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카일이 기껏 공들여 바른 아멜의 립스틱을 엉망으로 만들 무렵, 하일 황실의 초대장을 받은 이국의 마차들은 하나둘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중 구경꾼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역시 트라이하 제국의 3황자와 그 일행의 행렬이었다.
“정말 저 마차 안에 트라이하의 황족이 타고 있을까?”
“바다 건너 대륙에서 여기까지?”
“그 다이앤 영애가 훈장을 받는다니 관심을 보이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
구름처럼 몰린 군중들은 트라이하의 푸른 마차를 보며 저마다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마차 안의 이타르에게도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하일의 시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들떠 있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행렬이라. 대든 복수를 이렇게 하는군.’
트라이하의 황실에는 저명한 연금술사가 널리고 깔렸다. 그들을 이용한다면 단번에 하일 제국의 수도까지 갈 수 있는 걸 굳이 마차를 이용하게 하는 심보가 눈물겨웠다.
표면적으로 이타르의 역할은 차이엘드의 수장에게 사업상 협조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하일과의 외교 관계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시시하다며 진작 관두었을 여정을 그가 감내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였다.
‘……아멜리아 다이앤.’
괴물 공작을 잘 길들여진 강아지로 만들어버린 그녀의 공적이라면 훈장을 받기 충분했다.
켈트만에서 보여준 영애의 역량도 웬만한 외교사절보다 뛰어나지 않았던가.
그녀는 흥미로웠다.
특별히 눈에 띄는 외모나 보조개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타르는 다이앤 영애의 아레테가 궁금했다. 분명 자신의 계획에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을 지녔으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녀에게 접근해야 했다. 그는 창밖을 보고 있던 시선을 맞은편의 여성에게로 옮겼다.
“신기하긴 하군. 누가 봐도 평범한 노파라고 생각하겠어.”
그의 말대로 동승한 노파에겐 특별하다고 칭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허름한 옷을 걸친 그녀는 그저 수프를 잘 끓일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나온 목소리는 명백히 남자의 것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이 여자의 몸이 오랜 시간 아레테에 노출된 덕에 가능한 일입니다. 보통 제 영약이나 아레테는 정신을 지배하는 정도에서 그치는데.」
“노파의 몸을 차지한 유령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라 영 불쾌하군.”
마라바스 라이델은 지금 연금술 영약과 목걸이로 부여받은 아레테를 이용해 그간의 연구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가 길거리를 방황하다 우연히 포착한 코델리아라는 노파는 왜인지 아레테의 기운에 장시간 노출되어 연금술 영약이나 주술, 아레테가 잘 듣는 체질이었다.
그뿐일까. 이 여자의 육신은 그야말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마법의 재료였다.
마라바스는 자신의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그녀를 설계해 시간을 초월한 존재로 만들 수도, 영약과 주술을 조합해 마도구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라바스가 주력하고 있는 개조는 코델리아를 살아 있는 무기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도피처로 트라이하를 선택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사람을 폭탄으로 사용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해주는 후원자는 누이동생을 잃고 파멸만을 원하게 된 이타르가 유일할 것이기에.
“마라바스. 이 여자의 성능은 어느 정도지?”
「하일의 황궁에서 코델리아를 죽인다면 폭발 주술이 발동되어 황궁 전체는 잿더미가 될 겁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주변에 있는 아레테의 결정도 연쇄 폭발을 일으킬 테니 사실상 수도는 정복할 수 있는 셈입니다.」
“이 정도 성과라면 로열 알케미스트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하군.”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오늘은 쓸 생각이 없다. 다이앤 영애의 아레테가 무엇인지만 확인하도록.”
「좋은 날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라바스의 목소리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가 조종하는 코델리아의 주름진 입가도 슬며시 따라 올라갔다.
***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시작된 훈장 수여식에는 수도에 상주하는 귀족들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생소한 귀족들까지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거기에 타국의 귀빈들까지 더해지니 베르드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다들 차이엘드 공작에게 잘 보이려 안달이 났군.’
아멜리아 다이앤은 모르는 듯했지만, 이미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혜택을 본 귀족들이 상당했다.
티파티의 티푸드로 다이앤 영애가좋아하는 크림치즈가 듬뿍 들어간 타르트를 들인 어느 귀부인은 수도의 값비싼 저택을 헐값에 낙찰받았다.
빛 때문에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리던 다이앤 영애에게 양산을 대준 어느 자작 영애는 평민인 연인과의 신분 차이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약소하나마 작위를 받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다.
‘차이엘드 공작은 미쳤어.’
쯧쯧 혀를 찬 베르드는 곧 주변을 둘러보곤 자신이 남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디아 공주가 그간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황궁 홀 전체를 다이앤 영애의 취향대로 꾸민 데다, 마치 오늘의 훈장 수여식이 황실의 중대사인 것처럼 초대장을 작성해 타국에 보내지 않았던가.
다이앤 백작저에 마차를 보낸 것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기보단 점수를 따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그나저나. 얼마 전 깨어났다는 영랑들이 연회 참석이라니.’
베르드는 구석에 몰려 있는 한 무리의 영랑들을 포착했다. 그들은 차이엘드 공작이 사신단에 지원했다는 얘기를 듣고 켈트만에 따라 다녀왔던 자들이었다.
공작과 함께 떠난 수렵제에서 모종의 문제로 정신을 잃었다가 최근 차이엘드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항간에는 괴물 공작이 그들을 해코지한 게 아니냐는 수군거림이 있었으나 베르드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사람의 곁을 얻어내려 애쓰는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남을 부러 해할 리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무리해서 이 자리에 왔는지.’
호기심을 느낀 베르드는 발소리를 죽여 그들이 등지고 있던 기둥에 살며시 기댔다. 존재감 없는 황제라는 게 이럴 때는 편했다.
“어떻게 해서든 공작 전하께서 후원금을 철회하시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그날 산에서 뱉었던 말은 모두 그 요상한 마법인지 주술인지 하는 것 때문이라고 합시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 멋대로 나왔다고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켈트만 경제가 몇 달 만에 무너지는 걸 보니 오금이 저려 잠을 못 자겠습니다.”
“괴물 공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헙.”
마지막 영랑이 입을 틀어막았고, 나머지 셋이 그를 매섭게 째려봤다.
“지난 며칠 동안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게 아니거든 괴물이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내지도 마십시오.”
“기껏 목이 터져라 공작 전하는 괴물이 아니라 두둔했는데 이제 와서 무용지물로 만들지 말란 말입니다.”
베르드는 그들의 대화만 듣고도 켈트만의 수렵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뭔가에 홀려 차이엘드 공작의 앞에서 진심을 드러낸 건가.’
때마침 목청 좋은 사내가 차이엘드 공작과 다이앤 백작 영애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그쪽으로 쏠렸다.
“우와……”
“과연 오늘의 주인공이네요.”
아멜이 걸을 때마다 뭇 사내들의 가슴이 쿵쿵 요동쳤다. 평소엔 갓 피어난 한 송이 장미꽃 같던 그녀가 오늘은 한 다발의 백합만큼이나 고아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백합 훈장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드레스와 백금 장신구들이 걸음마다 가볍게 움직이는 모습은 꼭 나비의 날갯짓을 연상시켰다.
“아름답네요.”
“아름답기만 한가. 황실 백합 훈장은 작위와 함께 수여되니 이제 다이앤 영애는 모든 걸 가진 여성이 되겠군.”
“다이앤 백작 부부가 딸을 훌륭하게 키웠네요.”
하지만 사내들은 그녀를 탐하긴커녕 정면으로 마주 볼 수조차 없었다. 그녀의 한 손을 꼭 맞잡은 것이 대 차이엘드 공작이기 때문이었다.
괴물 공작은 해바라기가 태양을 바라보는 것처럼 한없이 깨끗한 웃음을 지었다. 그 해사한 표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영랑들에게는 좋은 조짐으로 보였다.
“카일. 영애들과 잠시 인사를 나누고 와도 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마침 눈에 거슬리던 약혼녀도 자리를 비웠다. 영랑들은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차이엘드 공작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카일은 그들의 이름이나 작위보다도 그들이 일전에 입 밖으로 쏟아냈던 진심을 먼저 떠올렸다.
“차이엘드,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당신은 사람도 아니야.”
“돈 때문에 따라왔건만……”
“아버지와 형들을 죽인 괴물.”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카일의 얼굴은 조금도 뒤틀리지 않았다. 표정을 숨기는 일쯤이야 그에겐 쉬웠다.
“며칠 전에 깨어났다고 들었는데, 몸이 성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 카일을 그중 하나가 어렵사리 멈춰 세웠다.
“전하. 긴히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뭡니까.”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주변의 인파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카일은 성가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협박이라도 하려는 걸까. 적당한 보수를 주지 않으면 지디마가 선동했던 것처럼 정신을 잃었던 건 다 괴물 공작 때문이었다고 떠들지도 모른다. 물증이 없으니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도 분명 있을 터.
이들에게 방어의 아레테를 입혀주면서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예상했던 카일이었지만 실제로 겪으니 더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대화는 그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작 전하께서 저희를 살펴주신 것을 압니다. 그땐 괴상한 마법에 걸려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왔지만……”
“백주의 선동 탓에 사람들은 전하를 의심하나 저희를 구한 건 분명 전하의 아레테였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는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무튼, 전하를 괴물로 몰아가는 헛소문은 이제 걱정 마십시오.”
카일은 자신을 따스하게 두둔해주는 영랑들의 태도에 적잖이 놀랐다. 그들은 저를 괴물이라며 경계하는 대신 괴물이 아니라며 토닥이고 있었다.
“제게 하려는 말은 그게 다입니까?”
“……예?”
카일은 다소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영랑들을 차가운 눈으로 살폈다. 그들의 가문과 가업이 머릿속에 정리되었다.
기생충이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기생의 기술을 능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기생하는 것들은 더 쉽게, 더 안전하게 기생할 수 있도록 진화한다.
앞발을 든 짐승, 포식자 차이엘드는 생각지도 못할 기술들.
그런 점에서 눈앞의 영랑들은 제법 영리했다. 제게 괴물이 아니라고 말해주면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1년 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카일은 어깨를 두드려주는 척 거리를 좁히곤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목숨값을 치르시려거든 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마십시오. 제게 기생하는 건 속마음을 들키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입니다.”
“전, 전하……”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은 언젠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차이엘드는 문제가 될 만한 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우자 갓 성인이 된 영랑들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괴물 공작이 친절한 건 품 안의 약혼녀 한정이었다. 지킬 것이 생긴 짐승은 타인들에겐 한층 흉폭해졌을 뿐이었다.
“하, 하지만 저희가 있으면 전하의 소문들은……”
소문이라. 카일은 픽 웃었다. 괴물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는데 남들의 평가에 휘둘릴 틈이 어디 있을까.
이젠 단 한 명뿐이었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도, 자신을 이전처럼 무력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제 인내력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실어 말한 그는 약혼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