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아멜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차이엘드 공작저의 만찬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클레어와 카일이 그녀를 평소처럼 대할 때마다 레이나 영애와 그레첼 영애, 다이앤 백작 부인이 흠칫 놀랐지만 정작 본인은 특별대우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탓에 그 사실을 몰랐다.
식사를 마치고 레이디들끼리 둘러앉아 티타임을 즐길 무렵, 다이앤 백작 부인은 딸의 팔목에 자리 잡은 팔찌의 색깔이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아멜. 켈트만에서 누가 네게 음심이라도 품은 거니?”
“아…… 리엔 공주님이 제게 관심을 보이시더라고요. 아버지의 검술을 오랫동안 눈여겨보셨다고 하셨어요.”
“어머. 나중에 뵐 일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같이 차라도 한잔하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카일도 그녀와 곧 재회할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추리하던 그녀를 레이나 영애가 톡톡 건드렸다.
“다이앤 영애, 당일 입고 갈 드레스는 어느 디자이너에게 하실지 정하셨어요? 장신구는요?”
“처음으로 직접 디자이너를 골라봤는데 잘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다음 주에는 드레스가 도착할 것 같으니 가지고 있는 장신구들을 슬슬 살펴봐야겠네요.”
장신구도 새로 싹 다 맞출 것. 클레어 머리가 빠르게 일정을 잡았다. 그녀는 아멜을 걱정하는 다이앤 백작 부인에게 친절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다이앤 백작 부인, 걱정 마세요. 당일엔 출장 때문에 참석하지 못할 테지만 아멜을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로 만들어두고 갈 겁니다.”
레이디들의 대화는 어느덧 아멜의 수여식에 쏠리게 되었다. 식사 내내 축하받은 아멜은 또 한 번 축하한다는 말을 들으며 얼굴을 붉혔다.
‘베르드를 반 협박해서 얻어낸 건데. 뭐, 먼저 부른 게 그쪽이니 난 미안해할 거 없긴 하지.’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아멜은 딱딱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카일은 선대 차이엘드 공작들이 수집한 무기와 방어구들을 구경시켜주겠다며 다이앤 백작을 2층 복도로 안내했다.
“보존 상태가 무척 훌륭하군요. 역시 차이엘드는…….”
모처럼 장인어른에게 점수를 따 기분이 좋아진 카일은 이제껏 보인 엉큼한 사위 이미지를 만회했다는 생각에 환히 웃었다.
“집무실에도 검이 전시되어 있는데 보러 가시겠습니까?”
“차이엘드의 집무실에 방문하는 영광을 허락하신다면.”
“말씀 편히 하셔도 됩니다.”
“허허…….”
황제보다도 더 위라는 차이엘드 공작에게 쉬이 말을 편히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카일의 태도에는 아멜을 얼마나 사랑하고 존중하는지가 배어 있었다.
‘차이엘드 공작이라면 우리 아멜을 평생 사랑해주겠지.’
소문과 다른 그의 친절하고 성실한 태도가 아버지의 경계심을 마침내 허물었다.
나라 경제가 움직이는 곳이라던 차이엘드의 집무실에 들어선 다이앤 백작은 마침내 말하기로 했다. 내 딸을 잘 부탁한다고.
“공작 전하. 차이엘드의 격에는 한참 뒤떨어지겠지만 아멜의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결혼…… 지참금 말입니까?”
장인어른께 어떻게든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카일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 지참금? 도대체 그런 게 왜 필요한 건가.
‘마련? 그럼 마련되기 전에는 결혼을 못 한다는 건가?’
카일은 몹시 속상하고 답답했다. 다이앤 백작에게 연대보증을 서달라고 한 다음 도망친 새끼를 당장이라도 잡아다가 엄벌을 내리고 싶을 만큼.
게다가 아무리 다이앤 백작 부부가 과외 활동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지만 이 속도라면 약 350년 후에나 결혼식을 겨우 올릴 게 분명했다.
“아닙니다, 다이앤 백작. 저와 아멜리아는 사랑으로 맺어진 사이라 결혼 지참금 같은 세속적인 풍습은……”
카일은 결혼 지참금 따위 필요 없고 제발 몸만 오면 된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말하며 재빨리 제 책상 서랍을 뒤졌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약혼녀가 일전에 줬던 목각인형 속 사랑고백을 들려줄 생각이었다.
딸이 나를 사랑하고 저를 차이엘드의 일원이라 생각한다는데 세상 어느 아버지가 지참금을 다 마련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까.
“전하. 무엇을 찾으시는지요.”
“저희 사이의 넘치는 사랑을 증명할 테니, 결혼 지참금 얘기는 없던 걸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카일의 다급한 손길은 대참사를 낳고야 말았다. 책상 서랍 하나가 달칵 열리며 안에 있던 내용물이 훤히 드러났다.
서랍 한가득 사탕이 쌓여 있었다. 하일 제국의 성인 남녀라면 누구든 이 포장지를 알고 있었다. 이건 맛만 봐도 100% 피임을 보장하는 마법의 사탕이었다.
“…….”
“…….”
카일과 다이앤 백작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카일은 침착하게 서랍을 닫으려 했지만 꽉 들어차 있던 사탕들이 어질러진 까닭에 서랍이 닫히지 않았다.
다이앤 백작은 하루에 세 개씩 먹어도 한 달 동안 다 먹지 못할 양의 사탕들을 보며 아득해졌다.
이게 요즘 젊은이들이 타인에게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인가? 다다익선? 그렇다면 꼰대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아니, 그 전에. 내 딸은 정녕 괜찮은 것인가.
“다이앤 백작. 이건……”
답지 않게 변명을 시작하려던 카일을 보며 다이앤 백작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인위적인 웃음이었다.
“허, 허허…… 사랑이 넘치는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카일은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
어느덧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 당일이 되었다.
나는 의자에 깊이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차이엘드의 고용인들은 오늘의 주인공인 나를 더욱 아름답게 치장시킬 생각에 들떠 있었다.
어제 트라이하로 떠난 클레어가 주문해둔 장신구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전신을 장식했다. 그 무게감이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분명 설레발을 치며 재잘거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나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오늘 행사 일정을 떠올렸다.
‘타국의 사신들은 벌써 도착했다고 했지.’
황제는 약속대로 그 규모를 황실 예산이 허락하는 한 최고로 설정해, 항간에서는 내게 친절하게 굴어 차이엘드의 환심을 사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왔다.
황실의 명예를 드높인 자를 직접 보고 축하해달라는 의미로 각국에 초대장이 뿌려졌는데, 덕분에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트라이하에서는 이타르를 보낸다고 했어. 지금쯤 도착했을까.’
이 사실을 들을 당시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두 악역 간 접점이 생겼단 것도 절망적인 상황이건만, 아예 악역이 하일을 방문한다니.
그나마 차이엘드의 감시가 붙은 마라바스는 따라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위안이었다.
‘이타르도 미치지 않은 이상 상대국의 수도에서 난리를 피우진 않을 거야. 이번엔 얼굴 정도만 보다 가겠지.’
이타르라는 자가 언젠가 일을 칠 것 같으니 미리 무찔러주세요, 하고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그와 접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후…… 국빈들만 경계해야 할 상황은 아니지.’
문제가 되는 집단이 또 하나 있었다. 수렵제 당시 마라바스에게 당해 카일에게 막말을 퍼부었다가 기절해버린 영랑들이 얼마 전 차이엘드 병원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나는 카일이 조금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차이엘드 공작에게 우를 범했다는 사실을 안 영랑들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는 알 수 없었다.
‘카일에게 당했다는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어. 증거가 없기도 하고, 뒤에서 차이엘드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건 쉬운 일일 테니.’
나는 한숨을 삼키곤 지금 당장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드레스를 갈아입는 대로 황궁으로 가 수여식 리허설을 진행해야 했다.
각국의 귀빈들이 모이는 자리이니만큼 실수를 했다간 두고두고 까이리라. 일생에 그런 사건은 데뷔탕트 하나면 충분했다.
어느덧 화장이 마무리된 것인지 시녀들이 제 일인 양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전신거울 앞으로 이끌었다.
“누나 님. 다 되었습니다!”
“세상에, 어쩜……!”
카일이 오두방정을 떨어 내 기분을 맞춰 주라고 별도의 명이라도 내린 것일까. 평소와 비슷할 텐데 왜 이렇게…… 어?
‘이게 나라고?’
거울 안의 여자가 다소 멍청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반묶음을 해 백합으로 장식한 머리, 눈송이를 엮어 만든 듯한 화려한 목걸이. 그리고 전신을 휘감은 흰 드레스가 마치 화창한 봄날 결혼하는 신부처럼 보였다.
평소와 달리 아멜리아의 흰 피부와 긴 속눈썹, 애교스런 눈매를 팍팍 강조한 메이크업은 가히 마법이라던 신부 화장에 비견될 만했다.
“마님, 오늘은 평소보다 배로 아름다우시네요. 한 떨기 백합 같아요.”
“……괜한 말 말아요, 바네사.”
반사적으로 답하긴 했지만 수여식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드레스를 입은 나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기에 클레어가 선물해준 흰 모피와 백금 장신구들까지 더해지니 인간 보석함이 된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며 오늘 일정을 머릿속에 그렸다.
이제 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훈장을 받고, 지하까지 추락한 다이앤 백작저의 명예를 어느 정도 회복한 다음, 악역들과 조금도 엮이지 않고 돌아오면 끝.
경비를 조금 늘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시녀들이 흠칫 놀라더니 후다닥 자리를 피해주었다. 누가 등장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카일. 마침 부탁할 게 있었는데 잘 와줬어요. 오늘 있을 수여식에서…… 카일?”
나와 마찬가지로 예장을 한 카일은 문 앞에 서서 혼이 나간 사람처럼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얼굴 앞에 손을 휘두르자 겨우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주 짧은 눈 맞춤 후, 카일은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알겠다.
“누나 예쁘지.”
“…….”
시선은 피하면서도 얼굴은 성실히 끄덕이는 것 좀 보게.
격한 반응을 보여주는 게 기분 좋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에 집중할 때였다. 나는 카일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카일. 미안한 말이지만 경호 인원을 조금 늘려줄 수 있을까요? 안전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듣자 하니 타국의 사신들도 모이는 자리라 혼란스러울…… 카일?”
「다른 놈들이 이 모습을 본다고? 절대 안 돼.」
「하지만 안전이 더 중요하겠지.」
「황궁에 들여보낼 수 있는 경호 인력 최대치가……」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지금처럼 아름답겠지.」
「……아직 시간이 조금 있으니까 방으로 데려갈까.」
「결혼하고 싶다.」
속마음이 빗발쳐 다 읽어낼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픽 웃곤 카일의 감상에 잠깐 동조해주기로 했다.
“고마워요. 카일도 신랑 같아요.”
“……신랑?”
“제가 신부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잖아요? 그럼 카일은 제 신랑 같아야죠.”
“……!”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머릿속에서 축포가 터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