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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85화 (85/134)

#85

홀 안의 사람들은 자연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쟁이라도 난 것인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많은 경호원들이 아멜리아 다이앤을 감싸고 있었다.

곧 그리로 차이엘드 공작도 달려가더니, 다이앤 백작은 아예 무시무시한 검기를 휘둘러 적들을 일순간에 섬멸했다.

“뭐지? 적국이 공습이라도 해온 건가?”

“폭탄 테러라도 났어?”

“규모를 보니 쿠데타가 일어난 것 같은데……”

테라스에서 그 웅성거림을 듣고 있던 아멜은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홀 안으로 들어왔다.

세 명의 과잉보호를 받는 것보다 바네사 하나의 과잉보호를 받는 게 나으리라. 고개를 푹 숙이고 걷던 그녀의 시야에 누군가의 구두가 나타났다.

아멜의 머릿속 파멸 레이더가 상황이 좋지 못함을 알렸다. 그녀는 께름칙한 기분에 휩싸여 고개를 들었다.

“헉……!”

“영애를 놀라게 할 마음은 아니었는데. 미안하군.”

그녀가 피하고 싶어 그렇게 안달을 내던 남자가 유감을 표하고 있었다. 제 존재 자체에 그녀에게 위협을 느끼는 줄도 모르고.

이타르 드 트라이하. 트라이하의 3황자. 작중 카일과 함께 파멸의 쌍두마차를 이끄는 그가 아멜의 앞에 있었다.

‘아, 제발 좀!’

그의 푸른 눈동자는 아멜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켈트만에서와 달리 신분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지라 휑 가버릴 수도 없었다.

바네사 또한 타국의 황족인 그가 아멜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강제하기 어려웠다.

단 한 사람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트라이하의 3황자께서 제 약혼녀의 명예를 빛내러 와주신 줄은 몰랐습니다.”

카일은 아멜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온화한 말씨와 달리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몹시 거칠었다.

그 모습이 제 영역을 탐내지 말라고 으름을 놓는 맹수처럼 느껴져 이타르는 가벼운 웃음을 지어 보이고야 말았다.

“차이엘드 공작, 오랜만이군. 부황께서 자네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말라 하셨네. 차이엘드의 기술력이 동원된 범선이 아니었다면 제국으로 은을 실어 나르지 못했을 테지.”

“이번 식민지 건은 트라이하의 항해술이 빛을 발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형식적인 미소만 지어 보이던 이타르는 아멜을 눈에 담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아름다웠다.

괴물 공작이 왜 감싸고 도는지, 그리고 피도 눈물도 없던 차이엘드의 짐승이 왜 사람이 되었는지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자네 약혼녀를 내게 소개해주겠나?”

“……아멜리아 다이앤. 방금 전 황제 폐하께 작위를 받아 이젠 다이앤 백작 영애가 아니라 다이앤 백작입니다.”

“다이앤 백작. 차이엘드의 피앙세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타르는 아멜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인 아멜은 가볍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이타르는 악수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아멜의 손을 가볍게 쥐고 손등에 입술을 댔다.

부드러운 손이 움찔 떨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차이엘드의 피앙세는 당황으로 점철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나 뵈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이앤 백작.”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아멜은 겨우 대답을 짜냈다. 아무런 경계심 없이 돌아서던 이타르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당신은 제 누이동생과 닮았습니다.”

“……!”

아멜은 놀란 얼굴로 이타르의 퇴장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타르의 여동생 이아나가 어떻게 죽었는지 원작을 읽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 때문에 이타르가 파멸에 미친놈이 되었다는 것도.

‘미치겠네. 방금 그건 누가 들어도 사망 플래그였잖아?’

아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카일에게 기댔다. 카일은 그녀를 부축하다 무언가를 눈치채곤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팔찌 색이 아까와는 달라졌습니다.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겁니까?”

***

차이엘드 공작이 있는 연회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베르드는 처소에서 짧은 낮잠을 즐기다 벌떡 일어났다.

차이엘드가 반정(反正)을 일으킨다고 해도 믿을 만큼 많은 경호원들을 움직였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차이엘드 공작은 뭐라고 하던가?”

“약혼녀의 경호를 위한 것이라 했습니다. 다이앤 경도 마찬가지로 딸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답했습니다.”

“아니, 다이앤 경까지 움직였다고? 다이앤 영애가 피살이라도 당한 건가?”

“누군가가 그녀를 노리고 마수를 소환했다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파악하는 대로 보고하겠습니다.”

베르드는 일단 현장에 가 보기로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요란을 떠는지 직접 보고 싶었다.

물론 후속 조치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 차이엘드 공작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 더 컸다.

그가 원래도 빠르던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낮잠을 위해 예장을 무르고 편한 옷을 입은 터라 걸음이 빨랐다.

“조사관들은 보내 두었겠지? 나디아는 언제 불렀는데 왜 안 오나? 얼른 사태를 파악해 보고…… 윽!”

다급한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던 황제는 누군가와 쿵 부딪쳐 바닥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들이박은 건 자신이건만 눈앞의 여성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베르드는 자존심이 상해 휙 그녀의 얼굴을 올려보았다가 입을 작게 벌렸다.

“아…….”

차분하고 긴 회갈색 머리카락이 새벽의 커튼처럼 찰랑거렸다. 회색 눈동자는 하울링을 하는 늑대의 것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마주하는 상대를 죄다 잡아먹을 것 같은 미녀. 그러나 사내들은 앞다투어 그녀의 먹잇감이 되고자 하리라. 베르드는 급히 체통을 지키며 목을 가다듬었다.

“큼, 큼…… 그대는 어느 가문의 영애인가?”

“영애라니.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또렷한 목소리가 베르드의 귓바퀴를 끈덕지게 훑었다. 그는 미녀에게 홀려 반쯤 정신을 놓고 입만 뻐끔거렸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왜,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거지?”

“페르슈 다이앤 경이 검을 뽑았다는 이야기가 들려 직접 보려 합니다. 저는 그분의 검술을 제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 그러게. 다음에 차 한잔……”

미녀는 차 한 잔은커녕 한 모금도 함께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듯 휑하니 사라졌다.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지점을 응시하던 베르드에게 나디아가 뛰어와 물었다.

“폐하. 제겐 얼른 현장으로 오라고 심부름꾼까지 보내셨으면서 폐하께선 정혼자와 노닥거리시는 겁니까?”

“정혼자?”

“예. 방금까지 리엔 공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방, 방금 그 미녀가 리엔 공주인가?”

“설마 초상화도 찾아보지 않으신 겁니까? 아무리 차이엘드 공작이 강제로 정해준 혼처라 해도……”

나디아는 말을 하다 말고 오라버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술을 거하게 드신 것일까?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토마토처럼 새빨갰다.

“강제로 정한 게 아니야. 공작은 내 의견과 취향을 반영해 주었어. 그렇게 안 봤는데 꽤나 섬세하군.”

베르드는 차이엘드 공작에게도 백합 훈장을 주고 싶었다.

***

한편, 카일을 딸에게 보낸 페르슈 다이앤은 총기사단장일 적 수하였던 하일드 웨일과 함께 의문의 노인을 추격하고 있었다.

“다이앤 경. 여자가 사라진 방향이 이쪽 맞습니까?”

“하일드. 나를 못 믿나? 몇 년 만의 실전이긴 하지만 감을 잃진 않았네. 일전엔 내 딸의 방에 몰래 숨어들어온 사내의 기운까지 감지해냈지.”

“그런 파렴치한이…… 그게 누구였습니까?”

차마 ‘자네가 모시는 주인이었네’하고 말할 수는 없어서 다이앤 백작은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이쪽으로 사라진 건 맞네. 갈색 머리카락이었고 나이는 60대 초반 정도로 보였어. 그런데 왜인지 낯이 익단 말이지……”

“60대 초반 여성이라면 다이앤 경을 따라다니던 귀족 여성 중 한 명일 수도 있겠군요.”

페르슈 다이앤은 왕년에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검술 대련이 있는 날에는 그의 팬클럽을 자처하는 영애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정도.

하지만 다이앤 백작은 하일드의 진지한 추리를 그저 웃어넘겼다.

“마수를 소환하는 걸 보니 트라이하의 연금술사를 고용했거나 연금술사일 확률이 높지만, 왜인지 범인은 우리 국민이라는 생각이 드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이란 말이지.”

“경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일단 긴장은 놓지 말고. 아레테 보유자일 수도 있으니 자네도 조심하게.”

“그나저나 아는 얼굴이라니. 다이앤 경의 옛 지인인 건 아닙니까?”

“허허, 이 사람이……”

파티를 즐길 시간이 있으면 검술을 연마하자고 생각하던 페르슈 다이앤은 넓은 사람들을 두루 사귀는 타입이 아니었다.

소수의 신뢰하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사냥을 다니다 연대보증 사기…… 까지 당한 그였지만 어쨌든 지위에 비해 지인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지인이 많지 않다는 건 건 자네도 잘 알잖나.”

“하긴. 결혼하신 후엔 모든 자리에 아내와 함께 참석하셨지요.”

“그랬지. 자네 부부와 왈츠를 추던 게 사교댄스의 전부였으니. 그러고 보니 자네 부인이 떠난 지……”

날렵하던 다이앤 백작의 걸음걸이가 태엽이 다 풀린 인형처럼 서서히 느려졌다. 그의 뒷골엔 섬찟 소름이 돋았다.

“다이앤 경,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노인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가 하일의 국민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저 근거 없는 착각이다 생각했건만. 다이앤 백작은 지금 자신이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지 깨달았다.

“하일드, 자네…… 혹시 내 딸에게 마수를 풀었던 노파의 얼굴을 봤나?”

“공작 전하의 명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참이었습니다. 경께서 불러서 다시 연회가 진행되던 홀로 돌아왔지요.”

“얼굴을 못 본 건가? 아예?”

“예. 마법진을 이용해 곧바로 현장에서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이앤 백작은 추격의 걸음을 서서히 멈추었다. 이대로 그녀를 찾아내 붙잡는다고 한들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으리라.

아니, 하일드 웨일이 보는 앞에서 그녀를 붙잡는다면 더 큰일이 날지도 몰랐다.

‘혼자만 시간을 초월하기라도 한 건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노파는 분명 60대였으나 다이앤 백작은 홀로 늙어버린 그녀가 누구인지 그제야 떠올렸다.

코델리아 웨일.

그녀는 오래전 홀연히 사라진 하일드 집사장의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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