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아멜의 황실 백합 훈장 수여식이 파할 무렵, 클레어는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트라이하의 수도에 있는 차이엘드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클레어는 우아한 동작으로 이마를 짚었다. 트라이하의 차이엘드 사업을 살펴보느라 조금 무리했다. 이동의 아레테를 내내 써대 두통도 상당하다.
“클레어 님. 잠시 쉬었다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필요 없어. 내일 일정이나 알려줬으면 하는데.”
브루노는 등골이 서늘했다. 누나 님과 있을 때의 모습에 익숙해진 탓에 레이디 클레어의 성정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의 낭비나 실수도 허락지 않는 맹수 중의 맹수였다. 아들이었다면 가장 차이엘드다운 차이엘드로 홀로 군림했으리라.
레이디 클레어. 여인에겐 허락되지 않은 차이엘드의 생존자 자리를 거머쥔 차이엘드의 또 다른 주인.
차이엘드에서 오래 일하고픈 소망이 있는 브루노는 고양이처럼 꼬리를 내리깔곤 얌전히 그녀의 명을 따르기로 했다.
“내일은 특별한 일정이 없습니다만, 차이엘드 저택에 레오시스 2세께서 심부름꾼을 보내셨다고 보고받았으니 오늘 중으로 답신을 하셔야 할 듯합니다.”
“트라이하의 황제가 내게?”
“예. 시간이 괜찮으실 때 저녁 만찬을 함께 하고 싶으시다는 게 골자였습니다. 하루쯤 일정을 비울 수 있을 듯합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클레어는 꼬고 있던 다리를 반대쪽으로 바꿔 꼬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의 만찬은 어느 정도 예상하던 일이긴 했다.
트라이하는 지금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은을 퍼오고 있었다. 이 제국의 황실은 어느 때보다 부유했고, 앞으로 더 부유해질 예정이었다.
수 세기 동안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쌓아온 차이엘드의 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이긴 했으나 거금은 거금.
“재력이 달라졌으니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으신 거겠지. 일정 마지막 날 저녁에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황실 측에 알려. 너무 서두르는 느낌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알겠습니다.”
“내가 알아야 할 다른 일도 있나?”
“중앙 경매 매물에 대한 자료는 집무실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클레어는 입꼬리를 슬쩍 들었다 놓는 것으로 칭찬을 대신하곤 눈을 감았다. 경매에 돈을 쏟아부을 생각을 하니 두통이 조금 나아졌다.
날씨가 얼어 죽지 않을 정도로 온후하고 가로수에서도 탐스러운 열매가 그득 열리는 곳이라 그런지 트라이하는 유독 예술가들이나 사상가들이 많았다.
‘그 사상가들 때문에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지만.’
때문에 값을 매기기 애매한 그림이나 도자기, 조각품 따위를 거래하는 일이 잦았고, 그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 차원의 경매 제도가 발달했다.
브로커들은 수수료를 챙기곤 경매에 내놓는 물건들을 홍보하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곤 했는데, 그것들을 모으면 경매의 주요 품목을 대충 훑어볼 수 있었다.
“내가 찾으라는 물건은 매물이 있나? 경쟁자는 얼마나 붙었지?”
“말씀하신 ‘영원의 백합’이라는 브로치는 가격대가 높게 형성되어 있긴 하지만 낙찰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듯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브로치는 꼭 낙찰받도록. 아멜에게 기념품으로 줄 거야.”
“……예.”
방금까지만 해도 오금이 저리던 눈빛이 갑자기 순진해지니 브루노는 잘 걷고 있던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타국에 있는 지금에서야 누나 님의 위용이 실감 났다.
브루노는 주인의 기분을 한층 풀어주기 위해 말을 붙여 보았다.
“같이 구매하시는 ‘섬광의 뿌리’도 누나 님을 위한 기념품인가요? 이쪽이 훨씬 고가이니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러자 클레어의 표정이 뒤틀렸다. 그 얘기는 하기도 싫으니 닥치라는 얼굴. 브루노는 입을 벙어리처럼 다물었다.
“그건 아멜의 경호를 위한 물건이라고 해두지. 반드시 낙찰받도록.”
클레어는 얼굴을 확 구겼다. 기껏 진정된 머릿속에 값비싼 목걸이를 차고 침을 질질 흘리는 바네사 메이브란테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
황실 백합 훈장을 받은 후로 처음 맞는 아침. 아멜은 건물주가 된 첫 아침을 상쾌하게 맞으리라는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아……”
몸 곳곳이 당기고 허리가 뻐근했다. 어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잠시 잊고 건물주가 된 기쁨에 젖은 것이 문제였다.
아직 가보진 못했지만 차이엘드 공작령 바로 옆에 붙어 있다던 제 영지만 생각하면 아멜은 입맛이 돌고 호랑이 기운이 솟았다.
지난밤, 기꺼이 그녀의 탐욕과 호랑이 기운의 희생양이 된 카일은 까치집이 된 머리를 손으로 쓸어 정리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매끈한 살가죽 위로 보기 좋을 만큼만 드러난 가슴과 배의 근육들이 그녀를 한층 흡족하게 만들었다.
잠에서 막 깬 카일이 흰 베개에 얼굴을 부비다 저를 발견하곤 눈웃음 지을 때면 아멜은 심금을 울리는 미모에 입을 꾹 다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누나.”
“카일…… 우리 침구는 앞으로도 쭉 흰색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늦잠도 종종 자는 게 어때요? 충분한 수면은 치매를 예방한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요. 기왕 잘 거면 자연 상태로 편하게 자는 게 좋으니 방금 주운 셔츠는 이리 주세요.”
다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카일은 아멜 못지않은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침구라니. 앞으로도 쭉 한 침대를 쓰는 게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건강 걱정에 편의까지 봐주는 걸 보니 아멜은 점점 아내 역할을 욕심내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던가.
카일은 그녀의 손에 손가락을 얽으며 언제쯤, 어떻게 청혼하는 게 좋을까 생각에 잠겼다. 약혼반지는 이미 그녀의 손에 있었지만 청혼은 어물쩡 넘어갔으니 한 번 더 할 생각이었다.
프러포즈를 물 흐르듯 넘겼다간 예순이 되어서도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고 <오래가는 부부의 비밀>에서 귀띔하지 않았던가.
카일은 화목한 가정을 원했고, 아멜리아 차이엘드라는 달콤한 풀 네임을 위해서라면 휴가용 섬 네다섯 개쯤은 기쁘게 팔아넘길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평화부터 완성해야 하는데.’
수여식 파티에서 다이앤 백작에게 전해 들은 소식이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제 음심 때문에 보석의 색이 바뀐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3황자.’
아멜의 손등에 입을 맞추던 이타르의 행동은 약혼자가 있는 레이디에게 하는 인사라기엔 어딘가 애틋하고 야릇했다.
마치 오랫동안 흠모하던 여인의 앞에서 정도를 지키느라 손등의 키스로 만족하는 것 같았으니.
‘그러고 보니 내 약혼녀는 켈트만에 이타르가 있는지 궁금해하셨지.’
트라이하에서 물건을 샀다니 어쩌면 둘은 만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눈을 마주하거나 대화를 나누었을지도.
아멜이 들으면 낯을 붉히며 정색하겠지만 카일은 그녀와 3초 이상 눈을 마주한 사내라면 무조건 그녀에게 반해버린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눈동자가 이렇게 아름다운데 누구인들 안 반할까. 그러므로 이타르를 최우선 경계 대상으로 삼는 게 옳았다.
‘차이엘드의 피앙세에게 관심을 갖다니.’
약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애정을 품는 건 만국 공통의 부적절한 처사. 게다가 코델리아라고 추정되는 노파는 연금술 마법진을 이용해 마수들을 소환했다.
‘이타르의 뒤에 숨어 있는 마라바스가 손을 쓴 거겠지.’
처음 마라바스와 3황자 세력이 결탁했다고 들었을 때 성가시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 건 의외였다.
‘그만큼 잃을 게 없다는 건가.’
일국의 황자라면 황태자로 책봉되지 않는다고 해도 범인보다 월등히 많은 재물이나 권력을 누릴 터. 그럼에도 약혼녀를 해치기 위해 마라바스와 수를 썼다고 가정한다면……
‘다 잃을 걸 각오한 듯하니 그렇게 해주지.’
어젯밤 나타난 3황자가 무척 거슬렸다. 마수를 풀어 아멜을 위협한 노파는 말할 것도 없다.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그녀가 사라진 하일드의 부인이라니 복잡해졌다.
“카일. 그게 진짜예요?”
멍하니 생각하던 카일은 갑자기 물어오는 아멜을 보다 아차 싶었다. 약혼녀가 걸친 건 방금 건넨 셔츠 한 장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녀의 손엔 약혼반지가 있었다. 아마도 쭉 아레테를 사용하고 있었으리라. 그의 얼굴이 급격히 부루퉁해졌다. 결혼이나 프러포즈 생각엔 반응도 없었으면서.
“그 노파가 집사장님의 전 부인이면…… 잠깐, 나이가 안 맞지 않아요? 스무 살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 부분은 조금 더 조사해봐야 하겠지만 아마도 연금술의 힘일 겁니다. 다이앤 경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아버지가요?”
카일은 다이앤 백작에게 들은 말들을 아멜에게도 설명해주었다. 그녀의 낯빛이 전쟁이나 파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처럼 차츰 창백해졌다.
“아버지는 집사장님과 오래 알고 지내셨고 눈썰미도 뛰어나시니 사실일 확률이 높아요. 바네사도 마라바스의 힘이 느껴진다고 했어요.”
“이렇게 불안해하실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카일이 숨긴다고 해도 제가 언젠간 엿들었을 거예요.”
“……제 입으로 말했을 겁니다. 누나에게 비밀을 만들긴 싫으니.”
카일은 반쯤 앉아 있던 아멜을 끌어당겨 껴안았다. 이마와 뺨에 자잘하게 입을 맞추니 기분 좋은 향기가 풍겨왔다.
지그시 눈을 맞출 때마다 녹갈색 눈동자는 모든 걸 뒤엎어 갈아치우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을 덮어 끄는 한 줌 흙처럼 느껴졌다.
아멜이 자신을 진정시킬 때마다 카일은 생각했다.
당신을 투명하고 커다란 유리 새장에 가두고 싶다. 당신이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세상만 보며 웃고 재잘거리도록 감싸고 품기를 원한다.
안에 갇혀있는 줄도 모르는 당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크다. 멀리 가지 못하고 내 곁에만 있어 주겠지.
하지만 그건 당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다.
아멜은 이미 스스로 움직여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던 다이앤 백작가를 다시 세웠고 명예로운 백작위와 세수가 쏠쏠한 영지까지 받았다.
영애들에겐 인정과 신뢰를, 고용인들에겐 사랑을 받으며 제 사람들을 끊임없이 물들이는 데 도가 튼 게 제 약혼녀였다.
그렇다면 카일은 온순하게 아멜의 방식을 따르고 싶었다. 자신을 맹수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발톱도 이빨도 드러내지 않고, 길들여진 것처럼 얌전하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조바심내고 두려워하는 건 제 몫이 된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하나.
“……사랑합니다.”
카일이 귓가에 속삭였다. 난데없이 전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이라 아멜은 그의 등을 쓸던 손을 꾹 오므렸다.
“카일, 이런 식으로 기습하기예요?”
“최근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못 해드린 것 같아서.”
당분간은 처리할 일이 많았다. 일전에 거처를 습격해 확보해둔 마라바스의 소지품들과 서적을 분석하는 일이 때마침 끝났다고 했다.
연금술에 대해 거의 기초가 없다시피 한 하일 제국이었지만 그런 건 카일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바네사에게 마라바스가 트라이하의 로열 알케미스트 출신이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고용해온 연금술사들이 이미 차이엘드의 연구실에 들어차 있었으니까.
‘검기에 갇힌 마수를 넘겼으니 곧 결과가 나오겠군.’
운이 좋다면 배후인 이타르와 실제로 움직인 코델리아를 한 번에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운이 나빠 장기전이 된다고 해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아멜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모든 세력을 정리하고 평화를 선물하리라. 그리하여 그녀가 가장 행복해할 때 그녀를 가질 것이다.
카일리안 차이엘드의 사랑한다는 말은 그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이때의 아멜은 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