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가문을 다시 세우다니…… 영애는 정말 대단해요.”
“다이앤 영애, 지금 기분이 어떠세요?”
친한 영애들과 인사를 나누던 나는 나디아 공주님의 질문에 멈칫했다. 기분이라. 긴장돼 죽을 것 같았다.
“실수하면 어떡하죠? 모두 저만 보고 있을 텐데.”
“폐하께선 영애에게 작위와 명예를 내려주려는 것이지 잡아먹으려는 게 아니니 걱정 마세요.”
내가 그걸 몰라서 긴장하나. 울상을 하자 레이나 영애가 검지를 휘휘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실수하면 뭐 어쩔 건데, 하는 태도로 일관하세요. 다이앤 영애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잖아요.”
나를 보던 레이나 영애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시선 끝에서 예장을 한 내 비장의 카드가 산뜻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인사는 충분히 나누셨습니까?”
카일은 모피를 끌어 올려 드러난 내 어깨를 열심히 가렸다. 그런다고 가려지는 디자인이 아닌데도 말이다.
게다가 영랑들과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몹시 흡족한 얼굴을 하고 내 지인들에게도 인사했다.
나는 잠깐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일이 기분 좋아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 공작 전하께선 어떤 대화를 나누다 오셨길래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실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하십니까?”
카일의 눈가가 애교스레 접혔다. 나는 지르르 울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카일이 이렇게 예쁘게 웃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가 중요하겠어요? 완벽한 예장까지 갖췄으니 제 뒷담화를 했다고 해도 그저 감사합니다, 할 수 있어요. 말할 때마다 목울대 움직이는 게 얼마나 섹시한지 몰라요.”
“…….”
“물론 카일이 다른 사람과 제 뒷담화를 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껏해야 믿는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결혼하고 싶다거나 하는 말을 했겠죠.”
“그걸 아신다면 더 애태우지 말고 원하시는 날짜를 골라 주셨으면 좋겠는데.”
「웨딩드레스 같은 옷 입고 애태우지 말고.」
「식을 올리고 싶은 계절이나 장소만 슬쩍 흘려줘도 괜찮을 텐데.」
「……그냥 지금 으슥한 데로 데려갈까.」
“아, 수여식 시작한다. 저 훈장 받고 올게요!”
나는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지금 바른 립스틱만큼은 사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웅장한 트럼펫 소리가 황제의 등장을 알렸다. 홀을 가득 메운 각국의 귀빈들과 하일의 귀족들이 무릎과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하일 제국 황실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훈장이니만큼 황실에서도 격식을 갖추었다.
황제의 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베르드는 폭신한 쿠션 위에 놓여 있는 훈장을 집어 들고 엄숙한 목소리를 냈다.
“아멜리아 다이앤. 그대는 켈트만과의 우호를 재확인하는 사신단에 자원하여 하일의 국격을 드높였고, 다소 소원해진 양국의 관계를 재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양국의 관계 재건’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켈트만의 왈가닥 리엔 공주가 황제와 부부의 연을 맺기로 결심한 게 다이앤 영애의 공로라고 했지.’
‘저번 올려차기 사건의 보답일까?’
‘어쨌든 대단한 영애야. 리엔 공주를 포함한 46명의 켈트만인과 홀로 맞서 승리하다니…….’
‘46대 1이라면 리엔 공주가 꼬리를 내릴 만도 해. 역시 페르슈 다이앤의 딸이군.’
소문들이 으레 그렇듯 귀족들 사이에 퍼진 소문들도 사실보다 조금 더 과장되어 있었다.
무용담은 그녀를 한층 더 아름답게 했고, 황제가 그녀에게 훈장을 내리는 순간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터지도록 했다.
“다이앤 영애. 황실은 그대에게 백작의 작위와 그에 걸맞는 봉토, 상금과 연금을 내려 감사를 표하는 바이네.”
멀리서 딸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이앤 백작 부부는 손을 꼭 맞잡은 채 서로의 몸에 기댔다.
“여보. 우리 아멜이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요?”
“그러게 말이오. 당신이 차 한잔하고 가라고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머, 이이도 참…….”
연대보증으로 인한 파산 이후, 약 15년 만에 황실의 홀에 다시 방문하게 된 백작 부부였다. 그 계기가 딸의 훈장 수여식이라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감동으로 뜨거워졌다.
“감사합니다, 폐하.”
부러움과 시기, 감동과 존경이 뒤섞인 시선들 속에서 아멜이 환하게 웃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어서일까. 그녀의 모습은 꼭 결혼식을 앞둔 신부를 연상시켰다.
카일은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도 취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이앤 백작의 눈치가 보였다.
잠시 고민한 카일은 베르드를 슬쩍 흘겨봤다. 황제는 공작의 명을 곧바로 알아듣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면서도 입을 뗐다.
“차이엘드 공작. 황제의 이름으로 약혼녀의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허락하지. 그녀에게 입 맞춰도 좋네.”
“…….”
평소 황제의 명이라면 귓등으로 듣던 카일은 쪼르르 다가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멜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황제 폐하의 명이니 이번엔 도망가지 마십시오.”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 카일이 조심히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사방에서 폭죽이 터지고 꽃잎이 휘날렸다.
***
훈장 수여식이 끝나고, 결혼식 피로연을 연상시키는 연회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이목은 자연스레 오늘의 두 번째 주인공들에게 쏠렸다.
“다이앤 백작 부부 좀 봐요. 엄청 뿌듯하신가 봐요.”
“파산했다고 들었을 땐 황궁에서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딸을 잘 둔 덕에 백작 부부의 얼굴이 훤하네요.”
“둘이 결혼한다고 했을 땐 사교계가 뒤집어졌었죠?”
다이앤 백작 부부와 나이대가 비슷한 귀족들은 추억을 곱씹으며 우리 쪽으로 눈인사를 건넸다.
아버지는 최연소 총기사단장을 지냈던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 허리에 검을 차고 제복을 입어 풍채를 드러냈다.
어머니는 한때 사교계의 꽃이라 불리던 사실을 증명하듯 여전한 미모를 뽐내며 여유를 잃지 않았다.
나는 두 분 사이에 자리를 잡고 예쁨을 독차지하……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이 이상 붙잡는 건 어려울 듯했다.
“다이앤 백작 부인. 이런 자리에서는 참으로 오랜만이네요.”
“부르크 백작 부인……!”
“다이앤 경도! 두 분, 어서 일어나십시오. 회포를 풀러 가셔야지요!”
“허허, 이것 참……”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옛 친구들은 두 분의 사교계 복귀를 거하게 축하해줄 생각에 들떠 있었다.
15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기쁨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생활비에 허덕이는 모습이 아니라 사교 모임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잘됐다. 앞으로도 황궁에 자유롭게 출입하실 수 있겠지.’
내가 다이앤의 이름으로 받은 봉토는 두 분께 관리를 맡길 생각이었다. 이젠 예전처럼 살림과 계산에 둔하지 않으시니 잘 경영하시리라.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가슴팍의 훈장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 작은 장식품을 받기 위해 켈트만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이제 악역들만 피해 가면 돼. 해피엔딩까지 거의 다 왔어.’
바네사와 카일의 말대로라면 이타르는 켈트만의 사신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접점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라바스는 트라이하로 돌아갔다니 두 악역이 힘을 합쳐 함께 움직일 확률이 무척 높아졌다.
‘머리가 아프다, 아파.’
나는 커튼을 젖히고 테라스에 나가 난간에 기댔다. 사람들의 체온으로 후끈해진 실내의 공기 대신 비교적 쌀쌀한 밤바람이 상기된 얼굴을 식혔다.
“마님. 바람 쐬실 거예요?”
“미안해요, 바네사. 혼자 나와 있으면 경호하기 힘들죠?”
“괜찮아요.”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려는데 곧바로 싸한 기분이 들었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설명이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정원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할머니잖아? 아깐 분명 없었는데…….’
꽃도 아닌 그저 푸른 관목 속에 선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또렷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네사의 미간이 일순간 좁혀졌다.
“……마라바스.”
“네? 하지만 저분은 그냥 할머니인 것 같은데…….”
“마님. 안으로 들어가서 차이엘드 공작 옆에 꼭 붙어 계세요.”
바네사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나를 응시하고 있던 수상한 할머니도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뿌렸다.
가루 같은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우리 쪽으로 날려왔다. 가까워질수록 그것들은 점점 커졌다. 원근법 때문이 아니라 이건……
“마, 마수?”
“연금술로 만든 놈들인 것 같아요. 저희가 처리할 테니 마님은 들어가세요.”
“……저희?”
바네사가 턱짓하자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모르고 있던 차이엘드의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낯이 뜨거울 정도의 과잉 경호였다.
마수를 소환한 쪽도 지붕과 해자, 벽 뒤에서 우르르 튀어나오는 차이엘드의 경호 인력을 보며 당황한 눈치였다.
‘……카일은 대체 경호원들을 얼마나 붙인 거야?’
민망해서 얼른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 광경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영원한 안줏거리가 되리라.
게다가 소란스러워지면 소란스러워질수록 이타르가 나를 발견할 확률은 높아졌다. 그와의 접점을 피하려면 최대한 조용히 넘어가는 게 상책.
나는 화끈거리는 뺨을 식히며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때, 마수들이 연금술 마법진을 타고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누나 님!”
“괜찮으니까 제발 소리 지르지 마세요……!”
홀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카일도 재빨리 내 곁에 와 검을 뽑았다.
“카, 카일.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는 게 좋겠어요.”
“싫습니다. 누나를 대놓고 노리는 놈을 어떻게 조용히 상대합니까.”
“황제 폐하보다도 제 호위가 많은 건 아무래도…… 으악!”
하지만 내 속사포 부탁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디선가 엄청난 검기가 날아오더니 눈앞의 마수들을 일순간 가루로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쿠과광―!
한둘이 아닌 마수들을 정확히 타격하고도 검기는 주변을 탐색하듯 내 곁을 맴돌았다. 왜일까. 검기에서 알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은데.
“내 딸 건드리는 놈은 내가 직접 주님께 보낸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일격은 전설의 전직 총기사단장 페르슈 다이앤이 날린 것이었다.
“마님, 이쪽으로 오세요.”
“누나, 조금만 쉬고 계십시오.”
“우리 딸, 이 아빠만 믿어라.”
이미 마수들 다 죽었는데 왜 이렇게 과잉보호하세요. 망연자실해진 나는 양손에 화끈거리는 얼굴을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