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다시 파티가 벌어지던 홀. 카일은 아멜의 팔찌를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분명 팔찌에 세팅된 보석의 색이 바뀌어 있었다.
켈트만에서도 색이 한 번 바뀐 것을 보았지만 그땐 마라바스의 아레테에 당했던 터라 정신이 없어 묻지 못했다.
‘다이앤 백작저에서 처음 팔찌를 받았을 때도 색깔이 변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이앤 백작 부부가 고행을 떠나는 딸에게 선물했던 팔찌에는 무언가 특수한 기능이 있는 듯싶었다.
트라이하에서 만든 팔찌라고 했으니 연금술을 이용한 주술이 걸려 있을 터. 어쩌면 뜬금없이 나타나 마수를 소환하고 사라진 노파를 잡는 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특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보석의 색깔이 바뀌는 구조인 것 같은데.’
차이엘드의 명석한 두뇌는 빠르게 회전했다. 카일은 아멜을 황궁 홀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 쉬도록 하곤 질문을 건넸다.
“이 팔찌에 박힌 보석은 위험 상황을 감지하면 색깔이 바뀌는 겁니까?”
“음…….”
아멜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위험 상황을 감지하면 색깔이 바뀌냐고? 반만 맞는 말이었다. 누군가가 저에게 음심을 품는 것도 위험 상황이라면 위험 상황이니.
하지만 제게 음심을 품어 팔찌의 색깔을 바꾼 주체가 누구인지 아는 아멜은 모르는 척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아나와 닮았어.」
「당신이 탐나지만 오늘은 이쯤하고 물러나지.」
이타르가 제 손등에 입 맞출 당시 아멜은 그의 속마음을 들었다. 어찌나 아련한 목소리로 ‘당신’이라는 호칭을 쓰던지.
현실을 부정하며 정신을 더 집중하자 아예 이아나와 자신의 얼굴이 서서히 겹쳐지는 장면이 보였다.
‘내가 어쩌다 파멸 필수템이 된 거야?’
아무래도 모종의 이유로 저를 마음에 품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팔찌의 기능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카일은 이타르가 나한테 음심을 품었다는 걸 아는 순간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파멸을 불러들이겠지.’
언젠가 이타르의 속마음을 엿들었다, 하고 밝히긴 해야겠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그랬다간 카일이 이타르를 찾아내 바로 결투를 신청하리라.
아멜은 여우처럼 굴어 파멸과 파멸 사이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그녀가 눈을 마주한 채 울먹이는 얼굴을 하자 카일의 가슴은 철렁 곤두박질쳤다.
“카일…… 얼른 공작저로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세요, 응?”
“이미 마차를 불러두었으니 곧 올 겁니다. 다이앤 백작이 돌아오는 대로 작별 인사를 하고 공작저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공작저로, 그것도 함께 돌아가자고 하나 카일은 예상대로 온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올 동안의 짧은 틈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아멜을 홀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장소로 이끌었다.
“곧 사람이 올 테니 안전한 곳에 가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쪽으로.”
카일이 아멜을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황제, 베르드의 옆자리였다. 바네사를 포함한 차이엘드의 경호 인력들이 그녀의 주변에 구름처럼 도열해 은근한 살기를 드러냈다.
황제의 곁에 서 슬슬 눈치를 보던 황실 근위병들도 노선을 결정한 것인지 살그미 아멜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멜은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워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왜일까. 평소라면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둘렀을 베르드까지 오늘은 과잉보호에 가담했다.
“아멜리아 다이앤은 오늘의 주인공이니 확실히 보호하는 것이 좋겠군. 황궁에서 일어난 일이니 황제가 책임지는 것이 옳지.”
“아, 예…….”
아멜은 잠시 후 베르드의 이상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있었다. 우아한 자태로 걸어 제게 다가온 리엔 공주에게 그의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이앤 영애, 괜찮아요? 습격을 당했다고 들어서 바로 달려왔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줄 몰랐어요.”
“차이엘드 공작 전하께서 자리를 마련해주셨더라고요. 그나저나…… 다이앤 경은 어디에 계시나요? 아까 엑스칼리버의 검기를 사용하셨다고 들었는데.”
“아……”
아멜은 힐긋 베르드를 바라봤다. 언제 어떤 사건을 계기로 리엔에게 빠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어쩐지 짝사랑 상대가 다른 남자를 생각하는 걸 보고 절망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엔 공주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 우리 아버지구나.’
페르슈 다이앤의 검술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아멜은 리엔과 소소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안정감을 되찾았다.
아무리 예상했다고 한들 급습은 급습. 가까운 곳에서 마수를 본 것은 처음이라 손이 달달 떨리던 것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조금씩 진정되었다.
“아, 저기 오시네요!”
잠시 후, 차이엘드의 경호원들과 하일드를 이끌고 노파를 추격하던 다이앤 백작이 돌아왔다.
“아버지!”
“미안하구나, 아멜. 연금술을 사용한 건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황궁의 기사들과 차이엘드의 사람들이 주변을 한 차례 더 수색하고 있단다.”
“일단 이 자리에서 사라졌다니 차라리 다행이에요. 연회에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래…… 아, 하일드 집사장에게는 네가 타고 갈 마차를 불러 두라고 했다. 아멜, 너를 위한 자리지만 이만 돌아가 보는 게 좋겠구나.”
“그렇게 할게요.”
카일은 아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다이앤 백작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평소대로라면 빈말로라도 다이앤 백작저에서 자고 가라는 말을 했을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몸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그것이…… 공작 전하. 잠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카일은 그가 이끄는 대로 구석진 발코니에 걸음 했다. 다이앤 백작은 조심스레 입을 달싹이다 투명하고 얇은 막으로 된 작은 구슬 같은 것들을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공작 전하. 이것을 받으시지요. 아까의 전투 때 검기로 가둬두었던 마수입니다.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검기로?”
“예. 검기를 얇은 막의 형태로 빚어 그 안에 마수를 가두었습니다. 연금술 마법진을 타고 나타난 마수이니 조사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태연한 감사 인사였지만 카일은 조금 놀랐다. 대체 검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다뤄야 마수가 상하지 않게 검기에 가두는 경지에 이르는 것인가.
다이앤 백작이 건넨 구형의 검기 안에는 푸릇푸릇한 곰팡이 같은 것이 끊임없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마치 꺼내달라는 듯한 동작이라 께름칙한 기분마저 들었다.
“인력을 총동원해 노파를 잡아들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작 전하. 혹 노파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수하들 중 몇몇도 얼굴을 보았으니 그 여자를 잡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혹 코델리아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처음 듣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 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이앤 백작은 안도한다기보다는 되려 걱정하는 눈치였다. 카일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지인?’
아니, 알고 지내던 지인이 딸을 해친 것이라면 화를 내거나 황당해하는 것이 보통이지 이렇게 굳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을 알고 있다니 모르는 사이는 아닐 터.
“공작 전하. 조사 과정에서 그 여인이 다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다이앤 백작은 잠시 망설였다. 하일드의 개인사이니 알리지 않는 것이 맞을까.
아니, 그가 지금 따르기로 한 주인은 차이엘드 공작이었다. 또한 코델리아가 조사 과정에서 다치거나 죽기라도 한다면 하일드는 크게 상심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괜히 배려한답시고 사실을 숨겼다간 나중에 더 답답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페르슈 다이앤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 여인은 하일드의 부인인 코델리아 웨일을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 사라졌다던?”
“그 일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레이디 클레어가 흘리는 말을 들은 적은 있으나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허면 레이디 클레어께서 귀국하시는 대로 대화를 나눠보는 게 좋겠습니다. 부디 제게 전갈을 주시길.”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사장에게 이 대화는 비밀로 할 테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다이앤 백작은 잠시간 말없이 난간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차이엘드 공작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는 대부분 환상에 불과하다는 건 진작 깨달았다. 오히려 웬만큼 평판이 좋은 귀족들보다도 더 제 사람들을 아끼는 남자였다.
“……공작 전하.”
“편히 말씀하십시오.”
“혹 결혼을 늦추시는 이유가 이 꼬장꼬장한 늙은이 때문이라면 더 이상 그러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장인의 말을 곱씹던 카일은 곧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소녀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붉혔다.
지난번 모임 때 집무실 서랍에 넘치던 욕망을 들켜 엉큼한 사위에게 딸을 내주지 않는다고 말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다이앤 백작은 분명 신뢰를 드러내고 있었다. 카일은 그의 믿음에 자신이 어긋나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먼저 적극적으로 아멜의 안전을 살피고 코델리아를 생포하겠다는 뜻을 드러내면 다이앤 백작이 더욱 안심하리라. 마침 적당한 화젯거리도 있었다.
“일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제 약혼녀가 낀 팔찌에는 무슨 기능이 있는 겁니까? 사용된 연금술 주술에 따라 현 상황에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크흠, 그것이……”
공작이 민망할 것을 생각해 여태껏 어물쩍 넘어갔건만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한 다이앤 백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넘어갔다.
“아멜이 낀 팔찌는 누군가가 착용자에게 음심을 품으면 색깔이 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
카일은 순항하다 갑자기 폭풍우를 발견한 선원처럼 표정을 굳혔다. 처음 팔찌를 건네받을 때 분위기가 싸해졌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음심? 물론 품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자제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팔찌에 그런 기능이 있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백합 훈장 수여식에 어울리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게 꼭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 같아서…….”
“……?”
“하지만 맹세코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선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기, 공작 전하……”
“알고 계신 것 같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맹세코 드러나는 곳에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어깨에 두른 모피로 가렸으니 아무도 못 봤을 겁니다.”
“……?”
왜 당연히 자신의 음심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다이앤 백작은 차이엘드 공작의 변명이 끝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