 영애!”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먼길 와줘서 고마워요. 그레첼 영애, 레이나 영애. 이쪽으로 오세요.”
“고맙긴요. 차이엘드 공작저에 초대받는 일이 어디 흔한가요?”
과연 레이나 영애다운 솔직한 반응이었다.
처음엔 이 성격 때문에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가식 없는 특유의 태도가 그저 편했다.
“바네사도 오랜만이네요?”
게다가 둘은 목걸이 사건 때 함께였던 바네사를 기억했다. 누가 보면 황궁 구금실 4인방이라고 부를 조합이었다.
나는 두 영애와 시종들을 데리고 차이엘드 공작저 본궁 로비를 찬찬히 구경시켜주었다.
차이엘드 공작저는 카일에게 선택받은 자가 아니면 출입이 어렵기에 온 김에 보고 가라는 뜻이었지만 둘은 어째 유령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소심하게 걸었다.
‘역시 부담스러운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뻣뻣해질 이유가 없었다. 목걸이를 도둑맞을 당시에도 둘은 이렇게 굳지 않았었는데.
‘하긴. 차이엘드 공작저가 좀 화려하긴 해.’
거실에 놓인 장식품들에는 죄다 금테가 둘러쳐져 있었다. 고용인들은 금이 닳을까 봐 청소도 조심한다고 했다.
모처럼 지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인데 일부러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 이러다 체할라.
“구경은 이쯤 할까요?”
하지만 두 영애는 조금만 더 보게 해 달라며 아쉬운 얼굴을 했다. 대체 둘을 두렵게 하는 건 뭘까. 나는 슬쩍 둘의 마음을 읽어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오실지 몰라.」
「그 악명 높은 레이디 클레어가 계신단 말이지……」
「공작 전하를 사석에서 뵙는 건 처음인데.」
「이 자리에서 실수하면 부모님께서 나를 죽일 거야. 죽이고말고.」
……대체 차이엘드는 다른 귀족들에게 어떤 이미지인 건가.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는다는 소문이라도 있는 걸까.
‘그래도 이젠 대놓고 무서워하지는 않는구나. 예전에는 정말 괴물이라도 본 얼굴을 했었는데.’
곧 도착한 어머니와 아버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둘은 내 손을 꼭 잡곤 그간 시누이와 함께하는 시댁살이가 괜찮았냐고 뜬금없이 물어왔다.
“그야…… 차이엘드는 언제나 최고죠. 저만 불편함 하나 없이 살아서 두 분께 죄송할 지경이에요.”
맞잡은 손을 타고 이들이 왜 이렇게 클레어를 무서워하는지가 들려왔다. 언니, 왜 공작 영애를 꿇리셨어요. 그런 짓을 하면……
‘멋있어. 역시 내 최애가 최고야. 무시하면 확 짓밟아주는 게 클레어답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주억거리려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가 긴밀한 대화를 마친 듯한 클레어와 카일이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 생겼나?’
둘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좋은 날인데 다들 왜 이러시는 걸까. 마치 서로를 누가 더 경계하는지 겨루는 분위기였다.
“카일.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왜 그래요, 응?”
쪼르르 다가가서 평소 하던 것처럼 물었을 뿐인데 손님들 쪽에서 헉,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카일이 사르르 표정을 풀고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인사할 땐 다들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클레어가 굳어 있어서 그런가.’
평소에는 잘 웃는 최애가 중대한 시험을 앞둔 것처럼 굳어 있으니 인상이 영 험악해 보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필살의 눈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저희 부모님을 오늘 처음 뵙는 건가요?”
왜인지 다이앤 백작 부부는 맞잡고 있던 손을 더 꽉 맞잡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클레어의 속마음.
「……일단 웃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미친 여자 보듯 하면 어떡하지?」
「아멜의 지인들인데……」
잠시 후. 고민을 마친 클레어가 여태까지 봐왔던 것 중 가장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거울을 보고 연습이라도 한 건지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본 그레첼 영애와 레이나 영애는 입을 쩍 벌렸다. 그래. 이 미모를 정면에서 마주하고도 침착한 건 말이 안 되지.
최애를 향한 감상이 듣고 싶었기에 나는 둘의 옆에 서 마음을 읽어냈다.
「……그 레이디 클레어가 웃음을?」
「다이앤 영애, 정말 장난 아니구나……」
아무래도 미모에 감탄한 건 아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