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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 예정 연하남주가 내게 빠졌다-89화 (89/134)

#89

명망 높은 부르크 백작저의 안주인 부르크 백작 부인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소규모 다과 모임을 개최해왔다.

모임은 보통 신문을 같이 읽거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이슈를 정해놓고 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주를 이뤘는데 특이하게도 남녀 모두 참가가 가능했다.

동년배의 귀족 부인들은 물론 영애들도 꺼리는 이 깐깐한 모임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금일의 참석자 리스트가 유출된 후부터였다.

‘우리 어머니가 내게 티파티 초대장을 보낸 게 드러난 다음부터 초대장 값어치가 확 뛰었다고 했지.’

나는 촉촉한 케이크를 한 입 떠먹으며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부르크 백작저의 사교 모임에 참석한 귀부인들이 우아한 몸가짐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람들과 경비 인력이 꽉 들어찬 공간임에도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건 늘 곁에서 날 경호하던 바네사가 하일 타임스에 심부름을 갔기 때문이리라.

이 자리에 참석한 귀부인들은 내가 평소 만나는 영애들과 부류가 달랐다. 모두 사교계에 20년 이상 몸담은 베테랑들.

게다가 부르크 백작 부인의 깐깐한 심사를 통과했으므로 어느 정도 교양과 학식을 두루 갖추었다는 소리였다.

학부생 시절, 회식 때 자리가 잘못 걸려 교수님들만 계신 테이블에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지금 기분이 그때와 비슷했다.

‘그래. 일단은 내가 모을 수 있는 자료부터 모아볼까.’

모임 참석 경험이 많은 귀부인들만큼 세간 소문에 빠삭한 존재는 없다. 여기서만 들을 수 있는 소문이 분명 있을 터.

하일드 집사장님과 아내 코델리아에 대한 얘기는 클레어가 정확히 알고 있을 테니 귀국하는 대로 들으면 된다. 프링글스 사장님이 내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면 관련 자료를 기꺼이 모아주시리라.

‘지금은 3황자 얘기를 캐볼까.’

헛소문이거나 누군가가 악의로 퍼트린 루머일 확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모든 소문에는 아주 작을지라도 근거가 있기 마련. 나는 그 근거를 수집할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훈장 수여식 때 트라이하의 3황자님을 뵈었답니다. 바다 건너 대륙에서 하일까지 먼길을 와주셨더라고요.”

예상대로 귀부인들의 눈동자에 흥미가 차올랐다. 알고 계신 게 한둘이 아닌가 본데.

“트라이하에서 일부러 보낸 것이겠지요. 듣자 하니 연금술로 만든 이동 주술을 이용하지 않고 마차를 이용했다던데.”

“로열 알케미스트들이 즐비한 나라에서 황자에게 그런 처사라면…… 눈 밖에 났단 소리지요.”

“망신을 주려 일부러 이동 경로를 그렇게 짠 거예요.”

“황자의 현 입지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조치이지요. 최근엔 반역을 꾸민다는 소문도 돌던데, 사실일까요?”

과연 나와는 사교계 짬이 달랐다. 나는 그저 이타르가 경치 구경이 하고 싶었구나, 생각했는데 이런 깊은 해석이 가능할 줄이야.

“3황자 이타르는 황태자 측과 대립하고 있어요. 3황자의 지지세력 또한 그와 함께 황태자 측을 경계하는 상황이라지만……”

“레오시스 2세의 건강이 악화된 지금 전적으로 유리한 건 황태자로 책봉된 1황자죠.”

“이대로 황태자와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이타르의 입장이 꽤나 곤란해질 텐데 말이에요.”

트라이하의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나는 말하는 대신 듣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시냐는 가벼운 물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니 귀부인들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황태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계승 전쟁에서 패배했으니 황실 측에서도 3황자 남매가 눈엣가시였을 거예요.”

좋아, 물었다. 이타르는 나를 보며 여동생을 떠올렸고 결국 나를 파멸 필수템으로 지정했으니 그녀에 대해 조사하는 건 필수였다.

“3황자 남매라면…… 다른 한 분은 돌아가신 이아나 공주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3황자께서 그분을 무척 아끼셨죠.”

“일전에 트라이하에 갔을 때 잠깐 뵈었는데 우애가 아주 깊어 보이더라고요. 둘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어요.”

“그러고 보니 다이앤 영애와 웃을 때 닮았네요. 보조개가…… 어머,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앞길 창창하신 분에게.”

그래. 이타르도 나와 이아나가 닮았다고 했지. 눈동자 색도, 머리카락 색도 다른데 말이다.

“공주도 참…… 젊은 나이에 안타깝긴 하더라고요. 사인이 뭐였죠?”

“트라이하 황실에서는 사인을 공개하지 않았었죠. 달랑 죽었다는 발표만 해서 하일의 영애들도 겁먹었던 걸로 기억해요.”

한 귀부인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귀부인들도 그제야 생각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인이 공개되지 않은 죽음이라니.

무서운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팔뚝에 돋아 오르는 소름을 문지를 즈음, 한 귀부인이 다들 알고 있지 않냐는 투로 말했다.

“떠도는 이야기지만 사인은 타살이라던걸요?”

그래, 이게 내가 찾던 소문이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귀부인의 말을 경청했다. 이타르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가 여동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라면 나는 그녀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옳았다.

“타살이라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공주가 하루아침에 쓰러져 죽었으니 독약이나 연금술을 이용한 타살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외상이 없었나요?”

“네. 전날 부상을 당했다거나 넘어졌다는 말도 없었다던데요? 3황자 측근 귀족의 아들과 막 교제하기 시작했던 터라 자살의 징후도 없었고요.”

“아…….”

“그때 제 남편이 트라이하에 출장을 가 있던 터라 비교적 자세히 들었답니다.”

귀부인의 설명을 들으니 이타르가 동생의 죽음에 집착하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갑작스러운 죽음. 그러나 수사권이 있는 황제와 1황자 측은 급히 덮어버리듯 장례를 치르고 이아나의 죽음을 돌연사로 마무리 지었다.

그녀를 아끼던 친오빠의 입장에선 철저히 수사하지 않는 그들에게 원한을 품는 게 당연하다.

‘여기서부턴 다행히 읽은 기억이 나네. 이타르는 동생 일로 미쳐서 칼을 갈다가 연금술의 힘을 이용해 반역을 일으키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역할로 나왔지.’

이타르 드 트라이하라는 캐릭터가 하일을 정복하고자 한 건 영영 잃은 여동생의 자리를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타르는 그만큼 여동생인 이아나를 아꼈고, 그 여동생을 죽인 황태자 세력에게 수없이 적대감을 드러내곤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타르는 아직 반역을 일으키지 않았다. 앞으로 일으킬 예정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파멸의 청사진에 내가 없길 바랄 뿐.

이아나 공주가 타살당했다면 용의자는 이타르의 추측대로 1황자의 측근이거나 그 자체일 가능성이 컸다.

공주의 죽음으로 이타르는 완전히 동력을 상실했고 그게 그들의 승리 요인이었으니. 이아나의 죽음으로 가장 득을 본 건 누가 뭐래도 1황자와 측근들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이타르의 서사에 기시감과 연민이 동시에 들었다.

***

붉은 눈동자가 서류를 눈에 담은 채 찬찬히 움직였다. 가끔씩 느껴지는 마차의 덜컹거림은 보고서를 훑어보던 카일의 집중력을 깨지 못했다.

카일이 정독하고 있는 것은 연금술사들이 몸을 갈아 만든 보고서였는데, 단 일주일 만에 나온 것치고는 퀄리티가 상당했다.

‘저항하지 못하도록 연금술을 이용해 일부러 육체를 노화시켰다는 건가. 생각보다 능력 있나 보군.’

카일은 노화 주술의 주체인 마라바스 라이델을 떠올리며 싸늘한 얼굴을 했다. 차이엘드 별궁의 연금술사들도 입을 모아 그가 불세출의 천재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주변 저택들을 모두 인수했으니 지금쯤 일단 물러났겠군.’

그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얇은 실크 원피스만을 걸친 아멜을 눈에 담은 적이 있었으며 무려 누나에게 음심을 품은 이타르에게 붙었다.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알을 뽑고 감히 그녀를 탐하려 했던 손가락을 하나하나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다시는 아멜리아 다이앤이라는 이름을 발음하지 못하도록 혀는 미리 잘라두는 게 좋겠지.

켈트만에서 가고일 백작을 이용해 제 가장 나쁜 기억을 끄집어냈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하리라. 자연스레 자신을 악몽에서 구해낸 아멜을 떠올린 카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누나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보고서를 훑어보던 카일은 창밖을 힐끗 바라봤다. 약혼녀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던 부르크 백작저에는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어쩌다 시간이 맞아 하는 깜짝 방문이니만큼 그녀가 기뻐해줬으면 했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결혼 일정 관련 논의를 한다면 최고겠지.

‘……신혼여행은 어딜 원하실까.’

이미 숱한 밤을 함께 지샌 사이라지만 첫날밤을 어디에서 보낼지는 중요했다. 카일의 얼굴이 결국 자제력을 잃고 펑 달아오를 때였다.

“공작 전하. 바네사 양입니다.”

마차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하일드가 담백하게 고했다. 카일 또한 망토를 벗어 가방에 넣으며 걸음을 재촉하는 바네사를 발견했다.

어디를 급히 다녀오는 것인지 체력이 강철 같은 여자가 숨을 몰아쉬고 있다. 손에 들려 있는 신문은 광장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었다.

‘부르크 백작저에서 광장까지?’

그렇다면 장장 10분 동안 사랑하는 약혼녀가 경호도 없이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소리였다. 카일은 말을 세우게 했다.

“바네사 메이브란테.”

“어머, 공작 전하? 마침 잘 만났네요. 다리가 아프니 태워주세요. 어차피 마님께 가는 길이시잖아요?”

카일은 뻔뻔하고 싹싹한 바네사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무릎과 허리를 통통 두드리는 걸 보니 정말 부지런히 걸은 것 같긴 했다.

“어딜 그렇게 바삐 다녀오는 거지?”

“뭐, 잠깐……”

“차이엘드는 너를 경호차 고용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냥 경호 똑바로 하라고 말을 해라, 이놈아. 바네사는 목전까지 차오른 욕지기를 꾹 삼키곤 영업용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하는 일은 다 마님의 편의를 위한 일이랍니다. 켈트만에서 제 실력 보셨잖아요?”

“…….”

“뭐, 월급 주는 건 공작 전하시니 캐물으신다면 대답해 드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마님은 그런 일을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무슨 생각으로 자리를 비웠는지 모르겠군.”

“마님께서 물건 전달을 시키셔서. 자세한 건 묻지 말아주세요. 의처증 환자도 아니고……”

“…….”

의처증이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린 카일은 팔짱을 낀 채 바네사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훑어봤다.

아멜은 제 신변의 위협쯤이야 간단히 파악하고 있을 만큼 똑똑하고 영리했다. 그런 사람이 이 시국에 경호원을 심부름 보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안이라는 뜻.

‘……이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카일은 바네사의 가죽 가방 바깥으로 삐죽 삐져나온 천 조각을 바라보았다. 저건 분명 착용자의 신분을 감춰주는 망토였다.

일전에 맡은 적 있는 남자 향수 냄새가 어스름히 풍겨온다.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온기가 사라졌다.

‘뭐, 뭐지? 눈치챈 건가? 마님 몰래 편지를 배달한 게 들키면 나 정말 잘리는 거 아냐?’

불안해진 바네사는 하일 타임스 사 앞의 광장에서 주길래 별생각 없이 받아온 신문을 읽는 척 펼쳐 얼굴을 가렸다.

자신이 펼친 신문의 뒷면에 어떤 광고가 있는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녀였다.

[<지난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작가의 신작! <바람피우기 좋은 날> 전격 출간!]

몇 번이고 광고를 곱씹던 카일리안 차이엘드가 세상 무너진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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