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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88화 (88/134)

#88

드넓은 차이엘드 공작저에는 클레어가 거처로 사용하는 건물 외에도 수많은 별채가 있었다.

나는 차이엘드가 그중 한 곳을 연금술사들에게 연구실로 내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합 훈장 수여식이 고작 며칠 전이니 아직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 하지만 천문학적인 연구비와 성과급이 보장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네사,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왔네요?”

“겨우 별궁에 있는 연구실에 다녀오는 것뿐인데요, 뭐. 마님이 보내셨다고 하니 웃으며 반기던걸요?”

“……그래요?”

“네. 연구 보고서가 마님께 인정받으면 공작 전하께서 보너스를 더 얹어 주기로 했다며 대단히 기뻐하더라고요.”

대체 카일은 돈을 어떤 기준으로 쓰는 것인가.

의문을 잠시 접어두기로 한 나는 바네사가 가져온 연구 보고서를 찬찬히 훑어봤다.

검기에 갇힌 마수들을 넘겨받은 연금술사들은 대기업의 연구원 뺨치는 분석을 진행했고, 마수에 대한 정보는 물론 마수를 소환한 코델리아에 대한 정보까지 상당량 수집했다.

연구 보고서에는 코델리아가 시간을 초월한 듯 급격히 늙은 이유가 마라바스의 연금술 때문이라고 나와 있었다.

‘코델리아의 모습이 연금술이나 마법을 이용해 빚은 가짜 모습일 수도 있어. 하지만 굳이 코델리아의 모습을 빌렸다면 그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나는 코델리아 웨일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집사장님과 아버지가 지인이 아니었다면 카일도, 나도 그녀가 코델리아인지 몰랐으리라.

일단은 그녀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타르와 마라바스가 그녀를 이용해 무엇을 하려는지도 내 나름 파악해두는 것이 최선이겠고.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이번 위기만 넘기면 정말 마지막이다. 이젠 더 나올 악역도 없어……!’

바네사가 주먹을 불끈 쥐는 날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님, 또 무슨 일 벌이시게요?”

“바네사, 당분간 저한테 힘 좀 빌려주셨으면 해요. 늘 하던 방식대로.”

“앤 스미스 님이 또 무슨 일을 벌이실지 예상도 못 하겠네요. 사람들이 앤 스미스의 정체를 알면 뒤집어질 텐데.”

바네사는 자연스레 타자기를 가져오려 했다. 나는 그녀를 저지하곤 창밖을 살폈다. 마차 한 대가 막 도착해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글은 나중에요. 슬슬 티파티 장소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아…… 며칠 전에 참가하기로 한 그 티파티요? 재미있을까요?”

“유용한 시간이 될 거예요.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얇은 레이스가 덧대진 부채를 집어 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귀족 영애라는 신분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때였다.

***

비슷한 시각, 카일은 고위급 회의 참석차 입궁 상태였다.

황궁의 원탁에서는 트라이하의 은 유입량이나 켈트만의 새 국왕 책봉식에 관한 이야기들이 깊이 있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회의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사이에 끼인 쉬는 시간에 다뤄졌다. 그 주체는 단연 황제 베르드와 차이엘드 공작이었다.

“차이엘드 공작. 자네 말대로 리엔 공주는 대단하더군. 짐과 혼인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어.”

“…….”

카일은 수여식에서 리엔과 우연히 마주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흥분 상태인 베르드를 쏘아봤다. 부족함만 없을까. 당신에게는 과분한 여인이라는 말이 목전까지 차올랐다.

“말씀드렸잖습니까. 좋아하실 거라고.”

“공주는 어쩜 그리 한 마리 늑대 같을까……”

“다른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제 약혼녀의 신변에 위협을 가한 노파에 관한 소식은 아직 없습니까?”

“왜 자네가 그 얘기를 안 하나 헸네.”

베르드는 황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최종 책임자였다. 황실 예산을 사용해 직접 개최한 훈장 수여식의 책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자네 말대로 사람을 풀어 트라이하의 마부와 고용인들, 숙소를 지키던 자들을 조사했네.”

“정황이 있습니까.”

“이걸 정황이 있다고 해야 할지 없다고 해야 할지. 황자에게 동행이 있었냐는 물음엔 모두 아니라고 대답했네만 자세히 설명해보라고 추궁하니 당시를 흐릿하게 기억하더군. 불과 며칠 전인데도 말이야.”

“이미 조치를 한 후일 겁니다.”

연금술이 성가신 건 단순히 방어가 까다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칼이나 약을 써서 상대를 위협할 때면 남곤 하는 물증이 연금술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감춰졌다.

“아무리 하일이 발전했다고 해도 예술이나 연금술 쪽은 트라이하를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지. 게다가 3황자는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들었네.”

“누이동생이 죽은 후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니 상당한 수준일 겁니다.”

“……자네가 그리 대답하는 걸 보니 이미 수를 써둔 것 같군.”

“연금술로 빚어낸 모든 건 역산(逆算)이 가능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주술을 거꾸로 빚어서 풀어버릴 생각인가?”

“예. 가능하다면 연금술을 사용한 주체가 누구인지도 알아낼 생각입니다. 우선 3황자의 처소를 지키던 경비들을 데려가고 싶으니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지. 대신 결과가 나오면 내게도 알려주게.”

카일은 베르드와 모든 걸 공유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마라바스의 은신처를 털어 마련한 자료들과 트라이하에서 데려온 연금술사들이 한가득이니 조만간 성과가 있을 것이다.

세계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반역에 가까운 생각 때문에 추방당한 마라바스가 황궁의 3황자에게 들러붙어 연명하고 있다는 물증은 이미 레이디 클레어가 확보했다.

수여식 날 아멜에게 불어닥친 마수들이 그의 마법진을 타고 나타났다는 것만 증명하면 이타르가 마라바스와 함께 아멜을 해하려 했다는 폭로가 가능해질 터.

‘3황자가 정말 다 잃을 각오까지 했는지가 변수겠군.’

카일은 제 약혼녀에게 입 맞추던 이타르를 떠올렸다. 손등에 가볍게 키스하던 순간 그가 짓던 탐욕스러운 얼굴이 신경에 거슬렸다.

그가 건조한 얼굴을 하자 베르드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하룻밤 사이에 약혼녀를 얻고 말랑말랑해진 공작이 이런 얼굴을 한다는 건 무언가 권능을 발휘한 후라는 소리였다.

“자네, 이타르의 몸에 칼이라도 꽂은 건 아니겠지? 제발 제국의 황제인 내 입장도 좀 생각해주게. 그런 방법은 안 돼. 적어도 사전에 협의라도 해 달라고.”

카일은 베르드에게 시선을 거두곤 먼 산의 능선을 바라봤다. 산허리에 걸친 구름이 느긋하게 흐르는 모습. 약혼녀가 사랑하는 평화가 바로 이런 느낌이리라.

“아직 물증이나 정황 증거가 확실하지 않으니 평화로운 방법으로 경고 정도만 했습니다.”

“……평화로운 방법?”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차이엘드다운 방법.”

카일은 몹시 뿌듯하다는 얼굴을 했으나 베르드의 등줄기에는 한 방울의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이타르 드 트라이하는 수도 외곽의 커다란 고택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황자는 지위에 걸맞게 수십 명의 호위와 고용인들을 대동했지만 구경꾼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이 조용했다.

정보를 빼가거나 감시원 역할을 할 다른 손님들이 없으니 3황자 일행은 한층 느긋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소란이 일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은 아니었다. 트라이하 일행이 머무르도록 허락해 준 저택의 주인 무리들은 마라바스의 정신 지배 아레테에 정신을 내준 터라 저항할 수 없었다.

이 모든 편의에도 이타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무뚝뚝하고 건조한 얼굴로 방구석에 앉은 코델리아를 째려봤다.

“마라바스. 말이 다르군. 오늘 아침이면 다이앤 영애의 아테레가 뭔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거의 다 되었습니다. 페르슈 다이앤의 검기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진작 되었을 겁니다.」

수여식 당시 코델리아가 아멜에게 푼 마수들은 아레테의 힘을 흡수하는 특성이 있었다.

그 배 속에 있는 힘을 분석해 어떤 기능을 하는지 알아내는 데에는 반나절이면 족하다 하더니, 마라바스의 분석은 영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타르는 짜증 섞인 눈으로 고용인에게 술과 얼음을 가져오라 명했다. 흐릿한 눈을 한 고용인들이 그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신기하긴 하군.’

아레테를 이용해 세계제국인지 뭔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들켜 황궁에서 내쫓길 당시만 해도 마라바스가 이 정도 실력을 쌓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원래도 영특해 눈길이 가는 인재였지만 윤리적 제약을 완전히 무시하는 지금, 마라바스의 정신 지배 주술은 어느 때보다도 빛을 발했다.

고용인들만 해도 그렇다. 잘 때 빼고는 마라바스의 주술에 정신을 빼앗긴 상태이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먹거나 자는 일처럼 본능적인 일은 무의식이 알아서 해결한다. 덕분에 이타르는 보안에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이타르는 내심 감탄했다. 마라바스 라이델이 없었더라면 단기간에 군사들을 집결시키고 세력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아나의 기일에 맞춰 반역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한낮의 단꿈으로 끝났으리라.

「다 되었습니다, 이타르 님.」

인형이나 다름없어진 고용인들을 바라보던 이타르는 다시 코델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무리 봐도 노파의 몸에서 젊은 남자 목소리가 나는 건 익숙해지지 않았다.

“다이앤 영애의 아레테는 무엇인가. 차이엘드 공작처럼 쓸모없는 방어계 아레테를 가지고 있진 않겠지.”

「영애의 아레테는 닿은 자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정신계 아레테 중에서도 매우 유용한 편에 속하리라 생각됩니다.」

“……마음을 읽는다고?”

이타르는 다소 어이가 없었다. 마라바스가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를 통해 얻은 정신 지배의 아레테가 그가 봐온 것들 중 가장 쓸모 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 다이앤의 능력은 그 이상. 가히 신이 부여한 능력이라는 아레테의 별칭에 걸맞는 힘이었다.

그녀를 손에 넣으면 그들의 입에서 진실이 나오도록 할 수 있으리라. 원한다면 뿌리부터 썩어빠진 제국을 갈아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아나.’

허망하게 죽은 그 아이가 다이앤 영애와 닮은 것은 우연일 리 없었다. 이타르의 머릿속에서 두 사람의 웃는 얼굴이 서서히 겹쳐졌다.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려던 그때였다.

수많은 발소리가 저택 로비를 장악했다. 잠시 긴장했던 이타르는 적당히 시간이 지나가리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저택의 주인은 별말을 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발걸음은 점점 가까워져 이타르가 머무르는 층에 이르렀다. 잰 듯 정확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이타르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그의 예상과 달리 방문객은 차이엘드나 황실이 보낸 추격대가 아니었다.

건물을 헐거나 다시 지을 때나 볼 법한 측량 전문가들과 조각가들이 작업복의 먼지를 툭툭 털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 건물의 주인께서 방 구석구석을 측량하라 명하셨습니다. 저희는 명 받은 대로 일할 뿐입니다.”

“건물을 착각한 것이겠지. 저택 주인은 향후 몇 달간 아무런 일정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건물 주인이 오늘 아침부로 바뀌었습니다.”

이타르는 물론 축 늘어져 있던 코델리아도 의문을 드러냈다. 하룻밤 사이에 건물의 주인이 바뀌다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란을 일으켰다간 ‘트라이하의 황자 일행이…’로 시작하는 신문 기사가 날 게 뻔했다.

“다른 거처를 찾을 때까지만 잠시 기다려주겠나?”

이타르는 마라바스에게 정신 지배를 당하는 중인 고용인들을 풀어 주변의 저택들을 방문하게 했다. 거금을 쥐여준다면 누구든 하일과 켈트만의 약혼식이 시작되는 날까진 머물게 해주리라.

하지만 어이없다는 얼굴로 돌아온 고용인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말만 되풀이했다.

“저택의 주인이 오늘 아침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답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변두리의 저택들이 갑자기 모두 매입되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한 이타르의 머릿속에 문득 앞발을 든 짐승의 문양이 떠올랐다. 차이엘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족속.

‘……순순히 출국하라는 건가. 주변 건물들을 죄다 인수했다면 그런 뜻일 테지.’

이를 으득 간 이타르는 별다른 대책을 떠올리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짐을 꾸리라 명했다.

아멜이 카일의 실사판 부루마블 소식을 듣고 입을 쩍 벌리게 되는 건 얼마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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